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승리의 기억’ 뭉갠 전두환 군사반란, ‘12·12 쿠데타’

박정희 심복 하나회의 국가 반역…“권력 놓을 수 없다”

김범준 기자 | 기사입력 2016/12/12 [11:02]

우리나라에는 세 명의 독재자가 있었고, 이들은 모두 불명예스럽게 자리에서 내려왔다. 이승만과 전두환은 ‘4.19 혁명’과 ‘6월 항쟁’이라는 민중혁명으로 내려왔고, 박정희는 최측근의 암살로 생을 마감하며 임기를 끝마쳤다. 하지만 이들이 권좌에서 내려온 후, 우리나라는 사실상의 민주주의를 이어가지 못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이승만 이후에는 박정희의 군사 반란으로, 박정희 뒤에는 전두환의 군사 반란으로, 그리고 전두환 다음에는 같은 쿠데타의 주역인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등 ‘미완의 혁명’으로 마무리 된 것이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도 사실상의 ‘민중 혁명’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권좌에서 내려오는 것이 기정사실화 됐다. 하지만 ‘대통령 박근혜’를 만든 세력은 여전히 ‘개헌’ 등의 반전을 노리며 권력을 유지하려 하는 중이다. 이에 본지에서는 12월12일을 맞아 ‘독재자 박정희’에 부역했던 군부의 ‘국가 반란’ 사태인 12·12 군사반란을 심층분석 해 보기로 했다. <김범준 기자>
 


  

육군본부의 ‘전두환 밀어내기’로 쿠데타 움직임 시작
‘내란방조죄’로 정승화 총장 불법체포하며 반란 개시
앞으론 진압군 측과 신사협정 뒤로는 기습공격 감행
버티던 최규하 끝내 체포동의안 서명하며 반란 성공

 

[주간현대=김범준 기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된 1979년 10월26일 이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또한 대통령 사망으로 인한 계엄 선포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되어 대통령 대행과 함께 정국을 이끄는 상황이었다.

 

동시에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이 박 전 대통령 시해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어 10·26 사건의 수사를 총괄하게 되면서 군부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된다. 때문에 계엄사령관 정승화 입장에서 전두환은 곧 숙청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 ‘하나회’ 세력. 가운데 전두환이 거만하게 앉아있다.     © 주간현대

 

군부 내 알력싸움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이후 당시 전두환 소장을 위시한 군내 비밀 사조직 ‘하나회’는 그의 동기생들인 육군사관학교 11기 출신들을 주력으로 서로 상부상조하여 이미 군부 내의 요직을 하나 둘 차지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는 기존에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고 있던 기존 군부세력을 위협할만한 수준으로 군 내부에서도 이들에 대한 권력 집중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또한, 기존에 정보활동을 하던 대통령 경호실의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의 김재규가 동시에 무력화가 되면서 사실상 제대로 된 기능을 하는 정보기관이 국군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결국 정보력이 보안사로 집중된 것도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세력이 강화된 주 원인으로 작용하게 됐다.

 

더욱이 전두환은 당시 10.26 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이었으므로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합법적으로 자연스럽게 중앙정보부와 검찰, 경찰 등 주요 정보·수사 기관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부장 서리까지 겸임하며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력한 파워를 손에 쥔다.


이렇게 자신으로 집중된 정보력을 이용해 전두환은 정치인들의 각종 비리를 캐내어 이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10·26 사건의 수사 내용을 임의로 편집하여 보고하는 등, 정국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유도하기도 했다. 즉,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망각한 채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정치에 관여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던 것이다.


이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전두환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보직이동을 시키는 등, 하나회의 주요 핵심 인사들부터 조용히 밀어내기로 한다. 그리고 강직하고 청렴한 장태완 소장을 수도경비사령부(현 수도방위사령부) 신임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등, 하나회 측의 불온한 움직임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조치들도 서두른다.


물론, 정승화 총장이 ‘순수한 군인’이었느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었다는 평가다. 정 총장은 마치 자신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서 전두환 일당에게 당한 것처럼 이야기 했지만, 자신도 정치적인 중립을 어기면서 “김대중씨가 선거로 대통령이 되더라도 군에서 비토 할 것”이라는 말도 했다. 이는 “김대중이 대통령 되면 군에서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전두환처럼 노골적인 정치적 개입은 하지 않았지만 정 총장도 정치적 중립을 어긴 것은 마찬가지였다.


