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서거 9주기, ‘정치적 타살’ 의혹의 내막

MB정부의 탄압…“망신주기 응징이 화 불렀다”

김범준 기자 | 기사입력 2018/05/23 [09:37]

지난 2009년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오전 6시 50분쯤 경호원과 함께 간단한 복장으로 사저 인근 뒷산을 등산하던 중 벼랑에 떨어져 크게 다쳤다. 그리고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자살한 것이다. 그의 사망으로 수많은 지지자들은 슬퍼했으며, ‘정치적 타살’로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보수 세력에 대한 반감은 커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노무현 전 대통령을 사망으로 몰아넣은 세력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권력형 비리로 권력에서 내려왔고, ‘노무현 정신’을 물려받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무드를 만드며 압도적인 고공지지율 행진을 이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과 가장 가까웠던 동반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올해로 9주년을 맞았다.


퇴임 후 폭발적 인기…고향인 봉하마을로 내려가 소통활동
망신주기 수사 시작한 MB정권…언론플레이 하며 파상공세
보수세력에 의한 ‘정치적 타살’…현대사 대표 비극 중 하나

 

▲ 퇴임 후 봉하마을에서 시민들과 소통하며 소탈한 삶을 살고 있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KBS 영상 갈무리>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8년 퇴임 후 자신의 고향인 김해시 봉하마을로 귀향했다. 이는 전임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전임 대통령들은 대부분 서울 인근에 자리를 잡고 살아온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 것이다.

 

소통했던 말년


이처럼 봉하마을에 자리잡은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국민들과의 교류를 멈추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사람사는세상’ 사이트를 운영하며 대중들과 소통했고 봉하마을 촌장으로 재임하는 등 민중들과 다양한 교류를 추구했다.


대표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공장폐수로 오염된 화포천을 살리기위해 봉하마을 주민 및 지지자들과 함께 직접 하천에 나가 쓰레기를 주우며 정화를 위해 노력했고, 화포천에 쓰레기를 무단투기하거나 불법낚시를 하는 사람이 없도록 ‘화포천 지킴이’를 신설하여 철저히 관리토록 했다.


그 결과 죽은 하천이라 불리던 화포천은 2009년 2월 국토해양부로부터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선정될 정도로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관광지로 완전히 탈바꿈하였으며, 멸종위기의 동·식물을 포함하여 600여종의 생물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생태학습의 장이 되었다. 훗날 이 화포천에 국내에선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황새가 일본 도요요카시에서 건너와 정착하여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또한 친환경 농법인 오리농법을 도입하고자 외국에서 전문가를 초청하여 마을사람들과 함께 직접 비법을 전수받기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초기엔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오리농법이 성공을 거두자 현재는 거의 모든 봉하마을의 가구들이 친환경 농법을 이용한 농사에 참여하고 있다. 장군차를 재배하여 마을의 특산물로 만들었고, 늘어나는 마을 방문객들을 위해 작은 도서관 및 동물원의 건립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전국에서 오는 관광객들과 소통하고자 일주일에 6일씩 만남의 시간을 정하여 관광객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관광객들과의 만남에서 이런저런 근황을 전하거나 즉석에서 노래를 열창하여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이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신기하게도 대통령 재임 당시보다 퇴임 후에 인기 있었던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사랑받으며 행복한 퇴임 후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같은 퇴임 후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대통령 기록물 이관 논란이 번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전방위적인 가족·친인척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부담감은 점점 노무현 전 대통령을 옥죄어갔다.


당시 이명박은 대통령은 당선 직후 정치성과는 거리를 둔 실용주의를 내세우면서, 문재인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임자가 존중받는 전통을 만들겠다고 피력하여 애초에 전임 대통령에 대한 정치보복 가능성을 배제했다.


그러나 2008년 5월부터 미국산 쇠고기 협상 반대 시위와 광우병 괴담 파동으로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 국정에 큰 차질을 빚게 되자 상황은 바뀌게 된다. 이 사태의 배후의 중심에 친노세력이 있다고 생각한 이명박 정부는 2008년 7월 한상률 국세청장으로 하여금 박연차를 비롯한 노무현 전 대통령 주변의 측근들에 대한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진행하도록 하여, 전임자에 대한 관용에서 정치적 응징으로 방침을 급선회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을 수사하던 검찰과 국정원은 서로 ‘노무현 망신주기’에 혈안이 되어 움직였다. <사진=SBS 뉴스 갈무리>

 

망신주기 수사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친인척의 비리를 경계하여 인명부를 작성하여 관리까지 하면서 친인척 비리를 근절하려 했지만, 결국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됐다. 먼저 검찰 측은 박연차가 노 전 대통령에게 건낸 15억원에 대해 수사를 벌였으나, 노 전 대통령 측에서 차용증을 제시하였고 사저신축비 용도로 빌린 개인간의 금전 거래로 판단하여 무혐의 종결됐다.


