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든 추상화 50년 내공 ‘신현호 화백’

“번뜩이는 영감? 피나는 노력 속에서 나온다”

김은지 기자 | 기사입력 2018/11/02 [16:13]

[인터뷰]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든 추상화 50년 내공 ‘신현호 화백’

“번뜩이는 영감? 피나는 노력 속에서 나온다”

김은지 기자 | 입력 : 2018/11/02 [16:13]

지난 10월3일부터 9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환상과 열정을 주제로 한 남보(南甫) 신현호(申鉉浩) 화백의 개인전이 성황리에 마무리 됐다. 신 화백은 1944년 전남 장성 출신으로 홍익대학교에서 한국화를 전공했다. 1994년부터 2002년까지 용의눈물, 태조왕건, 여인천하 등과 같은 굵직한 사극 드라마에서 배경미술을 맡기도 했다. 2009년 대한민국 미술대전(국전) 한국화 심사위원, 2010년 대한민국 현대 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1981년 국전 사군자 풍죽 입선을 시작으로 데뷔해 1983년 한국 미술대전 문인화 대상, 1992년 한국 서예협회전 문인화 입선, 1992-1993년 한국 현대조형 서예협회전 문인화 입선, 2006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한국화, 문인화 특선을 수상했다. 1983년 관훈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이후 꾸준히 활동을 이어갔으며, 2008년에는 한국인 50인 인물화전, 2009년에는 인물화 초대전, 2010년 50년 침묵 깬 신현호 창작전 등을 열었다. 인물화로 시작해 50년 깊은 내공을 담은 추상화로 개인전을 치른 신 화백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음은 신 화백과의 인터뷰 일문일답이다.


예술의전당에서 진행된 미술 개인전 중 호응 좋았던 전시회
문인화, 한국화, 인물화, 서양화 등을 섭렵하며 추상화 제작
국전 준비하는 내내 매달린 시간 거의 20년…심사위원 등극
화가처럼 치열하게 공부하는 직업 드물어…무거운 창작고뇌

 

▲ 신현호 화백     © 주간현대

 

- 이번 개인전이 예술의 전당에서 진행된 미술 개인전 중 가장 관람객이 많고 호응이 좋았다고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어땠나? 
▲정말 벅찬 영광이었다. 예술의 전당이란 곳에서 전시 한 번 하는게 작가들의 로망이고 꿈이다. 이번 개인전을 하게 되면서 어떤 작품을 발표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고, 100호, 120호 등의 대작들을 많이 선보였다. 전시 관계자에게 예술의 전당 개관 이래 개인전 관람객 중 가장 많이 왔다는 얘기를 들었고, 애국 작가들이나 독일, 일본 등 해외작가들도 와서 호평을 해줘 기분이 좋았다.

 

-오랜 시간 만에 전시 작품을 선보였다. 이번 전시작품의 스타일과 제작 과정이 궁금하다.
▲이번 작품은 추상화로 그려졌다. 추상은 어떤 피사체를 그대로 옮기는 게 아니라 내면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인데, 사실 화가들도 단계가 있다. 세계적인 화가들도 살펴보면 청년기와 중년기 등 성장기에 맞춰 작품도 따라가게 된다. 젊었을 때는 자연물을 직접 대상으로 하면서 구상적으로 하는 경향을 보이다가, 세월이 흐르고 60-70대의 노년기에 접어들면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게 된다.
추상적인 그림은 연륜과 풍부한 경험을 바탕이 되기 때문에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그리는 과정도 가장 어렵기도 하다. 오케스트라의 음악을 듣다보면 악기들이 다 다르지만 동시에 연주를 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음악으로 화음이 된다.
내 추상작업도 그렇게 시작한다. 크고 작은 조각들이 한 덩어리가 되면서 어떤 컴포지션을 이루는게 작품의 특징이다. 추상화가 마치 연륜이 쌓이는 인생 과정을 거치듯, 내 자신도 문인화, 한국화, 인물화, 서양화 등을 섭렵하면서 새로운 작품들이 나오게 됐다. 앞으로도 이러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구상보다는 추상적인 비구상의 영역을 작품으로 더 다루려고 한다.
비구상을 하되 뭔가 남들이 하지않는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보니, 작품제작과정에서부터 남다른 뭔가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새로운 방법을 이용하게 됐다. 130㎝의 대형나이프를 직접 대장간에 의뢰해서 제작을 하고 작품 도구로 사용했다. 보통 작품 제작과정에서 대부분의 화가들이 파렛트에 물감을 짜고 붓에 묻혀서 캔바스로 가져가는 과정으로 하게 되는데, 캔바스에 물감을 그대로 짜놓고 나이프로 칼질을 그대로 하는 식으로 그렸는데 굉장히 좋은 호평을 받게 됐다. 