정승화 총장의 은밀한 ‘전두환 밀어내기’ 움직임은 보안사의 정보력과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군부에 거대한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던 하나회 측에 감지 당했다. 당시 요직은 모두 하나회가 장악한 상황이었고 더욱이 당시에는 누가 하나회인지 정확히 알 수도 없었기 때문에 정 총장의 움직임은 이런 사조직의 인맥을 통해 속속 전두환 측에 전해졌던 것이다.


절대로 그냥 당할 생각은 없었던 전두환은 정 총장보다 한발 빨리 움직여 그를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전두환은 10·26 사건 당시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와 한패였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체포할 구실을 만들었다.


그러나 본 사건에 앞서 전두환 본인이 직접 발표한 수사결과를 살펴보면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와 한편이 아니었다. 심지어 정 총장이 초기에 김재규를 신속하게 체포할 것을 명령하여 김재규의 중앙정보부에게 농락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때문에 전두환은 정 총장과 김재규가 사전에 공모하였다는 것이 추가 조사결과 드러났다고 우기며 그를 억지로 체포하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민주화 이후 12·12 쿠데타에 대한 재심이 이루어졌을 때 결국 정 총장은 내란방조죄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처럼 정승화 총장을 체포할 구실을 만든 전두환은 하나회 조직원들과 함께 모여서 12월12일에 작전을 실행하기로 결의한다. 전두환 본인은 군사반란 혐의로 재판받을 당시 숫자 짝을 좋아해서 이날에 결행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동안 장성 진급심사가 끝나 하나회 요인들의 일정에 여유가 생기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이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로 인한 개각 등 정부의 대규모 인사변동이 일어나기 전에 일을 해치우기위한 의도도 있었다. 12월6일 유신헌법 하에 대통령 간접선거에서 당시 최규하 국무총리가 단독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 때문에 대규모 개각이 예정됐었기 때문이다.


결국 12월12일 오후, 전두환은 계획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심한 하나회 소속의 주요 지휘관들은 각자 준비를 마친 후 경복궁 옆에 위치한 수경사 30경비단(경비단장 장세동 대령, 하나회 소속)에 집합하였다. 수경사 30경비단은 과거 일제 헌병대가 주둔하던 곳이다. 당시 30경비단·33경비단은 서울 방위의 정예부대로 수경사 소속이긴 했지만 수경사령관의 무장 출입도 불가할 정도로 독립적인 부대였기 때문에 이들이 몰래 모이기엔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작전명 ‘생일집 잔치’로 불린 쿠데타의 본래 계획은 총장 공관에서 보안사 대원들과 헌병대원 들을 동원하여 정승화 총장을 납치하는 동시에 전두환은 대통령에게 가서 그의 추가혐의를 조사하기 위한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이를 합법화하는 것이었다. 법적 처벌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대통령 재가를 먼저 받지 않은 이유는 정승화 체포 의도가 본인에게 알려질 경우, 반격 당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었다.


일단, 하나회는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허삼수와 육본 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대령은 사건수사 진술을 받겠다는 이유로 미리 약속을 잡고 정승화 총장 관저를 방문했다. 이때 허삼수 인사처장이 수사 때문에 방문한다고 하면 의심받을 것이기에 정보처장을 사칭했다. 그래서 사태 초기엔 정보처장 이던 권정달이 진압군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미리 약속을 잡은 이유로는 정승화 총장을 놓치지 않고 한 번에 사로잡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작전지역을 자신이 미리 유리한 곳으로 선점하는 효과도 있었다. 이후 계획대로 기습적으로 정 총장을 체포, 신병을 확보하여 서빙고로 끌고 오는데 성공했다.

 

▲ 지난 2005년 MBC 드라마 ‘5공화국’에서 전두환이 어린 박근혜에게 6억원을 건내는 장면 <MBC 영상 캡쳐>

 

‘전두환 반란군’


이때 반란군 입장에서는 큰 변수가 발생했다. 정승화 총장 체포와 동시에 수사에 대한 대통령 재가를 받으려던 반란군의 계획이 실패한 것이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의 단순 진술로는 절대 정 총장의 체포에 동의할 수 없으며, 합동수사본부의 상급자에 해당하는 노재현 국방장관과 상의를 한 후 재가하겠다고 버텼다.


