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와 소망, 이뤄내겠다’ 메가스터디 손주은 제2막

조미진 기자 | 기사입력 2017/11/16 [22:27]

수능세대에 잘 알려진 스타강사 출신의 손주은 메가스터디그룹 회장. 그를 단순히 사교육 열풍에 힘입어 기업가로서 성공한 인물로 아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과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예상과는 좀 다르다. 부잣집에서 과외를 맡기려고 성화였지만 정작 손 회장은 사회불평등을 조장한다는 자책감에 괴로워했다. 그래서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학생들도 고급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인터넷강의사업을 하게 된다. 세계최초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는 노력에 비해 너무 많은 돈을 벌었지만 사교육 사업에 일생을 들인 것에 대해 사실 후회하고 죄책감이 크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한다. 그런 부채의식을 만회하고자 사재 300억을 털어 20여년 전 세상을 떠난 딸의 이름을 따 윤민창의투자재단을 설립했다.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고 창의적인 청년들의 벤처 스타트업을 지원하기 위함이다. 이미 여러 스타트업을 돕기 위한 엔젤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아울러 창업 등 진로 교육으로 사업을 확장해 사회와 함께 윈윈하려는 새 비전을 준비 중이다.


 

 

우연히 발 딛은 과외교사직에서 사교육계 오너의 대명사로

30대 초반, 사고로 자식들 잃고 고통 잊으려 학원 강의 매진

 

쉽게 돈 벌어참회 심정으로 300억 털어 윤민창의재단 설립

사회와 윈윈’ 창업 등 다양한 진로 모색 돕는 교육사업도 준비

 

 

[주간현대=조미진 기자] 손주은 메가스터디그룹 회장은 수능세대에서 유명한, 사교육 계의 대부로 불린다. 그런 그가 지난해 10월 청년 인재 발굴을 통해 창업을 이끌고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해 사재 300억을 출자해 윤민창의투자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은 올해 4월에만 9개 청년 스타트업에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향후에도 적극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지난 6월 손 회장은 직접 해당 재단 설립 이유와 스타트업 지원 배경을 이렇게 밝혔다.

 

 

▲ 손주은 메가스터디 회장(오른쪽에서 두번째)이 지난해 5월 '서울대학교 메가스터디 팀플장학금 수여식'에서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을 축하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출처=강북메가스터디 홈페이지>   

 

 

나는 성공적이고 좋은 비즈니스를 한 것이 아니다. 청년세대들이 힘든 일을 겪는 사이에 돈을 많이 벌었을 뿐, 깨끗하게 벌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해 재단을 설립했다.”

 

630일 열린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프라이머 11기 데모데이에 키노트 연사로 나선 손주은 회장의 강연 내용을 바탕으로 그의 생각과 인생행적을 따라가 봤다.

 

손주은 회장이 직접 들려준 히스토리

 

손 회장은 나이가 들면서 인생이 점점 더 부끄러워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앞서 밝혔듯 내가 진 빚이라도 갚고 싶다는 심정으로 설립한 것이 윤민창의투자재단이다. 윤민(潤民)백성을 윤택하게 하라는 뜻이자 1990년대 초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손 회장 딸 이름이다.

 

그는 10대 후반에 가졌던 고민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나는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사회의 부조리라 불리우는 근본적인 문제를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 했고, 어릴 때 품었던 고민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어설픈 삶을 살고 있다고 자평한다.

 

손 회장은 10대 후반 방황을 많이 했다. 삼수 끝에 서울대를 들어갔다. 입학하자마자 실연의 아픔도 겪었다. 절망과 극복을 반복하다 3학년 때에는 밑바닥으로 떨어져 형편없는 삶에 빠졌고 도망치듯 군복무(방위)를 했다. 복무 중 중학교 교사였던 아내를 만났고 졸업을 두 학기 남겨놓은 상황에서 별 생각 없이 결혼했다. 이때 아내는 교사 일을 그만뒀다.

 

가정을 꾸렸으니 먹고 살아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어머니에게 결혼을 상관없이 어차피 지원할 돈이었으니 하숙비랑 학비를 대달라했다. 그리고 아내가 모아놓은 돈 400만 원이 있었다. 그걸 합쳐서 서울 신림동에 방 2개짜리 12평 다세대 주택을 얻었다. 심리적으로는 평생에서 이 집이 제일 좋은 집이었다고 한다.

