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정국을 거치면서 한국의 정치와 경제를 쥐락펴락 해온 권력과 재벌의 유착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재벌들은 한국 경제에서 90%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지만 한편으론 한국 경제를 좀먹는 주역으로도 꼽힌다. 실제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는 권력과 재벌의 추악한 행태가 드러나 한국 경제를 총체적 난국으로 떨어뜨린 장본인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래서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의 구호는 ‘박근혜 구속’을 지나 ‘재벌이 몸통’ ‘재벌도 공범’으로 옮아가고 있다. 정치권 역시 이런 민심을 반영해 재벌 개혁 해법을 찾기 위한 토론회를 잇따라 여는가 하면 관련 법안 발의도 서두르고 있다. 지난 12월1일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와 함께 주최한 ‘재벌 지배구조의 문제 진단과 개선을 위한 입법 토론회’도 이런 흐름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날 토론회의 첫 번째 발제를 진행한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홍순탁 정책위원은 옛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과정을 분석하며, “1996년 에버랜드 전환사채의 저가발행에서부터 2014년 7월 옛 제일모직과 삼성SDI 합병 및 제일모직으로 에버랜드의 회사 명칭 변경 등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에버랜드가 제일모직으로 바뀌는 과정을 살펴보면 한국의 자본시장은 누군가에게는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비판해 주목을 끌었다. 그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20년 전인 1996년 에버랜드의 전환사채가 매우 낮은 가격에 발행된다. 검찰 계산에 따르면 주당 8만5000원짜리인 전환사채를 7700원에 발행한 것. 정상적인 주주라면 이러한 기회를 놓칠 리 없지만 삼성전자·제일모직·중앙일보·옛 삼성물산 등은 이러한 기회를 모두 포기한다. 이들 기업이 포기한 전환사채는 삼성 오너가(家)의 이재용 남매에게 배정되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단숨에 에버랜드의 최대주주가 된다. 에버랜드는 레저 회사로 알려져 있지만 계열사 일감 물량을 확보하면서 건설, 급식·식자재 유통에도 진출하게 된다.
2010년 에버랜드의 자기자본이 급증한다. 2009년 2조3000억원이던 자기자본이 1년 만에 4조3000억원으로 증가한 것이다. 보유하고 있던 삼성생명 주식이 상장되었기 때문이다. 보험사의 상장차익을 보험계약자와 공유하지 않고 주주가 모두 차지하도록 한 결정의 수혜를 받아 그 상승폭이 더 컸다. 에버랜드가 보유한 삼성생명의 취득원가는 348억원인데, 옛 삼성물산과의 합병 시점에서 그 주식의 시가평가액은 3조7000억원에 달했다. 취득원가 대비 100배 이상의 잭팟이 터진 셈이다.
2011년 삼성이 바이오 산업에 진출하기로 하면서 에버랜드는 삼성전자와 함께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대주주로 투자하게 된다. 막대한 현금보유를 한 삼성전자와 투자 여력이 많지 않은 에버랜드가 동일한 비율로 투자하게 되는데, 초기 투자비율은 삼성전자 40%, 에버랜드 40%, 옛 삼성물산 10%, 외국인 투자자 10%였다. 이후 지속된 증자에 옛 삼성물산이 참여하지 않으면서 지분율이 점차 줄어들어, 합병 시점에서 제일모직은 삼성바이오로직스를 46.3% 보유하게 되지만 옛 삼성물산 지분은 4.9%까지 줄어들게 된다.
합병 시점까지 에버랜드가 삼성바이오로직스에 투자한 금액은 4800억원이며, 장부가액은 3400억원이었다. 국민연금공단은 내부적으로 합병비율을 계산할 때 이 비상장 주식을 6조6000억원으로 평가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친 옛 삼성물산과 투자여력으로 볼 때 좀더 높은 지분율 확보가 가능했던 삼성전자 주주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다.
2013년 12월 에버랜드는 제일모직의 패션사업부를 약 1조원의 가격으로 인수한다. 비상장 회사 간 거래였기 때문에 거래금액의 적정성 여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옛 삼성물산 합병과정에서 제일모직에 유리한 합병비율을 설명하려면 패션사업부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야 하는 딜레마가 생긴다. 한편 에버랜드는 2014년 1월 건물관리사업부를 에스원에 매각한다. 매각대금은 4948억원이었는데, 처분이익이 4791억원이었다.
2014년 7월 옛 제일모직은 삼성SDI에 합병되고, 에버랜드가 회사 명칭을 제일모직으로 변경한다. 합병 시점을 기준으로 이재용·이건희·이부진·이서현 등 4명은 제일모직(에버랜드)의 지분을 42.2% 보유하고 있다. 에버랜드가 제일모직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면 한국의 자본시장은 누군가에게는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삼성전자 등이 에버랜드의 저가 전환사채를 포기함에 따라 삼성전자를 비롯한 여러 계열사의 나머지 주주들이 피해를 봤다. 삼성생명의 상장차익을 주주가 독점함에 따라 수많은 보험계약자들이 정당한 몫을 빼앗겼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투자 기회, 옛 제일모직 및 에스원과의 사업부 양수도 등도 에버랜드와 거래한 상대방의 기타 주주는 손해를 봤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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