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나 가능할 법한 100억원대 사기사건이 주범인 나경술이 검거되면서 사건 발생 한 달여 만에 일단락됐다. 이들은 바지·백지수표공급책, 자금 및 전주 소개책, 은행알선책, 경비제공책, 위조책 등 철저한 역할 분담을 통해 31명이 조직적으로 범행을 계획·감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한 나경술은 도주 당시 백지통장을 이용한 1000억원대의 사기극까지 계획하는 등 그의 용의주도함에 수사를 담당하는 경찰들까지 혀를 내두르고 있다. <편집자 주> 사기전과 20범 나경술…반년간 치밀한 범행준비 사채업자에 100억짜리 수표 빌려서 그대로 위조해 경찰 검거에 대비해 호위책 4명 고용하는 치밀함도 도피 중 1000억원대 금융사기 준비한 대담성 보여 [주간현대=김범준 기자] 지난 6월12일 오전 11시쯤 국민은행 수원 정자동 지점에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신사가 나타났다. 그는 창구에 100억원 수표를 제시했다. 직원들은 견실한 기업가로 알고 주문대로 50억원씩 2개 계좌에 이체해줬다. 수표 감별기도 통과했고, 발행 번호 전산조회 결과 전날 서울 동역삼 지점에서 발급한 정상 수표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그 후 3일 동안 100억원은 분산 이체와 인출 과정을 거쳐 모두 증발했다. 일확천금을 노린 영화 같은 사기 사건은 한 달 만에 주범들이 검거되면서 전모를 드러냈다. 치밀한 범행계획 경기경찰청 전담 수사팀은 지난 7월15일 이 사건의 총책인 나경술(51)씨, 정자동 지점에 위조수표를 제시한 최모(61)씨, 범행 자금을 지원한 사채업자 김모(42)씨 등 주범 3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지명수배됐던 나씨는 지난 7월12일에, 최씨는 13일에 각각 서울과 부산에서 검거됐다. 경찰 조사 결과 이 사건에는 31명이 점조직 식으로 임무를 분담해 가담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기 등 전과 20범의 나씨는 지난해 8월 백지어음을 위조해 47억여원을 챙겨 달아난 사건으로 서울 서초경찰서에 수배됐다. 그는 수배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달 만인 2012년 10월 또 다시 ‘한 건’을 준비한다. 나씨는 어음이 가능하면 수표도 백지로 받아 위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나씨는 지난 2012년 10월 ‘100억원 위조수표 사기범행’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2년여 전 교도소에서 한 방을 썼던 동료들을 만난 나씨의 계획에 따라 사기극을 벌이기로 했다. 그러곤 범행에 필요한 31명을 섭외했다. 먼저 교도소 동기 김모(46)씨를 끌어들인 뒤 바지사장으로 내세울 최씨, 자금조달책인 사채업자 김씨, 은행알선책, 환전인출책 등을 차례로 모집했다. 이들을 통해 은행 직원도 매수해 뒀다. 차근차근 범행을 준비하던 나 씨는 올해 1월11일 국민은행 한강로지점의 김모(42) 차장으로부터 1억110만원짜리 수표를 발행받았다. ‘위험한 장사’에 가담한 김 차장이 이씨에게 건넨 것은 가짜 수표였다. A4 용지에 금액과 발행번호가 적힌 것이었다. 대신 김 차장은 이씨에 건네야 할 수표의 원본, 즉 금액이 적히지 않은 백지수표 1장을 빼돌려 이날 저녁 나씨에게 건넸다. 물론 대가로 5억원을 받기로 했다. 나씨는 시중은행은 1억원 이하 수표와 1억원을 초과하는 수표가 서로 재질이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 1억원이 아닌 1억110만원짜리 수표를 발행하게 한 것이다. 이 수표는 일련번호는 있었지만 금액은 적혀 있지 않은 백지수표였다. 1억110만원은 자금조달책 김씨가 제공했다. 영화 같은 수법 위조가 가능한 백지수표를 입수한 나씨는 사채업자 박모(45)씨의 100억원짜리 수표를 ‘타깃’으로 삼았다. 