>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쇼펜하우어, “인생 이야기는 항상 고통의 이야기다”

박소영 기자 | 기사입력 2014/12/08 [10:20]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쇼펜하우어, “인생 이야기는 항상 고통의 이야기다”

박소영 기자 | 입력 : 2014/12/08 [10:20]

▲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책표지.     © 주간현대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는 2010년 데상브로 상을 수상한 책으로 프리드리히 니체, 페르난두 페소아, 마르셀 프루스트 등 모럴리스트로 불릴 만한 사상가 10인의 문장들로 빚어낸 ‘생의 슬픔’에 관한 철학 에세이이다. 현대의 노예적 인간, 우울과 애도의 차이, 권태와 쾌락, 이성이라는 환상, 상실과 죽음, 사랑 등에 대하여 자신만의 철학적 사유를 펼쳐보이며 낙관론에 마비되지 않고 인간의 현실을 또렷하게 보여 생의 감각을 일깨운다.<편집자주>

세상은 질서정연한 코스모스가 아닌 ‘혼돈의 카오스’
인간이 배우는 본질적인 것은 불행의 경험에서 온다
 
 
[주간현대=박소영 기자]
이 책은 삶에 점철된 고통과 부조리를 냉철하게 직시하고자 했던, 이른바 모럴리스트로 불릴 만한 사상가 10인의 문장들로 빚어낸 ‘생의 슬픔’에 관한 철학 에세이다. 그 사상가들은 프리드리히 니체, 페르난두 페소아, 마르셀 프루스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미셸 몽테뉴 등이다.

슬픔에 관한 십계명

저자는 이들의 문장에 기대어 현대의 노예적 인간, 우울과 애도의 차이, 권태와 쾌락, 이성이라는 환상, 상실과 죽음, 사랑 등에 대하여 자신만의 철학적 사유를 펼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삶에 잡힌 주름과 살아가는 일의 괴로움을 재치 있고 신랄하게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무책임한 낙관론에 마비되지 않고 인간의 현실을 또렷하게 응시하도록 생의 감각을 일깨운다. 저자는 이 책으로 2010년, 세계에 대한 비판적 진보적 사유를 보여준 작가에게 주어지는 데상브르 상을 수상했다.

먹고 사는 일은 고되고 애달프다. 자본가는 제멋대로 노동자를 부리고, 노동자는 개인적 삶을 소진해가며 일하지만 사는 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저자는 “하루의 3분의 2를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다”라는 니체의 문장을 빌려 노동하는 인간의 비애로 서두를 연다. 계산해보자. 법적 근로시간은 하루 8시간이지만 거기에 수고로운 출퇴근 시간도 더해야 하며, 집에 돌아오면 힘들기로는 직장 일에 뒤지지 않으면서 표도 잘 안 나는 가사노동이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내 것이 아닌 시간을 제하면 고작 수면 시간이 남는데, 이조차 그 옛날 프롤레타리아들을 재촉하던 사이렌 소리 같은 기상 알람으로 중단된다. 이 현대적 노예의 초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저자는 인간들이 현재 노예 상태에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계급과 시스템의 부조리를 문제 삼기보다 오히려 노예적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지적한다. 저자가 볼 때 사람들은 자신의 인간다움을 망가뜨리는 노동을 감내하면서 괴로워하지 않는다.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에 대한 선천적인 공포와 전체에 포함되고자 하는 욕구로 인해 자신을 망각하고 일에 몰두한다. 더욱이 신노예들은 학교나 현장에서 오직 장사를 위해 양성된 인간이기 때문에 부끄러움도 모르고 ‘상품’의 운명을 드높이는 데만 혈안이다. 니체라면 이것을 노예근성이라 할 것이다. 온 삶이 직업적 언어와 행동에 물들어 일터에 대한 소속감으로 충만한 인간에게 영혼이 무너지는 대참사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해고통지서를 받는 일이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그저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가변적인 병력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이성적 동물인 인간은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법칙, 목적성, 이유 따위를 찾으며 자신의 삶은 순리대로 나아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자식의 죽음, 동족의 폭력, 실직, 지독한 암세포를 예고 없이 맞닥뜨리면 그제야 세상이 무너진 것 같다고 느낀다.

그러나 저자는 ‘무너진 것은 세상이 아니라 인간의 환상’이라는 말로 우리의 착각을 환기한다. “자연은 영원한 시소”라는 몽테뉴의 말대로, 인생은 탄생과 죽음, 번영과 비참, 건강과 질병, 사랑과 배신 사이에서 흔들리는 감각들의 연속일 뿐이다. 세상의 본질이 이러할진대, 모든 것을 꼬치꼬치 따지고 이성에 연연하는 인간, 역사와 세계에 끈덕지게 의미를 부여하려는 목적론자는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세상은 혼란의 악다구니이며 그 세상 속 삶은 고통”이라는 저자의 확고한 염세주의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이라 일컫는 순간에조차 우리는 그것이 곧 사라질 것을 느끼며, 또다시 불행이 닥쳐올 것을 안다. 샹포르의 비유대로 “아름다움과 완전함만을 바라보며” 엄연히 존재하는 고통을 외면하기보다, 우리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되는 생의 괴로움을 직시하는 편이 저자에게는 현명한 인간이다.

현대인들에게 주는 시사

저자는 현대의 여가 활동, 즉 과시적인 스포츠, 여행, 파티, 최첨단 통신 기기 따위에 탐닉하는 일이 인간의 진정한 휴식을 빼앗는 노동의 연장임을 상기시킨다. 몰개성적인 욕망을 좇는 군중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고독한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여가라는 것이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포토뉴스
4월 둘째주 주간현대 1246호 헤드라인 뉴스
1/3
광고
광고
광고
많이 본 기사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