 

한 두달 지내니 생활비가 모자라 그는 주변에서 하숙 하던 여동생과 재수생 남동생을 집으로 불러 들여 하숙비를 받아 그럭저럭 살았다. 그러나 이듬해 남동생이 대학에 합격하고 여동생도 나가게 되면서 경제 위기가 왔다.

 

동료·선배들이 황당해 했던 커피장사

 

고민하던 중 떠올린 것이 모교인 서울대 졸업식에서 커피를 파는 것이었다. 당시는 졸업정원 세대라 학부생 6000 , 석박사까지 만 명이 한꺼번에 대운동장에서 졸업식을 했다고 한다. 가족들까지 더해 졸업식장에 2~3만 명이 모였다. 아내에게 커피장사로 15만원 벌어오겠다 말했다. 15만원은 부모님의 지원금이 오기 전에 살아 갈 수 있는 액수였다. 그는 당시 재산의 1/3이었던 만 원으로 봉지커피와 종이컵을 샀다. 그리고 동네를 다니며 보온병 10개를 빌리고, 남동생에게 친구 한 명과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러 오라고 했다.

 

졸업식 날 아침 물을 끓여 학교를 가서야 손 회장 일행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을 깨닫는다. 학교 앞에 가스로 물을 끊이고 토스트도 파는 가판점 20~30군데다 들어서 있었던 것. 이를 보고 동생은 게임 끝났으니 접자고 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기동성이라는 자신들의 강점을 생각해낸다. 졸업식장에서 커피를 팔며 만난 대학동기, 선배, 후배들의 왜 서울대생이 커피장사를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가 생활비가 떨어져 장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황당해했다.

 

하지만 주눅 들지 않고 계속 커피를 팔아 2시간이 안 되서 완판을 했다. 15만 원의 목표 달성을 한 것이다. 그런데 동문들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연락을 이어가던 과거 하숙집 아주머니가 걱정이 돼서 연락을 취해왔다. ‘사정이 어려우면 자신에게 연락하지 그랬냐며 호통부터 치던 아주머니가 과외자리를 소개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첫 과외에서 인생을 바꿀 인물을 만난다. 손 회장은 커피 장사를 안 했다면 이 학생을 못 만났을 것이라 한다.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었는데 부모의 지위를 빼면 뛰어난 것이 보이지 않았다. 고민도 많아 보였고 반항기도 넘쳤다. 그럼에도 손 회장은 과감하게 독설을 했다. “네 인생은 공부 아니면 그 어떤 것도 구원할 수 없어. 이렇게 엉망인 상황을 이어가면 너는 너를 팔아 먹을거야. 부모가 모아놓은 재산을 싸들고 가서 남의 집에 팔려가게 되는 거지. 몸 파는 사람은 화대라도 받지만, 너는 돈을 싸들고 가야해.”

 

악담이었는데, 학생의 반응이 예상 밖으로 좋았다. 스스로도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외 중 숙제를 많이 냈고 다 못 하면 체벌을 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가능한 방식이었다. 반에서 20등 하던 학생이, 5개월 만에 전교 15등이 되었다. 나중에는 행정고시를 차석으로 합격해 고위공직자가 됐다. 이후 그에게 과외가 많이 들어왔다. 학생이 살던 잠원동 아파트 층층마다 과외를 할 정도였다. 손 회장은 이 친구 때문에 이 길로 들어섰고, 스스로 강사의 자질이 있음을 알았다고 말한다.

 

과외로 1억만 벌어서 독일유학 가자

 

과외교사로 나름 잘 나갔지만, 인생의 업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19878월 대학졸업 뒤무엇을 할까 고민했지만 답이 없었다. 결국 2년만 과외를 열심히 해서 1억 원을 모아 독일로 유학을 가자고 결심했다.

 

당시 학원 강사가 평균 100만 원, 많으면 500만 원 정도 벌던 시절이었기에 혼자서 전과목을 가르치는 것을 궁리했다. ‘공부를 못 하는 학생은 선생이 많으면 헷갈린다며 학부모들을 설득했다. 당시 일반적인 방식에서 벗어난 시도를 많이 했다고 한다. 한 사람이 전 과목을 가르치는 것부터 이례적이었고 여름에 인간의 엄청난 잠재력이 나온다고 생각해 ‘910일 지옥훈련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하기도 했다. 이는 훗날 교육 사업에서 응용하기도 했다.