이에 동원된 바지사장 최씨는 박씨와 접촉해 지난 6월11일 ‘회사 인수를 위한 자금력 증빙’을 이유로 100억원짜리 수표를 발행해 사본을 4일간 빌려달라고 주문했다. 1일 수수료 1800만원씩 7200만원을 선지급했다. 박씨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100억원짜리 수표 사본을 주면서도 일련번호 10자리 가운데 3자리 숫자는 가리고 복사해 넘겨줬다. 그러나 나씨 일당은 지난 1월 확보한 진본 백지수표의 발행번호를 교묘하게 지운 뒤 그 위에 박씨의 100억원 수표 발행번호를 입혔다. 금액은 당연히 ‘100억원’이라고 적었다. 은행에선 일반적으로 타발기(도트프린트 방식)를 사용해 액면 금액 등을 적지만 잉크젯(뿌리기 방식)을 사용해도 감별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같은 날 오후 9시경 1억110만 원 백지수표와 100억원 수표 사본을 평소 알고 지내던 위조 기술자에게 퀵서비스로 보냈다. 위조 기술자는 1억100만원 수표의 일련번호를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 감쪽같이 지우고 100억원 수표 사본의 일련번호를 덧씌웠다. 나머지 비워 있던 금액란에는 ‘₩10,000,000,000’을 컬러 프린터를 이용해 새겨 넣었다. 이로써 진짜 100억원짜리와 구별이 안 되는 ‘쌍둥이 가짜 수표’를 만들었다. 위조수표를 받은 나씨는 다음날 곧바로 인출에 나섰다. 6월12일 오전 11시 국민은행 수원 정자동지점에 최씨를 보냈다. 이 지점의 한 간부는 평소 알고 지내던 사채업자로부터 ‘큰손이 찾아갈 텐데 자금 유치에 도움이 될 테니 잘해주라’는 얘기를 듣고 최씨를 만났다. 최씨가 가지고 온 100억원 수표를 수표감별기를 통해 판독하자 원본으로 나왔다. 정자동지점은 최씨가 제시한 페이퍼컴퍼니 회사 2개 계좌에 50억원씩 이체했다. 나씨는 준비해둔 환전책을 동원해 서울 명동 일대 3개 시중은행에서 67억원은 미화로, 30억원은 일본 엔화로 인출하고, 나머지 3억원은 5만원 권으로 각각 바꿔 현금으로 받았다. 6월14일까지 사흘 동안 명동 사채시장에서 외화를 모두 현금으로 바꿨다. 나씨는 범죄의 기여도에 따라 깔끔하게 수익을 배분하는 수완도 보여줬다. 이번 범행을 계획한 총책 나씨는 18억9000만원, 자금을 조달한 사채업자 김씨 33억3000만원, 전직 경찰인 최씨 3억1000만원, 그외 은행알선책 4명 24억원, 환전·인출책 7명 9억원, 범죄수익금 은닉책 7억7000만원 수표위조책 1억원 등으로 각각 배분됐다. 나머지 3억원은 대부업체나 금융권에 환전 수수료로 지급된 것으로 파악됐다. 그러나 국민은행 김 차장은 범행이 들통나는 바람에 돈을 받지는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들통난 범행 그러나 이들의 범행은 지난 6월14일 오후 진짜 100억원 수표 주인인 박씨가 은행을 찾았다가 수표가 인출된 사실을 확인해 경찰에 신고하면서 드러났다. 하지만 주범 나씨는 바지사장 최씨, 은행 알선책 김씨 등과 함께 잠적했다. 나씨는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지인들과의 연락을 끊고 2~3일 간격으로 차량과 휴대전화를 교체해 추적을 피해왔다. 또한 한곳에 머무르는 일 없이 서울과 의정부, 부산 등의 모텔, 고시원을 돌며 은신했다. 여기에 나씨의 치밀함은 돈 인출에만 국한되지 않고 경찰의 검거에 대비해 경호원까지 뒀던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나씨가 체포될 때를 대비해 지난 5월 호위책으로 배모(52)씨를 비롯해 김모(36)씨, 이모(33)씨, 배모(33)씨 등 4명에게 자신의 호위를 맡겼다. 이들을 고용해 체포 시 바람막이 역할과 차량 운전, 경호, 수표 인출 감시 등의 역할을 맡긴 것이다. 또한 나씨는 지난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고도 도주하는 등 경찰을 농락하는 모습도 보였다. 