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독재자 박정희’ 향한 민주투쟁 역사

박정희와 대립…결기 느껴진 ‘거산’의 민주화 열망…“큰 길에는 막힘이 없다”

김범준 기자 | 기사입력 2016/11/22 [14:54]

박정희와 대립…결기 느껴진 ‘거산’의 민주화 열망…“큰 길에는 막힘이 없다”

 

혹자는 이번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촉발된 '박근혜 게이트'로 인해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죽었다'고 말한다. 박근혜 대통령과 측근 몇몇이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국정시스템을 완전히 붕괴시켜놓은 현 상황은 지난 반세기 넘는 세월동안 민주주의를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모든 국민들에게 좌절감과 상실감을 주는 사건이었다. 특히, 이같은 민주화 투쟁에 최전선에 서 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1주기가 된 오늘, 현재 엉망이된 민주주의 시스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김영상은 현재의 박근혜 대통령을 만든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정면으로 싸워왔던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YS는 군부세력들과 ‘3당 합당’을 감행하며 민주화 세력의 큰 실망과 배신감을 가져다줬고, 당선 후에도 경제위기의 원흉으로 찍혀 크게 비판받았다. 그럼에도 평생을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과거 업적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김영삼의 역사’가 ‘민주주의 투쟁의 역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김범준 기자>

 


  

이승만 ‘사사오입 개헌’ 때부터 본격적인 민주투쟁 시작 

박정희 독재 몰아낸 ‘YH 사건’과 ‘부마민주항쟁’의 중심 

무기한 단식 투쟁으로 전두환 신군부 세력 양보 받아내 

민주 투사 이미지 먹칠한 ‘3당 합당’…군부 세력과 결탁 

 

 

[주간현대=김범준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1927년 12월20일 경상남도 거제시에서 부친 김홍조(2008년 별세)씨와 모친 박부연(1960년 별세)씨 사이에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에는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덕분에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자랐다. 

 

▲ 지난 1975년 05월21일 박정희 대통령(오른쪽)을 접견하러 청와대를 방문한 김영삼 신민당 총재(왼쪽).     © 대한민국 정부

     

민주화 투쟁의 서막 

 

서울대 철학과에 청강생으로 들어갔던 YS는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에 2등을 차지하기도 했는데, 그의 웅변실력에 감탄한 장택상과 가까워 지게 된다. 후에 장택상의 선거운동에 도움을 주면서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그러던 YS는 6.25 전쟁이 터지자 학도의용군에 입대했다. 당시 YS는 웅변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정훈병으로 배치됐다. 

 

전쟁이 끝난 후, YS는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장택상의 비서가 된다. 장택상은 국무총리가 되고, 김영삼은 인사담당 비서관이 된다. 1953년 9월 장택상이 총리직을 사퇴하고 YS는 자신의 고향인 거제에서 3대 총선에 출마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하지만 이 당시 부친은 정치의 꿈을 꾸려는 YS에 대해 “나라를 흔드는 사람들을 무슨 재주로 당하겠느냐”고 만류했지만 출마결심을 굳혔다. 이후 김영삼은 당시 자유당 총무부장이던 이기붕씨의 입당교섭에 따라 자유당 공천을 받아 거제군 국회의원에 만 25세 최연소기록으로 당선됐다. 이 때 YS가 세운 최연소 당선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자유당 소속이었지만 이승만의 3선 제한철폐에 반대해,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되자, 김영삼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민관식 등 동지 10명과 자유당을 탈당한다. 자유당을 탈당한후 민주당에 입당한다.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부산 서구 갑에 출마하지만, 낙선하였다. 그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민주당 구파인 조병옥을 지원하였다.

  

4.19 혁명 이후 다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과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재기한다. 1960년 8월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이 당선됨으로써 다시 여당생활을 하게 되지만, 민주당 구파 일부가 탈당해 신민당을 만들 때 김영삼도 신민당에 입당한다. 

 

하지만 얼마안가 1960년 9월25일 무장공비의 총격에 어머니를 잃는 개인적 아픔을 겪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YS 본인으로선 정말 슬픈 사건이겠지만, 북한과의 연관성은 완전히 끊어지며 여타 야당 인사들과는 달리 빨갱이라고 매도당하는 일은 없어졌다. 평생 보수세력에 ‘빨갱이’라고 시달렸던 야권의 또 다른 양대 산맥인 김대중 전 대통령(DJ)과는 달랐던 것이다.

 

이후 박정희가 일으킨 1961년 5·16 군사정변이 터졌고, YS는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군정에서는 계속 김영삼을 회유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군정 연장이 발표되자 YS는 적극적으로 반대 투쟁을 시작했고, 시위에 참여하다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출소 후 1963년 민주당 구파 출신들이 민정당을 창당할 때 참여하였다. 이후 민정당, 민중당, 신민당에 속하였다.

