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의 발전과 함께한 언론 자유의 길

한성순보부터 손바닥 뉴스까지 ‘지향’하는 것

문혜현 기자 | 기사입력 2018/05/18 [11:21]

신문의 발전과 함께한 언론 자유의 길

한성순보부터 손바닥 뉴스까지 ‘지향’하는 것

문혜현 기자 | 입력 : 2018/05/18 [11:21]

“(신문을 창간한 것은) 국민들에게 세계정세를 알리는 한편 선진 국가의 정치·경제 및 문화 제도를 소개하고 과학지식을 보급시켜 결국은 이 나라를 문명개화의 단계로 이끌어보려는 목적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를 창간하면서 조선 정부가 밝힌 내용이다. 신문이 발간되던 1883년 조선은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시에 전근대적 사회를 개혁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국민의 의식을 깨우치는 데 신문은 중요한 수단이었고 그렇게 신문의 발전은 시작됐다. 종이 신문부터 인터넷, SNS까지 각 시대적 상황에 따라 신문은 내용과 형태를 달리해왔다. <주간현대>가 창간 21년을 맞은 지금, 그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편집자주>


 

▲ 신문의 형태와 모양의 변화는 있었지만 '진실'과 '자유'에 대한 지향은 계속되고 있다.     © 무료 이미지 사이트 pixabay

 

신문의 시작

<한성순보>이 관보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사라진 뒤 나타난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지다. 국문과 영문으로 발간된 독립신문은 한국에서 최초로 외국에 국내 여론을 알렸다. 독립신문은 이후 창간된 <매일신문>·<황성신문>과 더불어 개화사상을 고취시키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외쳤다.  

 

일제강점기 경술국치로 총독부기관지를 제외한 이들 민간신문은 모두 소멸됐다가 1920년 <조선일보>·<동아일보>가 창간됐다. 이후 <조선중앙일보>까지 발행되면서 신문은 활기를 찾는 듯 했다. 실제 민간지들은 한민족의 이익을 수호하는 신문으로 민족운동과 계몽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일제의 검열과 탄압으로 수없이 신문의 압수와 정간을 당한 신문사들은 경영상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1930년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대표적인 친일 신문이라고 불릴 만큼 일본제국을 찬양하는 기사를 게재하는 등 친일 행적을 보이기도 했다. 조선일보 사장인 방응모는 1933년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고 결국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올려졌다.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1940년 두 신문은 강제로 폐간당한다.

 

광복, 시대를 반영하는 신문

1945년 광복 후 미군정기에 돌입하게 되면서 신문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신문발행은 정부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었고 서울에서 <조선 인민보> 지방에서 <민중일보>·<자유신>·<대동신문> 등이 창간됐다. 강제로 폐간됐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복간됐다. 그렇게 신문 발행이 활성화됐고 당시 등록된 신문·잡지 등 정기간행물은 242종에 달했다. 

 

좌익과 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이 시기 대부분의 신문들은 자사의 주장을 내세우며 정치 정론지적 성격을 띠었다. 혼란한 세태를 반영하듯 언론인 테러와 신문사 습격 사건이 일어났고 기물파괴 등 무질서한 상황이 계속됐다. 1946년 이승만 정부는 신문발행을 허가제로 환원했다. 이 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 신문발행을 억제하는 근거가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시기에는 각 신문사가 ‘전쟁판 신문’을 발행했다. 1957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고 총회 결과 매년 4월 7일부터 15일까지를 신문 주간으로 설정했다. 이 때 신문의 자유와 책임·타인의 명예와 자유·품격 등을 다룬 ‘신문윤리강령’을 채택한다. 

 

1960년 3월 15일 대선 부정 선거로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자 신문도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며 전면적인 투쟁에 나섰다. 4·19혁명 이후에는 다시 신문 발행이 등록제로 환원됐다. 때문에 수많은 신문·잡지가 창간되고 언론의 자유 보장이라는 긍정적 현상이 대폭 확산됐지만 반대로 사이비 기자 등 이른바 ‘가짜 뉴스’가 나타나는 부작용이 있었다.

 

군부독재에 ‘탄압받는’ 신문

5·16 군사정부는 ‘신문·통신사 시설 기준령’을 발표해 본격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신문사들은 조·석간 등 하루에 신문을 두 번 발행할 수 없게 됐다. 정부는 언론을 기업으로 육성하며 신문의 내용을 향상하는 언론정책을 펼쳤다. 때문에 이 시기 신문은 ‘정부 권력 앞에 굴복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신문의 기업화·상업화 및 자본권력과의 유착이 시작됐다는 분석이 있다. 

 

12·12 쿠데타 신군부도 대규모 언론 탄압을 자행했다. 정기간행물 매체를 대규모로 등록 취소했으며 언론 통폐합을 강행했다. 이후 각 광역자치단체에는 1개의 일간지, 서울에는 조간과 석간 일간지 각각 3가지 매체만 발행할 수 있었다. 방송 역시 동아방송·TBC가 KBS에 통폐합됐다. 