당시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전두환 측에선 국방장관을 사전에 확보해놓지 않았었고, 국방장관은 공관에서 총소리가 나자 가족들과 도망 가버려서 찾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정승화 체포가 법적으로 위법한 행동이 되어버렸다.

 

당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사령부 산하에 있었으므로 정 총장은 전두환의 직속상관이 되기 때문에 지휘체계상 전두환이 함부로 체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계엄사령관보다 위에 있는 것은, 국방장관과 대통령 밖에 없었으므로 이들의 허가를 받아야만 정승화 체포가 합법이 되는 것이다.


일단 전두환은 헌병대 병력을 제압하고 버스에 정 총장을 연금했다. 전두환은 혹시 저항할지도 모르는 ‘친 정승화 계열’의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그리고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을 연희동의 연회장으로 미리 초대하여 유인해 두는 치밀함을 보였다.이들은 ‘갑자기 대통령을 만나게 되어 늦게 되었다’는 전두환을 기다리며 저녁 7시 까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 대신 이들을 접대한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준장은 하나회 출신이 아니어서 완전한 정보 통제가 되지 않았고, 결국 총리 공관에서 총성이 들렸다는 보고를 받고 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복귀했다. 이 때 장태완은 수경사로, 정병주는 특전사로, 김진기는 육군본부로 간다.


육군본부 측은 정승화 총장의 부인이 건 전화에 의해 처음으로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정 총장을 납치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어서 처음에는 북한의 기습이 아닌가 할 정도로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곧 납치세력이 합동 수사본부 소속임이 확인되고 여타 정황들이 종합되면서 전두환 측이 벌인 일임을 확인한 후 전군에 비상을 걸고 대응에 들어갔다.


한편, 수경사령부로 복귀한 장태완 소장은 참모장 김기택 준장으로부터 30경비단에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일당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경비단장 장세동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대신 전화를 받은 선배인 유학성·황영시 중장이 “알 만한 친구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가? 이쪽(30경비단)으로 와서 우리랑 얘기해 보면 총장 체포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고 설득하려고 했지만 장 소장은 펄펄 뛰면서 “야! 이 반란군 놈들아! 니들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가 전차를 몰고 가서 네놈들을 전부 다 날려 버리겠다!”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에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일당들은 장 소장이 공격해 올 것을 걱정하며 대비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두환은 하나회를 통해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청와대 경호실 병력으로 최규하 대통령이 있던 국무총리 공관을 확보하였다. 이미 12월 초에 대선은 끝나 최규하가 대통령이긴 했지만, 정식 취임은 하지 않아 아직 국무총리인 셈이었던 것이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을 총리공관에 구금하다시피 조치한 전두환은 정 총장 체포에 대해 사후 재가를 계속 협박했지만 최 대통령은 여전히 노재현 국방장관의 동의 없이는 체포를 허가할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숨어버린 국방장관을 찾기 위해 하나회는 총력을 기울였고 육본 측에선 그들이 장관을 찾아서 재가를 받기 전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회는 이미 정보력에선 육본을 앞서고 있었고 조직도 넓게 분포해 있었다. 원래 보안사 자체가 군을 위한 정보기관이다. 그런데 이들이 배신했으니 육본이 정보를 얻을 곳이 없어진 셈이다. 일단 전두환 측은 육군본부에 화해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결국 육군본부 수뇌부는 쌍방간에 상호 병력을 동원하지 말자는 전두환의 ‘신사협정’에 응한다. 이는 서울에서 아군끼리 유혈사태를 벌이면 안보에 큰 위험을 끼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때 장태완 소장은 이에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측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수도권의 충정부대를 대상으로 병력출동을 독촉하고 있었다.


