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 클래식 거장’으로 통하는 독일 태생 영국 작곡가 막스 리히터는 음악으로 인문학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니버설뮤직 산하 데카 레코드를 통해 발매한 그의 아홉 번째 스튜디오 앨범 <인 어 랜드스케이프>(In A Landscape)가 새삼 증명하는 사실이다. 바흐와 퍼셀부터 키츠와 워즈워스, 앤 카슨이 쓴 시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학에서 영감을 얻은 곡들은 삶에 대한 원근법이 뛰어나 그 깊이로 청자를 끌고 들어온다.
리히터의 현학적인 작법은 현실 세계를 살균하기는커녕 자신의 음악세계와 다른 이들의 일상을 접속사 없이 연결시키는 묘를 발휘한다. 열아홉 개의 트랙으로 구성된 이번 음반이 리히터의 자화상이자, 시대의 풍경화가 되는 이유다. 다양한 분야에서 리히터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홉 번째 앨범 ‘인 어 랜드스케이프’는 리히터의 자화상이자 시대의 풍경화
참선하듯 음악 작업 임하는 리히터는 우리 시대 흔들리지 않는 음악 구도자
▲ ‘네오 클래식 거장’으로 통하는 독일 태생 영국 작곡가 막스 리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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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태생 영국 작곡가 막스 리히터는 킴 존스의 디오르 쇼 배경음악을 비롯 웨인 맥그리거의 발레 음악, 드니 빌뇌브와 마틴 스코세이지, 아리 폴만 감독이 연출한 영화와 TV 드라마 등에 참여했다. 지난해엔 록스타, 팝스타들이 대거 출연한 영국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 무대에 할리우드 배우 틸다 스윈튼과 함께 오르기도 했다. 또 예술적 시도인 ‘슬립’ 음반으로 이케아와 같은 대기업과 이벤트 협업도 했다.
그 가운데도 참선하는 마음으로 음악 작업에 임하는 리히터는 우리 시대의 흔들리지 않는 음악 구도자다. 다음은 최근 리히터와 화상으로 나눈 일문일답.
“나는 창의 작업의 반만 차지할 뿐”
-이번 음반은 전자음과 어쿠스틱, 인간계와 자연계, 인생의 굵직한 질문과 생활의 조용한 기쁨 등 대항 또는 대적하는 세력들을 조화시킨 균형감이 탁월하다. 그것이 사운드든 메시지든. 그런 균형 감각은 어디서 나오고 그걸 음악에 녹여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무엇인가?
▲우선 나는 창의성과 음악은 반대되는 요소가 조화할 수 있는 공간이라 생각한다. 이번 프로젝트의 주된 중점은 창의적인 맥락 안에서 다른 요소들의 하모니였다.
-스튜디오 리히터 마르가 이번 음악에 미친 영향이 있다면? 반대로 이번 앨범이 그 공간에 미치는 영향도 있을 것 같은데. 이 앨범 작업과정 혹은 작업을 마치고 해당 공간이 바뀐 측면이 있는가?
▲스튜디오 리히터 마르는 20년간 준비해온 프로젝트였다. 우리는 도시에 익숙해진 삶을 살고 있다. 여기 스튜디오 공간에선 다양한 방식의 문화예술과 일상을 자연 속으로 불러들여 조화롭게 만들고자 한다.
-당신의 음악은 익숙한 것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하고 낯설게 만든다. 그래서 더 상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내가 만든 음악이지만 듣는 분들은 저마다 겪어온 게 다르기 때문에 결국 각자 특별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내가 만든 역사, 듣는 분들이 겪는 역사가 대조를 이룬다. 달리 말해서 바흐친의 생성 구조 규범에 따라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현대의 맥락에 따라 재해석되는 것이다. 다른 비유로, 익숙한 조각품이더라도 360도로 살펴보면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나는 창의적 작업의 반을 차지할 뿐 나머지 반은 다른 분들이 채워주는 것이다. 이러한 반과 반이 합쳐져서 풍요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헤겔의 변증법에 따른 정반합 이론이 생각나게 한다. (정반합은 기존 기본적인 구도가 정(正)이라고 할 때 시간이 흐른 뒤 이것과 상반되는 반(反)이 만들어진다. 이 정(正)과 반(反)이 갈등을 겪으면서 합(合)으로 초월한다는 논지다.)
▲아침부터 헤겔의 이야기를 들을 줄 몰랐는데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음악은 만든 이와 듣는 이가 공통적으로 사색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작곡가로서 교육을 받아 음악이 강연같았다. 늘 많은 정보가 포함돼 듣는 이로 하여금 해석을 불러낼 공간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만든 이와 듣는 이의 사이가 공평한 걸 추구한다. 음악 작품을 통해 청취자가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질문할 수 있도록.
“작곡은 세상 탐구 방식 중 하나”
-이번 앨범에는 다양한 문학작품과 인간에 대한 성찰이 담겼다.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이 음악들 사이사이에 외부 현장에서 녹음한 소리들과 일상의 왁자지껄함을 포착한 아홉 개의 ‘라이프 스터디(Life Study)’가 배치됐다. 문학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이 유연하게 연결된다. 그래서 통으로 들으면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랙리스트 배치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대목은 무엇인가?
▲우선 대칭적이고 대조되는 요소를 조화 배치하는 게 시작이었다. 작곡 요소가 일종의 목적성이자 내러티브를 형성한 트랙이 있고, 반대로 생활 모습 그대로 자연에서 중요한 발견을 담은 트랙도 있다. 그걸 번갈아 배치했는데, 달리 말하면 여러 챕터의 소설로 표현한 것이다. 이상적인 청취 경험은 한 번에 전체를 듣는 것이겠지만, 원하는 순서대로 듣거나 해도 상관없는 이유다.
-당신은 음악으로 도(道)를 찾는 구도자 같다. <기생충> <오징어게임>의 정재일 음악감독 같은 한국의 천재 뮤지션이 당신을 존경하는 이유 아니겠는가? 음악에 도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작곡은 살아가는 세상을 탐구 방식 중 하나다. 그러니 작곡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 관계를 찾는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창의적인 예술의 아름다움이다. 음악뿐 아니라 소설, 영화도 다른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경험하게 해준다. 그런 경험들은 다른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질문이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 탐구하는 여정에 대해 물은 것이라면, 나는 구도자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은 도를 찾는 동시에 일상의 혁명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전 음반 <보이시스>는 인권선언문이기도 했다. 당신은 음악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분명 음악은 사람의 정신, 감정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 아침에 라디오에서 우연히 베토벤 7번 교향곡을 듣는다면, 그 하루는 1%라도 더 나아질 것이다. 그렇게 작은 수치가 모이다 보면 분명 사회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특정한 음악은 아무런 이유 없이 삶과 엮이지 않는다. 냉전 시대 종식 이후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이 자주 들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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