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사건의 재구성② 대구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11년 만에 발견된 유골…‘사이코패스의 난자 흔적’

조미진 기자 | 기사입력 2015/10/24 [14:34]

미제사건의 재구성② 대구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11년 만에 발견된 유골…‘사이코패스의 난자 흔적’

조미진 기자 | 입력 : 2015/10/24 [14:34]

우리나라 3대 미제 사건 중 하나인 대구 개구리소년 실종은 대구 와룡산에 도롱뇽 알을 채취하러 갔던 초등학생들이 행방불명 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온갖 설이 난무하면서 아이들 주변인들에게도 의심을 보내는 눈초리가 많았다. 당시 사건은 전 국민적인 관심을 받으며 대대적인 경찰 수사가 진행됐으나 아이들을 찾지 못하고 점차 국민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그러다 11년이 지난 2002년 아이들이 실종된 와룡산 중턱에서 개구리 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됐다. 더욱 놀라운 것은 두개골 등 여러 증거들로 아이들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졌다는 점이다. 살인범은 와룡산 일대를 잘 알고, 노동자이거나 노동자로 일한 경험이 있으며 살인 자체를 즐기는 사이코패스 성향의 인물로 추정됐다. 그가 살아 있다면 또다시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편집자 주>


 

도롱뇽 알 채취하러 인근 와룡산 올라간 5명의 아이들

그대로 행방불명…경찰 총출동 수색에도 시신 못 찾아

    

주변인물 대한 억측도…2002년 등산객에 유골들 발견

노동자들이 쓰는 둔기 자국의 유골…용의자도 못 추려

 

 

[주간현대=조미진 기자] 대구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으로 알려진 ‘대구 성서 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은 우리나라 ‘3대 미제 사건’ 중 하나로 1991년 5명의 남자 어린이가 동네 인근 와룡산에 도롱뇽 알을 잡겠다고 나섰다가 행방불명 된 사건이다. 그런데 2002년 아이들의 유골이 와룡산에서 발견됐으며 누군가에 의해 살해 된 흔적들이 발견 됐다.

    

1991년 3월 임시공휴일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전국 시·군·구의원 선거로 법정 임시공휴일이었던 지난 1991년 3월26일 오전 8시 경 대구 성서 초등학교(현 초등학교)에 재학 중 이던 우철원(13·6학년), 조호연(12·5학년), 김영규(11·4학년), 박찬인(10·3학년), 김종식(9·3학년), 김태룡(10·3학년) 이상 6명의 아이들은 조호연 군의 집 앞에 모여 놀고 있었다.

 

그때 조호연군의 집에 세 들어 살던 청년이 아이들에게 ‘시끄러우니 나가서 좀 놀아라’고 말했다. 이에 아이들은 다른 장소와 놀이거리를 생각한 끝에 도롱뇽 알을 채집하러 동네 인근 와룡산에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이중 김태룡(3학년)군은 아침을 먹지 않고 나왔기에 집에 가서 빨리 아침을 먹고 뒤따라가기로 했다. 남은 다섯 명은 분유깡통과 막대기를 들고 와룡산으로 향했다. 밥을 먹고 아이들을 뒤따라간 태룡군은 와룡산 입구에서 다른 아이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엄마가 ‘너무 멀리 나가서 놀지 말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 산까지 아이들을 좇아가지 않고 곧 집으로 돌아갔다. 이 한 번의 선택으로 태룡 군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게 됐다.

 

한편 당시 조호연의 형(중학교 1학년)은 자전거를 타고 와룡산을 지나가다가 아이들이 지나가는 것을 봤다. 형은 ‘도롱뇽 알을 잡으러 간다’는 말을 듣고 그대로 집으로 내려갔다.

 

와룡산 기슭 마을에 살던 한 아주머니도 일찍 투표를 하기위해 학교 쪽으로 내려가던 중 오전 9시경 산으로 올라가던 아이들을 목격했다.

 

또한 우철원(6학년)군과 같은 반 친구였던 김경열, 이태석 군도 ‘정오 무렵 철원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와룡산 입구를 지나는 것을 봤다’ 고 증언하기도 했다.

    

다급하게 들려 온 비명소리         

    

같은 학교 4학년이었던 함승훈 군도 이날 동네 형들과 함께 도롱뇽 알을 채취하기 위해 와룡산에 올라갔다. 그러다 도중에 형들과 떨어져 혼자 와룡산 중턱 무덤가까지 가게 됐다. 그런 와중이었던 오전 11시 30분 경 산 위쪽에서 약 10초 간격으로 두 차례 다급한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다섯 아이들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오후 6시가 지나도록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자 부모들은 아이들을 찾다가 이내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한 시간은 당일 오후 7시 30분이었으며, 경찰과 부모는 새벽 3시까지 와룡산 부근을 뒤졌지만 역시 아이들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경찰 인력은 아이들이 사라졌다는 부모들의 신고에도 불구하고 투표소 관리에 집중돼 있어서 초동 대응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또한 경찰은 처음부터 이 사건을 실종사건이 아닌 우발적 가출으로 잠정결론을 내리고 수사에 임했던 것으로 추후 드러났다.