 

집이 컸던 한 학생 집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합숙을 했다. 그 집 어머니에게 여행을 가라하고 다른 집 어머니가 와서 식사를 책임지게 했다. 학생들의 성적이 크게 올랐다. 결국 그는 2년간 목표를 초과해 2억원을 벌었다. 돈을 더 벌기 위해 독서실 두 개도 인수했다. 그러나 손 회장은 부친에게 아들로 인정받지 못했다. 10년간 고향을 제대로 못 갔으며 가더라도 밤 11시 이후에 가서 새벽 5시에 나와야 했다. 결국 과외 수업은 2년만 하고 말았다.

 

할 수 있는 건 학원수업 뿐. 과외를 그만둔 19903, 그는 앞으로 뭘 할지 고민했다. 답이 안 보였지만 아버지의 꿈인 판검사를 해보자 싶었다. 그래서 사법고시 관련 책을 사서 도서관에서 보는데 나와 안 맞다는 생가겡 1주일 간 공부하다 말고 두세 달 간 놀았다. 199051차 시험은 봤다. 그런데 시험 본 다음날 과외를 요청하러 학부모들이 와 있길래 과외를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그래 11월 학원을 열었다.

 

더 망할게 없다자식 잃고 강의 매진

 

사실 학원 열기 두 달 전 손주은 회장에게 인생의 크나큰 아픔이 닥쳤다. 아내와 아들, 딸이 예배를 마치고 택시를 타고 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 인생이 부조리하다 싶었고, 신에게 살려 달라 빌었다. 그러나 아들이 일주일 만에 하늘나라로 갔다. 아내와 딸은 의식불명이다가 한달 만에 깨어났다. 후유증으로 딸의 뇌에 문제가 생겼지만 그는 이마저도 다행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듬해 6, 딸 마저 숨을 거두었다.

 

손 회장은 헛웃음이 났고 인생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 했다. 오후 3시 묘지에 딸을 뭍은 그는 1시간 자고 그날 저녁 6시부터 나가서 수업을 했다. 고통을 잊기 위해 수업 외에는 답이 없었다. 이날 수업을 들은 학생들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당시 일주일에 60~72시간 의 살인적인 강의 일정을 소화 했다. 그렇게 손 회장은 본격적으로 강사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모순 만들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돈은 벌었지만 늘 가졌던 윤리적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다. 개인 윤리적으로는 목숨 걸고 학생들을 가르쳐서 성적을 올려, 물질적 대가를 얻었다. 이는 개인에게는 나름의 일 수 있지만 사회 윤리적으로는 강남 부잣집 아이들의 성적을 끄집어 올리는 역할이었다. 그 역할을 함으로써 다른 아이들이 이유 없이 떨어지는 결과를 낸 것이라고 생각 됐다. 자신의 행위가 사회의 발전이 아닌 불평등과 모순을 만든 것 같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36살이던 1996년 그는 어떻게 살 것인지 또 고민한다. 포기할 것이 많았고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학원 운영을 접기로 했다. 당시 학원 월 소득이 4~500만 원이었다. 지금이라면 2억 원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그런데 막상 학원을 닫고 보니 막막했다. 어머니는 성직자가 되길 권했지만, 그는 자신이 너무 타락했다고 생각했다. 문득 벌어놓은 돈으로 학교를 세우면 잘 할 것 같았다. 모아놓은 자금이 3~40억 정도 였고, 펀딩도 하면 학교 하나는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교육으로 더럽게 번 돈, 공교육으로 깨끗하게 쓰는 그림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교육에 대한 헌신인지, 그럴싸한 지위를 얻기 위한 얄팍한 자기 위안인지 스스로 큰 혼란을 느낀다.

 

30대 중반, 비즈니스를 시작하다

 

그러다 손 회장은 자신에게 여전히 사농공상인식이 있음을 인지한다. 성숙한 자본주의가 되려면 상농공상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 기업이 존경받고 사회 중심이 되는 사회, 기업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사람을 키우는 등 사회를 주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36살에 기업 경영을 결심한다. 분야는 자신있는 강의로 하되, 이전처럼 사회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것은 하지 않기로 했다.

 

12일 동안의 사업 구상 결과 1997년을 ‘R.O.O.T 97 신화창조의 원년으로 이름 붙였다. R.O.O.T는 운영할 기업의 운영 원리이자 가치이자 뿌리로, ‘합당한 성과와 지향성(Reasonable)을 갖고, 합리적인 조직의 운영능력(Organ)을 통해, 혁신을 지향하는 구성원의 열린 마음(Open mind)으로, 함께(Together)해서 신화창조를 하겠다는 뜻이다.