 

▲ 신현호 화백.     © 주간현대

 

- 그림을 그리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 1960년대 종로에 있는 미술학원에 가기 위해 17살 때쯤 전라남도 장성을 떠나 혼자 상경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하지 않는 대신, 그림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어 무작정 어린 나이에 종로에 있는 미술학원에 다니기로 한 것이다. 당시 6.25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된 후라 다들 어려운 상황이었다. 낮에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해서 밤에 학원을 다녔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학원을 갔다오면 저녁에 편히 잠잘 곳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여유가 없어서 자취나 하숙할 수 도 없었고, 큰형님의 친구 분이 책임자로 계시는 두부 공장에서 사람들 틈에 끼어서 잤다. 공장에 저녁 늦게 가게 되면 낮에 두부를 팔고 오신 분들이 이미 방을 다 차지해서 잘 곳이 없었다. 그럴 땐 의자에 앉아서 밤을 새본 적도 많았다. 그때는 잠잘 곳이 있는 사람이 부럽기도 했고, 잠잘 곳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 화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데 있어서 영향을 받은 계기가 있나?
▲서울에서 미술학원을 다닌 후로 광주에 가게 됐는데, 학원 다닐때 인물묘사, 인물화, 석고 데셍 등을 배워 자연히 인물화를 그리다보니 사람 얼굴을 많이 그리는 극장 간판 일을 하게 됐다.  
일을 시작한지 좀 지나 1970년대에 접어들어 더 이상 간판쟁이로 끝나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제대로 미술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서울로 돌아가 창작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초기에는 스승없이 독학으로 공부하다가 나중에 서예를 하시는 송석 정재흥 선생님을 만나고나서부터 서예 공부를 하게 됐다. 서예를 하면서 문인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사군자에 대한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미술 창작에 대해 눈뜨게 됐다. 서예에 대해 깊이 들어가보니, 서예 그 자체가 하나의 추상이었음을 깨달았다. '하늘 천 따지' 이런 글씨들에 추상적인 요소들이 많은데, 여기서 굉장히 차원 높은 추상화가 서예인 것을 느끼게 되면서 이후 작품에 영향을 받은 계기가 됐다.

 

- 가장 좋아하는 화가가 있는가?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 반 레인을 좋아한다. 빛을 이용한 인물묘사가 인상적이어서 처음 미술에 입문할 때 인물학을 좋아한 동기가 됐었다. 파블로 피카소를 근래에 와서는 좋아하게 됐다. 그의 그림에는 힘이 있고 뭔가 새로움에 도전하는 도전의식이 강한 면이 좋다. 19-20세기에 인상주의 그림들이 주축을 이뤘던 시대에서 그런 파격적인 자기 세계를 구축한 것이 대단한 화가다.

 

▲ 본인의 작품 앞에서 기념 촬영 중인 신현호 화백.     © 주간현대

 

-대한민국 최고 미술대전으로 불리는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심사위원 자리로 오르기까지 그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정말 쉽지 않았다. 과거에는 국전에 입선만해도 엄청난 대접을 받는 시대였다. 특선을 하게 되면 서울대에 합격했다고 여길 정도로 대접을 받는 시대였다.
국전을 준비하기 시작해 사군자로 처음 입상을 하게 된 것이 1981년 즈음이다. 그러면서 순수회화 쪽에 입문을 하게 됐고, 그 이후 1984년 2번째 국전에서 특선을 목표로 다시 출품했다. 하지만 그 해 봄과 가을 준비한 2번의 국전에서 모두 낙선했고, 그 이후 약 20년간 낙선을 하게 된 시간이 있었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말이 그렇지 1년에 2번을 참여하기 위해서 정신적인것 뿐 아니라 여러가지 투자한 것이 말도 못하게 많았고, 거기서 낙선되면서 받은 상처들과 함께 국전을 준비하는 내내 매달린 시간이 거의 20년이 됐다. 그래도 결코 포기하지 않은 결과, 20년을 훨씬 넘은 2006년도에 있던 봄 국전에 특선, 연이어 가을에도 특선에 오르면서 2009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을 맡게 됐다. 돌이켜보면 아마 20년이 넘게 낙선을 거듭하고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생각이 든다.