 

신민당의 원내총무와 대변인을 맡아 활동한 YS는 박정희의 장기집권하기 위해 헌법을 바꾸려는 3선 개헌을 반대했고, 정권에 눈엣가시가 된다. 그러던 중 1969년 6월20일 YS는 국회 연설에서 “우리 사회의 암적 존재요, 잡으라는 공산당은 안 잡고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정보부가 개헌 음모에 가장 깊이 관련하고 있다”라며 “김형욱 정보부장에게 충고한다. 민족의 영원한 반역자가 되지 않기 위해 무리한 짓 하지 말라. 총리는 정보부장 파면을 건의할 생각 없는가?”는 발언을 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김영삼이 저녁식사 후 자신의 승용차로 상도동의 집으로 귀가하고 있었는데 검은색 작업복을 입은 두 명의 청년이 골목길을 가로막고 서로 싸우는 시늉을 하며 김영삼의 차량을 막아선 사이 다른 1명이 차문을 열려 하였으나 다행히 문은 잠겨 있었다. 위협을 느낀 김영삼이 운전기사에게 차를 출발시키게 하여 경적을 크게 울리며 전진하자 괴청년 중 한명이 무언가가 담긴 유리병을 던져 차량 후미의 유리창에 맞고 박살이 났다. 병 깨지는 소리가 워낙 커서 김영삼은 처음엔 수류탄을 던진 것으로 오인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와 차에서 내려보니 심한 악취와 함께 차량 도색이 우글우글하게 녹아내려 있었다고 한다. 또한 범행 현장을 조사하여 보니 아스팔트 일부도 녹아내려 있었다고 한다. 경찰의 감식 결과 질산으로 판명 되었는데, 김영삼은 연이어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강한 어조로 비난하고 있었던 터라 박정희 정권의 테러로 추측되었지만 결국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이런 테러를 당하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마련인데 김영삼은 바로 그 다음날 국회에서 “이 독재국가를 끌고가는 원부가 바로 중앙정보부요. 그 책임자 김형욱은 민족반역자다. 이건 날 죽이려는 정부의 음모다”고 더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김영삼과 야권의 노력에도 결국 3선 개헌은 통과되었고 이 사건 이후 야당에 대한 테러가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유신 독재와 싸움 

 

이후 1971년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 든다. 하지만 같은 40대 라이벌인 DJ에게 표가 옮겨가면서 결국 패배한다. 하지만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지원하면서 본인의 1975년 대선도 함께 준비하려 했으나 1972년 10월 유신을 맞게 된다.

 

유신이 선포되자 함께 해외에 있다가 살해위험으로 인해 망명을 선택한 DJ와 달리 YS는 귀국했고, 정치활동에 큰 제한을 받게 됐다. 이후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자, 그 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한국에는 통치가 있을 뿐이고 정치가 없다. 정치가 없는 곳에 민주주의는 없다”고 박정희 유신정부를 강력히 규탄했다. 

 

1974년 전당대회에서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었고, 선명야당을 주장하면서 박정희 정권을 강력히 규탄하고 비판하였다. 이후 1976년 박정희와 회담 후 온건투쟁으로 선회했다가 긴급조치로 구속되면서 배신당한 YS는 유신정권에 대한 배신감으로 더 강력한 선명야당, 박 정권 타도, 민주회복 등을 내세웠다. 

 

그러던 중 1979년 8월9일 회사 정상화와 노동자 생존권 보장을 목표로 시위 중이던 YH 무역 노동자들은 신민당에 호소하기로 결정했다. 신민당은 이를 받아들여 신민당사를 농성장소로 빌려주었지만 경찰들은 치안을 이유로 불법적으로 노동자들을 폭행하며 강제연행했고, 김영삼은 자택까지 끌려나간다. 이 와중에 여성 노동자 김경숙 씨가 사망하고 신민당 정치인 수십명이 중경상을 입는다.

 

이 때 김영삼을 비롯한 신민당 인사들이 보여준 모습은 그야말로 선명야당성을 보여주었다. 김영삼은 200여명의 여공들이 모여있던 강당을 찾아가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신민당사를 찾아준 것은 눈물 겹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피와 땀과 눈물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 경제는 없었을 것입니다. 신민당은 억울하고 약한 사람의 편에 서서 끝까지 투쟁할 것입니다”는 말을 남겼다. 이같은 YS의 결기를 받아들인 당직자들도 당사 주변을 배회하던 사복 형사들을 보는 족족 화를 내며 쫓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같은 노력에도 박정희 정권이 관계부처회의를 열어 강제해산을 결정하자 소식을 들은 여공들이 불안해하자 YS는 “내 이름 석 자와 신민당의 명예를 걸고 조속히 여러분들의 정당한 요구를 관철시키겠습니다. 경찰이 신민당사에는 절대 쳐들어오지 못합니다. 나와 신민당원들이 여러분들을 지키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라고 이야기했다. 

 

특히 진압 직전 YS의 모습은 한국 정치사에서 숱하게 회자된다. 이순구 서울시경국장이 전화를 걸어 김영삼 총재를 바꾸라고 고압적으로 말하자 YS는 건방지다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또한 진압 작전이 시작되자 신민당사 밖에 2000명의 경찰이 몰려온 상태였음에도 이를 지휘하던 마포경찰서장에게 다가가 “네놈이 저 여공들을 모두 죽이려 하냐!”라는 말과 함께 뺨을 때리기도 했다.