 

이 원리를 바탕으로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대중강의를 하려 했다. 때문에 노량진, 강남의 종합학원에 찾아갔으나, 처음에는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나를 선택 안 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실수라는 걸 알려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며 나왔다고 한다.

 

전 과목을 가르치고 싶었으나, 전공수업만 해야 하는 학원가 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역사밖에 없었다. 그것만으로는 바꿀 게 없었다. 결국 사회전체를 하나로 묶는 통합사회라는 패러다임을 만들어 냈다. 초기에는 폐강도 많았고, 첫 수업에 학생이 8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5000명이 듣는 수업이 됐고 손 회장의 인지도가 올라갔다. 강사료만 월 4~5억이 들어왔다.

 

그런데 1999년 그는 개인적으로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당시 대치동 학원가에 전국 곳곳에서 학부모와 학생이 입시 유학을 왔는데, 어느 날 학부모 한 명이 케익을 사들고 왔다. 학생 성적도 오르고 이사 온 대치동 아파트 집값이 3개월 만에 3억이나 올라서 감사하다는 것이다. ‘또 내가 이 사회에 나쁜 짓을 했다싶었다. 의도와 달리 대치동 사교육 현상을 만들어 사교육의 지역 불평등을 만든 장본인이 된 것이었다. 이것의 해결방안을 찾다가 시작한 것이 메가스터디였다.

 

▲ 수능시대 인터넷강의 열풍을 주도한 손주은 회장의 메가스터디  <사진출처=메가스터디>    

 

 

메가스터디의 시작그리고 또 후회

 

그해 홈쇼핑을 보다가 백화점이 사람에게 오는 시대를 체감했다. 그러면 학생이 학교를 가는 게 아니라 학교와 학원이 집으로 오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전국 누구나 들을 수 있는 학원수업을 생각해냈다. 교육의 지역 불평등이 해소 될 것으로 판단했다. 2000년 자본금 3억 원 투자해 인터넷 강의 전문 기업 메가스터디를 창업한다. 알려졌다시피 메가스터디 열풍이 불었고 나름의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그는 또 후회를 한다. 어쩌다 세계최초 온라인 강의 상용화를 이루었지만, 오프라인 강의를 온라인으로 옮겨놓았을 뿐 그 뒤에 일어날 수 있는 많은 문제를 예상하지 못 했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오프라인 시스템을 못 바꿨고, 강사들의 몸값만 올리는 치킨게임이 벌어지게 했고 그 악영향을 도로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늘 놓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름의 인문학적 소양으로 해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스타강사가 되어 많은 돈을 벌었지만, 사회적 범죄자가 된 심정으로 살았다. ‘온라인 교육을 미래지향적으로 못 바꾼 것은 늘 부끄럽다고 지금도 공공연하게 밝힌다.

 

그래서 손주은 회장은 최근 새로운 변신을 꾀한다. 바로 새로운 교육 비즈니스를 만드는 것.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었고, 우선 급한 불부터 끄자며 사회에 빚을 갚는 마음으로 윤민재단을 만든 것.

 

노량진을 바꾸겠다” 57세에 새로운 도전

 

이제 그는 기업 경영에서 좋은 인재를 잘 찾아내고 길러내는 것이 정말 중요한다고 보고 있다. 스펙이나 능력을 무시할 수 없지만, 최고의 인재는 자신을 성찰할 줄 아는 착한사람이라고 말한다. 혁신을 고민하며 미래비전을 가진 안목 있는 사람이 있다면 기업은 다시 힘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으로 노량진을 바꾸는 시도를 하고 있다. 젊은 창업자들이 스타트업 생태계를 만드는 시간 같은 연령대의 젊은이 상당수는 노량진에서 공무원을 준비 중이다. 합격률 1.8%의 시험에 엄청난 수의 청년들이 몰리고 있는 현상을 안타까워하며 대한민국이 망하는 길이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노량진이 공무원 시험을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청년들이 새로운 꿈을 꾸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는 공무원이 안 되더라도 플랜B를 꿈꾸고, 같이 고민할 수 있는 교육과 문화가 어우러진 공간사업을 비전을 추진 중이다. 이것이 손주은 회장의 마지막 바람이다.

  

penf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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