이후 박연차가 권양숙 여사에게 건낸 100만 달러(약 10억-13억원 정도), 정상문에게 건낸 3억 원, 연철호에게 건낸 500만 달러에 대해 수사가 이루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은 임기중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에게 100만 달러와 3억 원을 요구하여 (일부는 정상문을 통해) 돈을 받은 것을 시인하였는데, 이 돈은 권양숙 여사가 개인 빚 청산과 자녀 유학비로 사용하였다고 밝혔다. 박연차-권양숙 간 돈이 오간 것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 본인은 인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하였으며, 차용증 등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검찰은 이 또한 개인 간의 금전 거래임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박연차가 연철호에게 건낸 500만 달러는 노무현 대통령이 인지하고 있었으나 개인 간의 투자 성격의 돈 거래라고 보아 막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검찰 측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640만 달러의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의 공범으로 보아 형사처벌하고자 하였다.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권양숙 여사가 돈을 받은 것을 인지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이를 수사 과정에서 입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같은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한 수사는 무려 몇 개월에 걸쳐서 장기간 진행되었다. 처음 1기 검찰 수사진은 당시에 검찰 내부에서 명망있는 검찰들로 구성되었다. 1기 검찰 수사진은 퇴임 이후 박연차와의 거래는 사적 거래라 수사할 내용이 없다고 보고 종결지었다.


그러나, 수 개월 후 검찰 수사진 진용이 다시 꾸려졌다. 2기 검찰 수사진이 꾸려질 당시 이인규, 홍만표 등이 합류하였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직접 수사한 수사관으로는 박근혜 정부 정폐 세력의 중심으로 지목되는 우병우 전 민정수석도 있었다. 결국 이처럼 메머드급으로 꾸린 수사팀으로 인해 큰 일이 일어날 것이란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인규는 이전 수사진의 수사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주변 인물이 차례차례 소환당했다. 일가족 역시 차례차례 소환당했으며, 이런 소환은 한 번이 아니라 수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조여왔다. 일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랜 후원자이자 친구인 창신섬유 강금원 회장은 뇌졸중을 앓고 있었으나 구속되었고 병보석마저 불허됐다. 결국 강금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자, 병보석이 허락된다. 그러나 이미 치료시기를 놓쳐버렸고 결국 이로써 사망에 이르고 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주위가 피해를 보는 것에대해 착잡한 심정을 글로 남겼다.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터넷에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면서 더 이상 여러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아달라며 칩거에 들어갔다.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더 이상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와 함께 불거진 억대의 피아제 시계를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검찰은 해당 시계가 뇌물임을 노대통령이 인지하고 받았다고 햇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해당 시계는 환갑 선물일 뿐이며, 자신은 받은 것도 버린 것도 수사 전에는 몰랐다고 검찰 진술에서 주장하였다.


이 당시 국가정보원은 대검찰청에 명품 시계 등을 활용한 대국민 망신주기 언론 플레이를 제안했다. 당시 대검 중수부는 구속 수사쪽에 무게를 두고 있었으나, 국정원은 노 전 대통령을 불구속 기소하는대신 명품 시계 등을 통한 언론플레이에 초점을 뒀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비난 여론을 극대화하자는 방안이었다. 국정원 측이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려 하자 검찰은 ‘수사권 침해’라고 반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검찰은 국정원 직원의 멱살까지 잡으며 몸싸움까지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즉, 전형적인 ‘망신 주기 수사’를 한 것이다.


국정원의 노력은 성공을 거둬 무죄추정의 원칙과 피의사실 공표 금지원칙을 어겨가며 매일매일 언론을 통하여 수사 상황이 공공연히 흘러나왔고, 고가의 피아제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선정적 보도가 이어졌다. 이것은 진술 내용과 무관한 국정원의 언론플레이를 위한 허위였음을 당시 중수부장이었던 이인규 변호사는 2015년 증언했다.


이인규는 당시 국정원의 행태는 공작 수준이라 밝혔다. 지난 2015년 2월 이인규는 국정원에서 망신주기 여론 플레이를 제안하였으며, 검찰의 권한을 무시하고 국정원이 주도하려고 하여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이인규는 심지어 국정원이 여론플레이의 주역이었으며 검찰은 관여하지 않았다고까지 말했다. 국정원 검찰에도 노무현 시계 언론플레이 요구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같이 수사한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경우에도 이인규의 발언에 긍정하면서 맞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야당은 특검을 요구하였으나 국회에서 여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이같은 공작에 국민 여론은 노 전 대통령에게 매우 불리하게 형성됐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당시 대다수의 국민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구속을 반대했다. 당시 여론조사 기관의 조사를 보면 70%이상의 국민들이 노 전 대통령의 구속에 반대했고, 찬성한 국민들은 27%에 그쳤다. 과거 노태우 대통령의 구속에 찬성하는 여론이 70%에 달한 것과 비교해보면 당시와는 확연한 여론의 차이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 5월23일 2시부터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9주기 추도식이 열린다. <사진출처=노무현재단>

 

대통령의 자살


그리고 5월23일 자택의 컴퓨터에 아래아 한글 파일로 유서를 미리 작성해두고 사저 뒷산(봉하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했다. 인근의 양산 부산대학교병원으로 후송되는 도중 사망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의 직접 원인은 두부외상으로 밝혀졌으며, 공식 발표에 의하면 지난 2009년 5월23일 8시 13분 경 인공호흡을 시행하며 양산부산대병원 응급센터로 이송됐다. 두개골 골절 등이 관찰됐으며 두부의 외상이 직접 사망원인으로 판단되고 늑골골절, 척추골절 등 다발성 골절도 관찰됐다는 상태였다고 한다.