 

 

▲ 실종됐던 대구 개구리소년들.     © 주간현대

 

 

2002년 지역 매체 보도에 따르면 개구리 소년이 실종된 지 일주일 후인 지난 1991년 4월1일 당시 대구 달서경찰서 회의기록에는 달서경찰서가 이 사건을 집단가출로 미리 규정하고 소년계에서 단독 처리한 것으로 돼 있는 것이다.

    

사건 당일 와룡산에서 비명소리를 들었다는 함승훈 군의 증언도 경찰은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지나쳐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이 사건은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삽시간에 알려졌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는 특별지시를 내려 전국의 경찰과 군인을 총동원해 현장인 와룡산을 포함해 전국을 뒤졌다. 그러나 아이들을 찾지 못했다.

    

경찰은 유가족의 주장대로 와룡산 일대를 집중 수색하지 않고 이를 중간에 중지하고는 다른 방향으로 수사 인력을 동원했다. 신고접수 이후 이틀 동안 와룡산 수색을 한 후 가출로 방향을 선회해, 수사범위를 확대한 것이다.

    

경찰은 와룡산 일대 수색을 3월26일과 27일 양일간 8회에 걸쳐 550명이 투입된 반면 유해업소 등의 수사에 1076명을 동원했다.

    

경찰 수사의 오류와 의혹

    

아울러 사건 발생 직후 금품을 노린 범인으로 추정되는 30대 남자의 협박전화가 걸려왔으나 이를 끝까지 외부에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범인을 놓쳤다는 자성이 수사 경찰관과 실종 어린이 가족들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5명의 아이들이 실종된 지 2~3일 뒤 범인으로 추정되는 30대 남자가 종식군의 집과 외삼촌집으로 잇따라 전화를 걸어왔다. 이들은 현금 400만원을 와룡산 정상으로 가지고 오라고 요구했지만 경찰은 돈을 노린 납치범들의 소행으로 알려질 경우 모방범죄가 추후 발생할 것을 우려해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첫 번째 협박 전화에 따라 돈을 갖고 약속 장소에 갔지만 범인이 나타나지 않았고, 이에 외삼촌 집으로 온 전화에 대해선 경찰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실종 당시 수사팀에 속해있던 한 경찰관은 언론을 통해 “범인이 종식군의 집으로 협박전화를 했다는 사실을 일절 외부에 알리지 말도록 상부로부터 지시 받았다”며 “당시에는 사건을 단순 가출 쪽으로 몰아가려는 분위기였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당시 사회분위기에서 ‘별 다른 이유 없이 아이들을 유괴, 살해하는 범죄’사례가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에 경찰이 이를 생각하기 어려웠다는 분석을 하기도 한다.

   

또한 당시는 아이들과 관련해 각종 허위신고가 남발하는 탓에 수사를 담당하는 경찰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등 문제도 많았다. 그만큼 국민들의 관심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때문에 많은 음모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카이스트에 재직 중이던 모 범죄심리학자는 실종된 김종식군의 아버지인 김철규가 아이들을 죽이고 집 근처에 암매장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해당 음모론은 이 사건을 각색한 영화 <아이들..>에서 자세하게 나오기도 했다. 이로 인해 김철규씨는 음모의 주인공이 되며 괴로워했고 또한 사건에 대한 후유증으로 술로 삶을 보내다 2001년 간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등산객이 유골 발견

    

그렇게 아이들을 찾지 못하고 11년이 지난 2002년 9월26일,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올랐던 한 등산객에 의해 실종된 다섯 아이의 시신이 발견됐다. 시신은 와룡산 중턱에 묻혀있었고 이곳은 과거 군부대 사격장 부지였던 장소였다. 또한 인근 아이들이 탄피를 주웠던 곳이어서 오발탄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나왔다.

    

그런데 유골 발굴 당시 4명의 유골이 먼저 발굴됐고, 추후 마지막 한 명의 유골이 추가로 발견됐다. 이 때 먼저 발굴된 4명 아동의 유골은 허술한 방법으로 발굴됐으며 이후 추가로 발견된 유골만이 법의학자에 의해 제대로 된 도구와 방법으로 발굴됐다. 때문에 아이들 유골에서 치아 손실 등이 많았던 것이 잘못된 유골 발굴에 의한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또한 이때 경찰은 정확히 부검도 안 된 상태에서 ‘아이들은 조난을 당했고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우를 범했다.

