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0년…“기억하지 못하는 아픔은 반복된다”

제주 4·3은 70년 째 현재진행 중

문혜현 기자 | 기사입력 2018/04/03 [09:09]

제주4·3 70년…“기억하지 못하는 아픔은 반복된다”

제주 4·3은 70년 째 현재진행 중

문혜현 기자 | 입력 : 2018/04/03 [09:09]

‘탐라국’이라는 자치국으로 탄생해 고려시대 본격적으로 한반도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온 제주도는 역사적·자연적으로 그 의미가 크다. 국내 유일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인 제주는 고려시대 삼별초의 마지막 대몽항쟁 전장이었고 한국 최대 규모의 어민투쟁이었던 해녀항일운동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제주는 약 7년간 공권력의 탄압으로 제주 인구의 10%, 3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제주 4·3 사건의 아픈 현장이다. <편집자주>


 

▲ 제주 4·3사건은 오늘로 70주년을 맞았다. 국가권력 앞에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된 이 사건은 오늘날에도 의미가 크다.     © 제주 4·3공원 홈페이지 갈무리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는 제주 4·3에 대해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밝히고 있다. 

 

인천 상륙 20일 만에 제주도에 도착한 미군부대는 당시 제주도민의 강한 지지를 받고 있었던 인민위원회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던 미군의 관계는 3·1절 제주도 기념대회를 기점으로 반전했다. 3만 여명의 제주도민이 3·1절을 기념한 평화시위 자리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의 주민이 희생됐다. 

 

이후 군정 당국과 경찰의 적절한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분노한 도민들은 민관 총파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때부터 미군은 제주도를 ‘좌익의 근거지’로 간주했다. 극우파 인물로 알려진 유해진이 제주도지사로 오면서부터는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 그는 극단적인 우익 강화 및 좌익 탄압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8년 1월 남한 단독선거안이 명백해졌고,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2월 7일 전국적인 총파업을 단행했다. 제주도 미군정은 이 사건을 구실로 제주도민에 대해 대대적인 연행과 취조를 실시했고, 한 달 새 학생과 청년이 총살당하는 등 3건의 사망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제주4·3 사건의 도화선이 됐다.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350명의 무장대는 경찰서와 서북청년회 숙소 등 우익단체 인사들의 집을 습격했다. 이날 하루 동안에만 3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건 이후 5월 10일 단독정부를 위한 총선거가 실시됐고, 이승만 대통령이 당선돼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11월 17일엔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진압작전이 전개됐다. 

 

이 당시 미군 정보보고서는 “미군 9연대는 중산간 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고 기록했다. 

 

‘제주 4·3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미국의 원조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군에 지시했고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는 이른바 ‘초토화 작전’이 자행됐다. 

 

1949년 4월 1일 미군 정보보고서는 “1948년 한 해 동안 1만 5천 여 명의 주민이 희생됐다. 그 중 80%가 토벌군에 의해 사살됐다”고 기록했다. 1948년 8월부터 1949년 봄까지 겨우 몇 달 사이에 군·경 토벌대의 진압작전과 무장대의 보복살상으로 수만 명이 희생됐고 130여 마을이 소개령(다른 마을로 강제 이주) 지시 후 방화로 초토화됐다. 

 

이날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됐지만 생존자들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1970년대~80년대엔 4·3 사건을 폭로한 작가와 시인들이 공안당국의 고문과 탄압에 시달리는 일이 흔했다. 

 

이들의 아픈 역사는 1999년 12월 국회 본회의에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통과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출범하면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2003년 10월 4·3사건의 진상을 담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보고서가 확정됐고, 당시 재임 중이던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 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 4·3사건은 ‘폭동’, ‘빨갱이들의 반란’이라는 역사 왜곡을 받고 있다. 2018년 4월 현재 이날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생존자는 많지 않다. 당시 8,9 살이었던 이날의 생존자들은 누구에게도 시원하게 말하지 못한 상처와 아픔을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무고한 희생자들의 보상 문제, 무차별적으로 감옥에 끌려간 이들의 명예회복 문제, 생사를 알 수 없는 4·3 행방불명인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국가권력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많았던 이 사건은 지난해 국정농단을 겪은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처럼 기억하지 못하는 아픈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 제주 4·3 사건 70주년인 오늘 그의 말이 새롭게 와 닿는 이유다.

 

penf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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