 

- 국전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
▲서너번 낙선되고 나면 보통 다 비국전이라는 쪽으로 돌아선다. 요즘은 좀 다르지만 전에는 국전파와 비국전파로 공부하는 부류가 나뉘는데, 비국전파는 몇 번 국전에 출품하다가 낙선되면 돌아서게 된 사람들을 그렇게 분류했다.
국전에 낙선한 시간이 정말 길었지만, 끝까지 출품을 해서 심사위원까지 역임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포기하지않고 했다는 것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거기서 무슨 특선을 하고 심사위원이 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작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심사위원을 해서 큰 대접을 받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목표한 것이 있으니 그 목표를 달성하고 싶었던 것 같다. 명예를 얻고 이런 걸 생각해본적은 없고, 단지 내가 목표했던 건 꼭 이뤄야겠다는 생각으로 했던 것 같다.
또한, 어느 나라든 국전과 같은 제도가 있는데, 이것이 나름대로 정부의 지원을 받고 검증을 받는 하나의 관문이 된다. 이런 제도가 존재하는 이유는 출품을 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부단한 노력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공모전이나 인정받는 한 나라의 공모전이 없었더라면 누가 그렇게 열심히 출품하기위해서 고생하면서 제작을 할까 생각한다면 꼭 필요했던 것 같다. 
운전면허를 쉽게 따는 사람은 오히려 사고를 잘 낼 수 있지만, 여러 번 떨어져서 운전면허를 딴 사람은 힘들게 딴 만큼 사고는 덜 낸다. 많이 낙선한 경험이 내 자신에게 공부하는 시기를 주었고,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 후배 화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 
▲대전 등에 낙선했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지 말고 자기가 한번 목표를 세웠으면 끝까지 했으면 좋겠다. 자기 성찰이 곧 본인 공부다.
요즘 우리나라 화가들을 보면 정말 훌륭한 작품들이 많다고 느낀다. 그런데 모든 모든 예술이 창작을 하는데, 특히 그림만은 더 냉엄한 창작이 요구된다. 화가들이 무거운 창작의 숙제의 짐을 지고 있지만, 이 창작이 없이는 살아남을 수도 없고, 창작을 하지 않는 화가는 화가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 창작이 있는 자만이 화가로 남을 수 있다. 또한, 창작이라는 게 가만히 앉아있어서 떠오르는게 아니라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뭔가를 그리고 있을때 번뜩이며 스치는 영감이 바로 창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손을 놓고 있으면 영감은 오지 않는다고 했고, 에디슨도 99프로가 노력이고 1프로가 영감이다라는 말을 했다. 노력이 천재를 만들고 노력이 영감을 만들어주는 거지, 가만히 천장보고 있는게 영감을 불러오는건 아니다. 그래서 화가들은 누구보다도 피나는 노력과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으면...
▲화가에 대한 인식이 개선됐으면 좋겠다. 화가들이 연속극 같은 곳에 등장하면 방탕하고 나태하고 무질서하다고 표현들을 하는데, 잘못된 화가의 단면을 보고 그린 것 같다. 화가들처럼 치열하게 공부하는 직업도 드물다. 화가는 일요일도, 명절도, 생일도 없다. 평일도 주말도 없는 것이 화가다. 또 무엇을 하든 그림에 대해 생각한다. 어떻게 쓸 지에 대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기자랑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다.
화가는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림을 그리다 죽으면 행복한 존재다. 나이가 있지만 건강이 있는 한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 제일 행복하다. 그리고 뭔가 내 자신을 볼 때, 창조의 열망, 새로운 창작을 해야겠다는 열망은 죽는 순간까지도 계속 갈 것 같다.
사실 별로 아파서 병원간 적이 별로 없었는데, 창작에 대한 열정이 강하다보니 아파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미켈란젤로도 장수한 이유가 죽을 틈이 없었던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창조에 대한 열정이 강하다보니 오래 살았던 것 같다. 화가는 끝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은 화가는 절대 살아남을 수도, 좋은 그림을 그릴 수도 없다. 자나 깨나 꿈에도 공부하고 걸어가면서도 공부한다. 화가는 초상집에 가서도 그림생각만 한다.

 

break98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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