전두환 측은 장태완 소장의 병력동원 시도에 자극받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정승화 총장의 연행을 기정사실화하고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전략을 취하였다. 즉, 겉으로는 신사협정을 맺어서 육군본부의 병력출동을 가능한 오래 저지하면서, 한편으로 자기 측 병력을 본격적으로 동원하여 수뇌부를 무너뜨리겠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작전에 앞서 전두환은 1, 3, 5 공수여단장들에게 잇달아 지시를 내렸었다. 또한 전두환 측은 공수여단 외에도 노태우 사단장이 이끄는 최전방 9사단 29연대와 30연대 소속 1개 대대 30사단의 90연대, 제2기갑여단의 1개 전차대대도 중앙청으로 출동하라고 지시했다.


만약 이 때 북한이 냄새를 맡고 휴전선 지역을 공격하는 등의 국지 도발을 일으키거나 최악의 경우인 전면 남침을 감행했다면 한반도는 엄청난 대혼란이 일어났을 것은 불 보듯이 뻔한 위험한 행동을 전두환이 지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 때 9공수여단이 정병주 사령관의 지시로 육군본부를 향해 출동했다는 급보가 합수부측에 날아들었다. 전두환 측 장성들은 대경실성 했다. 9공수여단의 주둔지는 1, 3, 5여단보다 서울 중심가에서 가까웠다. 애초에 전두환 측이 이러한 부대를 포섭해놓지 않은 이유는, 9공수여단의 여단장 윤흥기 준장과 참모장 신수령 대령이 모두 갑종간부후보생 출신이었기 때문에 동원할 수 있는 연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전두환 측의 공수여단 병력들은 이들을 지휘할 여단장이 아직 부대에 도착하지 않았거나, 행주대교 등의 검문소를 통과하는데 잠시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9공수가 훨씬 먼저 서울에 도착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9공수의 1차 공격목표는 다름 아닌 자신들이 모여 있는 보안사령부와 경복궁 30경비단일 것은 더더욱 뻔한 일이다. 이 때 노태우는 자결을 결심했었다고 회고했다.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로 떨어진 보안사령관실에 모여 있던 전두환 측 장성들은 제각기 전화통을 붙잡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9공수 출동을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육본 측에 전화를 건 유학성·황영시 중장은 “왜 신사협정을 맺었는데 깨는 거요? 당장 9공수를 원대복귀 시키시오” 그리고 육군본부 수뇌부들은 전두환이 정말로 신사협정을 지킬 것이라고 믿고 병력을 철수 시켰다.

 

그리고 그렇게 병력동원을 주저하던 우유부단함의 대가는 확실하게 치르게 된다.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1공수여단 측 병력들에 의해 순식간에 점령당한 것이다.


하나회는 반란 초기에 경호실 병력을 동원해 최규하를 구금하다시피 했고, 참모총장인 정승화는 반란군의 손아귀에 있었으니 당시 상황에서 정상적인 명령 체계를 동원해 반란 진압을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노재현 국방장관 뿐이었다. 그 때문에 반란군도 반란을 진압하려던 장군들도 노 장관의 행방을 찾고자 했고, 최대한 자의적으로 병력을 움직이려 한 장태완 소장을 육본 측에서 말릴 때도 이유가 “국방부 장관이 있어야 된다”였다.

 

▲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 모두 12.12 군사반란과 각종 민중 학살 및 부정 축재 등의 혐의로 민주화 정권이 수립된 이후 재판을 받았다. <e영상역사관>

 

성공한 군사반란


결국 노재현 장관이 자신의 몸만을 지키기 위해 도망쳐 다닌 끝에, 정상적인 명령체계를 지키려던 이들이 정상적인 명령체계를 무시한 반란군의 행동에 끌려 다니다 제압당하는 상황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붙잡힌 노재현 장관은 눈치껏 ‘정승화 체포 동의안’에 서명했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옳지는 않지만 사태가 더 악화되고 군이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서명을 할 것을 부탁했다.

 

결국, 최 대통령은 정승화 체포 동의안에 서명했다. 다만, 이 때 동의안 표지에 재가 날짜와 시간을 적었다. 이 때문에 향후 체포당사자들의 강변에도 불구 ‘선체포 후동의’라는 불법여부가 확인될 수 있었다. 이렇게 작전 10시간 만에 반란은 성공했다.


이후 전두환과 하나회 일원들은 군부 요직을 장악하면서 사실상 실권자가 되었고, 국민의 민주화 요구와 야당의 반대를 무시하고 5·17 쿠데타를 일으키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는 등의 피를 뿌리면서 결국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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