 

언론기본법 폐지, 신문의 ‘자유’

1980년 말 오랫동안 언론의 활동을 규제해온 언론기본법이 폐지됐다. 언론 통폐합으로 폐간됐던 신문들이 일부 복간되었고 새롭게 창간되는 신문이 늘었다. 정치적 민주화와 함께 언론도 외적인 압력에서 벗어나 환경감시기능과 비판기능을 회복하고자 했다. 

 

이때부터 재벌과 종교단체가 신문사를 설립했고 본격적인 지면 수 늘리기와 광고 유치 경쟁이 시작됐다. 신문의 형태는 대판을 비롯해 국민일보의 국민일보 판형, 중앙일보의 베를리너 판형 등 변화가 일어났다. 가로짜기 편집이 시작됐으며 전문가와 독자의 의견을 담는 오피니언 면도 대폭 확대됐다. 또한 하나로 묶여있던 신문을 두 개 이상으로 나눠 별지를 만드는 섹션 신문도 등장했다. 

 

1987년 문화공보부엔 약 80개의 일간신문이 등록되어 있었고 중앙의 경제·스포츠·영자지를 포함한 조·석간지의 발행부수는 약 1268만 부로 추산됐다. 1987년의 ‘6·29 선언’은 언론이 그동안의 권위주의적 통제와 검열에서 벗어나 자율경쟁 시대에 진입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후 언론은 정치 상황의 변화·경제성장·그리고 서울올림픽 개최 등을 전하며 과거에는 금기시되었던 영역 또한 과감하게 보도할 수 있게 됐다.

 

자율화, 언론의 급증 

제 6공화국의 출범을 전후로 신문과 잡지 등 정기간행물 수가 급속도로 증가했다. 자유화와 자율·경쟁의 바람을 타고 다양한 신문과 잡지들이 등장했다. 6·29선언 이후 1980년 언론통폐합 때 강제로 폐간된 신문과 잡지들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한겨레 신문>·<세계일보>·<국민일보> 등의 종합일간지가 새로 창간되었고 경제지를 비롯한 특수지가 창간됐다. 지방에서도 마찬가지로 폐간된 신문의 복간과 신규 창간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후 인터넷의 발달, 통신 기술의 발달로 정기간행물은 2008년 9652개에서 2012년 14563개, 2017년 19504개로 증폭했다. 신문의 형태 또한 ‘종이’에 한정되지 않았다. 인터넷과 통신의 발달로 신문은 언제, 어디서나 읽혔고 SNS 사회관계망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현재의 신문

‘표현의 자유’를 가지고 ‘진실’을 보도하는 언론의 역할과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리고 언론기본법의 폐지로 국가의 언론에 대한 탄압은 이전보다 덜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진실을 왜곡하려는 움직임과 자본·권력과 결탁해 여론을 조작하려는 세력은 남아있다. 지난해 광장을 가득 채웠던 시민들의 촛불과 외침은 언론의 역할과 여론과의 관계에 대한 숙제를 남겼다.   

 

국경없는기자회가 발표한 언론자유지수에서 한국은 지난해 초 63위에서 올해 초 43위로 순위가 크게 올랐다. 한국은 노무현 정부시절이던 2007년 이후 11년 만에 미국(45위)보다 높은 언론자유 순위를 기록했다. 이효성 방송통신위원장에 따르면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독립’은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 중 하나다. 이 위원장은 “2020년까지 30위권으로 끌어올리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며 “언론을 통제하면 단기적으론 유리할 수 잇지만 그 결과 더 많은 비리를 저지르게 되고 결국 적폐가 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국경없는기자회는 “인권운동가이자 과거 정치범이었던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한국의 언론자유상황은 전환의 계기를 맞았다”고 평가했다. 정권이 바뀌고 지난하게 이어졌던 KBS과 MBC의 파업이 봄을 맞았다. 공영방송투쟁의 선두에서 싸웠던 시사교양PD출신 인사들이 사장이 되면서 ‘공영방송 정상화’는 이루어졌다. 청와대 또한 박근혜 정권 시절 질문과 답변을 ‘정해진’기자들만이 묻고 답할 수 있었던 시절을 지나 역대 최초로 대통령이 직접 ‘지명’하고 기자들이 ‘자유롭게’ 묻는 풍경이 펼쳐졌다. 

 

끝나지 않은 싸움

그러나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여론을 조작한 ‘드루킹 사건’으로 떠오른 포털사이트의 ‘인 링크’ 방식은 새로운 문제가 됐다. 뉴스를 모아 제공하는 플랫폼이 뉴스를 선정하는 과정이 또 하나의 ‘통제’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논란은 커졌다. 대안은 ‘아웃 링크’였다. 독자들이 직접 언론사의 사이트에 들어가 뉴스를 접하는 것이다. 하지만 네이버는 일부 뉴스 권한을 일부 포기한 채 전면 아웃링크 도입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언론은 고민에 빠졌다. “네이버를 떠나야 한다”, “포털과 상생해야 한다. 포털과 이용자의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공적 자원으로 보고 언론사와 공유해야 한다”는 담론이 이어지고 있다. 신문(언론)은 새로운 국면을 맞은 셈이다. 많은 신문들이 예상치 못했던 난관을 만나 고민하고 해답을 찾으며 “이번 개편이 언론이 변화할 기회다”라는 의견을 공유하는 지금, 신문의 발전은 계속되고 있다. 

 

penf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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