한 언론에 따르면, 지난 2012년 8월 은행원과 짜고 백지어음을 위조해 47억원을 챙겨 달아난 사건의 주범으로 경찰의 수배를 받아왔던 나씨는 지난 3월 초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불심검문을 받았다. 경찰이 나씨 주민번호를 조회기에 입력하자 ‘기소중지자’로 떴고, 경찰은 이를 나씨에게 고지했었다. 하지만 나씨는 이 과정에서 “사람을 뭐로 보고 그러느냐. 기계에 오류가 있으니 다시 한 번 조회를 해 보라”고 오히려 경찰에 호통을 쳤고, 경찰이 다시 조회하는 사이 달아났다고 한다. 이같이 용의주도했던 나씨는 한 달간의 도주극 끝에 서울 도심에서 검거됐다. 경찰은 지난 7월12일 저녁 7시 10분, 강남구 역삼동 L호텔 노상에서 호위책 중 한 명인 김씨와 격렬한 몸싸움 끝에 검거했다. 경기지방경찰청 전담수사팀은 사건 관련자 14명을 검거해 나씨 등 4명에 대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2명은 이미 구속했으며 8명은 입건했다. 수표 위조 기술자 등 공범 11명도 뒤쫓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매우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사기단을 수사하면서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나씨 등 주범 3명과 다른 2명을 구속하는 등 지금까지 모두 31명을 입건해 조사하고 있다. 정확한 사건경위를 밝히고 잔당 검거와 자금회수에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까지 나씨가 소지하고 있던 수표 5000만원을 포함해 3억6000만원을 회수했으며, 나머지 현금의 행방에 대해서는 추적을 계속하고 있다”며 “일부 소액들을 가져간 사람들은 맞아떨어지나, 다액을 가져간 사람들은 진술들이 엇갈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수사 해서 명쾌히 해야 될 부분이다”고 밝혔다. 또 다른 계획 경찰 조사결과 나씨는 도피 당시에도 또 다른 금융사기 범행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경찰이 범인들의 검거를 위해 탐문수사를 벌이던 중 정보를 입수한 것으로 ‘또 다른 범죄가 계획되고 있다’고 들었지만 당시에는 사실여부는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경찰은 또다시 범죄가 발생한다면 사회적인 파장과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금감원에 지난 6월25일 통보를 했고, 이에 금감원은 주의사항을 전국 은행에 고지했다. 이후 나씨가 검거되고 나서 그가 소유하고 있었던 백지통장을 확보해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한 것이다. 범행방법은 이번과 비슷한 수법으로, 국민은행 김 차장을 통해 가짜 통장을 만든 뒤 잔고증명을 빌미로 재력가로부터 800억∼1000억원을 입금받아 가짜통장을 내주고, 진짜 통장을 빼돌렸다가 돈을 인출한다는 계획이라고 경찰은 밝혔다. 경찰은 “이 백지통장으로 나씨를 조사한 결과 새로운 범죄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며 “하지만 800억, 1000억대의 사기 계획이기 때문에 자금동원능력이나 이런 문제가 있어 성공 가능성이 있었을지 여부는 미지수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은 진짜 100억원 수표의 주인인 사채업자 박씨가 “수표 진본이나 사본을 보여준 적도 없다”고 주장함에 따라 사기범들이 발행 번호를 알아낸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박씨와 마찬가지로 나씨에 농락당한 국민은행 측은 박씨의 100억원 지급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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