경남지방경찰청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수행 중이던 경호관 이모 씨는 인근 정토사로 심부름을 보낸 후 자리를 비운 사이에 투신하신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경호원은 자책감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이 “담배 있나?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라고 한 후 뛰어내렸다고 거짓 진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씨는 진술을 번복하고, 경호관 사이에 있었던 휴대폰 교신 기록이 발견되면서 이 같은 사실이 밝혀졌다. 경호원의 최종진술에 의하면 노 전 대통령이 경호원에게 ‘담배있나’ 고 물어본 것은 사실이라 한다.


경호관이 초기 수사에서 사망 당시 곁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추고 진술을 계속 번복한 것에 대해 경찰은 “경호 실패에 대한 문책을 두려워한 때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확하게 언제 투신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 컴퓨터에서 유서를 발견하였다.


그의 유서는 다음과 같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죽음이 알려지자, 이번에는 사회 각계각층에서 검찰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쏟아졌다. 심지어 당시에는 국정원 개입 부분은 알려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에서조차 검찰 수사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검사 출신으로 법무부 장관까지 지냈던 박희태 대표 조차 “이런 수사는 처음본다”며 검찰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심지어, 정적으로 분류되어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일전을 벌였던 홍준표 마저 “구속을 하려고 했다면 신속히 결정해야지, 전직 대통령 수사를 하면서 모욕만 주었다”고 검찰을 질타했다.


이같은 여론의 역풍에  지난 6월12일, 검찰은 6개월에 걸친 ‘박연차 리스트’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중수부장 이인규는 장장 6개월에 걸쳐 진행된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결과를 단 5분 만에 발표하고 종결지었다.


처음에는 중수부장실에서 사실상 비공개로 숨어서 진행하려고 하다가 언론의 반발을 받고 공개로 진행한 것이었다. 발표 현장에서 수사팀은 최대한 답변을 피하며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고 하였고, 홍만표는 시종일관 눈을 감고 있었다. 이인규는 발표만 하고 자리를 피했다.


이 단 5분간의 발표에서 이 수사는 ‘뇌물수수 의혹’ 때문이라 하였으나 구체적인 증거는 전혀 언급하지 못했다.


다만, 검찰은 법과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했다며, 정당한 수사였다고 주장하면서 추후 역사적 평가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변호인단은 어이없다는 입장과 함께 검찰의 자기변명과 책임회피를 비판했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인이었떤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을 방어하고자 고인을 두 번 욕보이는 행태에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곧이어 검찰은 전직 대통령 구속 여부에 대해서, 검찰은 이미 불구속으로 내정한 상태였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당시 박연차에게서 금품을 받은 사람은 모두 참고인으로서 다 불구속이 확정된 상태였음에도 유독 금품을 받지 않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만 피의자로서 구속 여부를 심의했으며, 또한 시간을 질질 끌며 모욕을 주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밝힌 셈이다. 이러한 검찰의 ‘정치적인’ 행태에 대해 또 다시 비난을 들었다.

 

정치적 타살


이같이 자살은 선택한 노 전 대통령은 검찰 소환 조사를 응하면서 ‘정치적 자살’을 선택했다고 평가가 다수다. 또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결벽증에 가까운 정치적 자산이자 무기인 ‘도덕성’이 상처를 입고, 검찰의 수사 내용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면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인간적인 모욕을 당했기 때문이면서 이와 함께 노 전 대통령은 자신으로 인해 자신들의 참모와 가족들까지 고초를 당하고 있는 것이 대해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의 극단적인 선택은 전직 대통령의 오욕과 비운의 역사를 끊어내려는 몸부림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서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에 대한 ‘먼지털이식’ 수사가 반복되는 현대사의 비극이라는 평도 있으며, ‘정치적 타살’이라는 비판이 크다.


그리고 이같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타살’로 인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열기와지지, 그리고 적폐청산의 열망은 더욱 커져, 결국 그 유산을 이어받은 현 문재인 대통령 ‘더불어민주당 정부’가 탄생한 원동력 중 하나가 됐다.


한편, 노무현 전 대통령 9주기 추도식은 5월23일 오후 2시부터 봉하 대통령묘역에서 엄수된다.

 

penfree1@hanmail.ne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간현대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