    

이러한 경찰의 주장은 법의학자들과 유가족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첫째, 와룡산은 300m도 안 되는 야산이라 조난당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이들은 충분히 산을 내려올 수 있는 나이였다. 가장 나이가 많았던 우철원군은 13살이었으며 실제로 2011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이 13살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험해 본 결과 모두 산을 내려오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늦은 밤이라고 해도 바로 근처에 마을이 있어 불빛을 쉽게 포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한 아이의 옷소매가 뒤로 묶인 상태였고 이 매듭의 형태나 강도가 풀리지 않도록 잘 묶여진 형태로 보통 사람들이나 아이들이 아닌 전문가나 관련 업계 종사자들이 쓰는 형태였음에도 경찰은 ‘저체온증에 걸리면 체온을 착각하는 등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며 일축했다.

    

결국 경찰의 입장과 달리 법의학자들은 부검을 통해 아이들의 사인을 ‘둔기나 흉기에 의한 타살’로 결론을 내렸다.

 

▲ 개구리소년 실종 사건을 다룬 지난 2011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장면들.     © 주간현대

    

 

여러 흔적들에 비춰 유골이 발견된 지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소년들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돼 옮겨졌을 가능성이 설득력을 얻었다. 아울러, 두개골 관절부분 일부 골절현상과 3구의 두개골이 심하게 손상된 점은 흉기 등에 의해 두개골 및 치아에 강력한 충격이 가해 졌을 것으로 추정됐다.

 

다음은 2002년 아이들의 시신과 장소 등을 종합해 법의학팀이 밝힌 소년별 사인이다.

    

▲우철원 - 두개골 좌우측두부에 관동된 구멍의 모서리에는 ㄷ자 형태의 틈으로 갈라져 있으며 작은 구멍은


끝이 아주 날카로운 물체가 머리 위에서 아래로 충격을 가해 발생한 흔적이다. 두개골의 25개의 손상이 경사지게 나타났고 좌측 두정부 함몰골절 역시 ㄷ자 형태의 손상과 구멍의 가장자리가 예리한 것도 충격을 준 물체의 가장자리가 예리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김종식 - 앞머리에 관통된 손상이 있고 부식과 함께 이끼가 끼었지만 사후에 농기구나 돌 등에 의해 손상될 수는 없다. 손상도 우철원군과 마찬가지로 날카로운 둔기에 의한 손상이며 두개골 우측 측두부의 10㎝가량 선상골절과 뒷머리의 작은 손상도 사망 전 충격에 의한 것이다.

    

▲김영규 - 우측 측두부에 주먹 또는 둔기로 가격했을 경우 나타나는 함몰이 발견됐다. 정밀검사한 의류품 중 옷깃과 매듭, 단추부분이 찢어져 있으며 이는 강한 힘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찬인 - 백골화가 가장 심하게 나타났다. 이는 두개골이 지상에 노출돼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작은 손상이 있었지만 부식 또는 자연 풍화에 의해 나타날 수 있어 사인을 단정할 수는 없다.

    

▲조호연 - 소년들의 두개골 중 가장 상태가 양호, 사인 소견이 없다.

    

이 밖에도 풀리지 않는 의혹들은 존재한다.

우선 사건 당시 광범위한 인원이 동원되었음에도 10년이 지난 후에야 시신이 발견됐다. 와룡산은 앞서 말했듯이 300m도 안되는 작은 야산에 불과한데도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

    

앞서 법의학자들은 아이들이 살해되고 시차를 두지 않고 매장된 것으로 추정했는데 시신이 발견된 장소는 수풀이 우거진 장소였고 비가 오면 실개천이 만들어지는 장소였기에 당시에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수만명을 동원해 와룡산 인근을 찾았기에 이는 여전히 의문점이다.

    

둘째, 아이들이 마을과 매우 멀리 떨어진 산 반대편에 묻혀있었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도롱뇽 알을 잡으러 가봤자 산 앞쪽 중턱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반대쪽 산 중턱에서 시신이 발견됐다. 때문에 범인이 아이들을 유도했거나 강제로 끌고 갔을 확률 등 여러 가능성이 제기 됐다.

    

셋째, 한 두명이 아닌 5명의 아이들이 피해를 당했다는 점이다. 아무리 성인이라 하더라도 혼자 5명의 아이들을 온전히 잡아둘 수 없을 거라는 추정이다. 3명을 자신의 수중에 넣더라도 1~2명은 달아날 공산도 있다. 그런데 5명이 아이들이 전부 희생된 것이다.

    

넷째, 범인은 주위 지리를 잘 알며, 사용된 흉기(용접용 망치)를 볼때 주위의 노동자 출신이다. 주위 지리를 알지 못하면 산에서 또한 헤맸을 것이며, 적절한 매장자리도 정하지 못했을 것인데 그런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너무 지나버렸고, 경찰은 그 이상의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이 사건은 용의자 조차 추려내지 못하고, 사건 발생 15년이 지난 2006년 3월 26일 공소시효가 만료되며 영구 미제 사건이 돼 버렸다.

범인이 누구인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추가 범죄를 저질렀는지 등 모든 게 미궁 속에 남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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