 

결국 1978년부터 DJ를 가택연금 했던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을 계기로 김영삼 마저 ‘처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같은 움직임에도 YS는 9월 뉴욕타임스지와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 박대통령을 제어해줄 것” 즉, 박정희의 하야를 요구하는 듯한 내용의 발언을 했다. 더 이상 YS를 가만히 둘 수 없었던 공화당과 유신정우회가 지배하고 있던 국회는 10월4일 ‘국회의원으로서 본분을 일탈하여 반국가적인 언동을 함으로써 국회의 위신과 국회의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며 YS의 국회의원직을 제명했다. 

 

김영삼 총재 제명에 대한 반발로 10월13일 신민당 국회의원 66명 전원과 민주통일당 국회의원 3명은 항의의 표시로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그러자 10월15일 부산대에서 민주선언문을 발표하면서 10월16일부터 대학생들이 벌인 시위는 다음날인 17일 부산시민 전체로 번졌고 18일엔 마산으로 19일엔 창원으로 번져나갔고 이로 인해 YS의 고향에서 10월16일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에서는 이를 달랠 생각은 하지 않고 강경책으로 나가서 아예 YS을 체포하고 YS 직계 세력을 싹쓸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10월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를 저격하는 10.26 사건이 일어나 이는 실행되지 않았다. 

 

▲ 김영삼 전 대통령의 5공화국까지의 정치 인생은 민주주의 투쟁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사진은 박정의 정권의 몰락을 불러온 YH 여공사건 당시 경찰에 끌려나오는 YS 모습.     © 보도사진연감

 

신군부와의 투쟁 

 

박정희 사망 이후 민주화가 되나 했지만 1979년 12월12일,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으로 인해 군부가 또다시 정권 장악의 야욕을 드러냈다. 이와 반대로 정치권과 국민들은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이 시기를 타서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야당인 신민당이 직선제 개헌에 합의하고 정치적 활동이 보장했다. 

 

하지만 1980년 5월17일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로 인해 정치활동이 일체 금지되고 곧 김영삼의 가택 연금이 떨어졌다. 이는 당시 이뤄진 김대중의 사형 선고, 김종필의 보안사령부 감금과 함께 명백한 정치탄압이었다. YS는 80년 가을 신군부의 강요에 의하여 정계은퇴를 선언하였고 5공 시기, 정치활동을 사실상 전면 금지당했다. 그래도 민주화를 포기 할 수 없었던 YS가 만든 조직이 그 유명한 ‘민주산악회’다. 

 

이후 다양한 활동을 하던 YS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이던 1983년 5월18일부터 민주화 요구 5개안과 야당인사 석방 등을 주장하며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당시 YS는 광주 민주화 운동 3주년을 기념하고자 희생자들을 위령하고 독재에 항거하는 뜻에서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YS는 구속인사의 전원 석방과 해금, 해직 교수 및 근로자와 제적 학생의 복직, 복교, 복권, 언론자유, 개헌 및 국보위 제정 법률의 개폐 등을 요구하며 단식을 계속했다. 전두환 정부는 5월25일 YS를 서울대학교병원 특실에 입원시켰고, 링거 치료를 받게하였으나 6월9일까지 단식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은 신군부 정권의 어용정당 민주정의당 권익현 사무총장까지 병실에 방문했다.

 

당시 신군부 정권은 김영삼을 가택 연금하여 사실상 구금시킨 상태였으며 언론도 철통같이 통제하였다. 제5공화국 당시는 소위 ‘땡전뉴스’로 대표되는 보도지침에 의거해서 독재정권에 불리한 기사는 일체 못 나가게 하던 시절이다. 하지만 재치 있는 일부 기자들이 신문 구석 가십란에 ‘모 재야인사의 식사문제가 화제다’식으로 모호한 몇 개의 문장을 집어넣었고, 행간을 읽는데 도통한 독자들은 ‘누군가 단식하고 있구나’하고 알아차렸다고 한다. 이렇게 이 일이 외부로 새나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결국 백기를 들고 억압을 풀게 된다. 

 

23일간 이어진 YS의 단식을 ‘김영삼 단식 농성 사건’이라고 한다.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 전두환 정권의 어떠한 회유도 뿌리치며 결국 일부 억압적 조치의 완화를 받아내기에 이르는 등 민주화에 큰 업적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민주화 얻었지만… 

 

단식 1년 후인 1984년 5월 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시켰으며 연말에 창당한 신한민주당이 이듬해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1야당으로 도약한다. 이후 이민우 구상에 반발하여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여 이제 직선제 개헌만 이루어내면 이 땅에도 민주주의를 다시 꽃피울 수 있는 희망을 만들어냈고, 실제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까지도 얻어냈다. 하지만 제13대 대통령 선거의 참패에 이어 이듬해 치러진 총선에서 DJ의 평화민주당에 패해 제2야당이 되면서, 결국 한국 민주역사의 또 다른 흑역사로 치부되는 ‘3당 합당’의 주역이 된다. 

     

kimstory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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