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마초 신성일, 1960-70년대 젊은이의 초상

한국 영화계에서는 찾기 힘든 헐리우드 스타면모...근대화된 도시 활보 청춘기백과 좌절 절규

이계홍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11/05 [10:02]

고 마초 신성일, 1960-70년대 젊은이의 초상

한국 영화계에서는 찾기 힘든 헐리우드 스타면모...근대화된 도시 활보 청춘기백과 좌절 절규

이계홍 칼럼니스트 | 입력 : 2018/11/05 [10:02]

 

▲ 4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신성일 씨의 빈소.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마초 신성일이 하늘의 별이 되었다. 그는 4일 폐암 투병 끝에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영화는 535편이다. 그 영화 속에서 그는 우리들 청춘의 초상을 마음껏 대역하며 60년대와 70년대 외로운 청춘들을 위로했다.

 

신성일은 도시적 풍모로 깡패를 해도 세련돼보였고, 연애를 해도 찌질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삶이 그랬다. 그를 취재했던 선배 연예기자들로부터 들은 얘기다. 그는 근래 번털터리가 된 처지면서도 절대로 잔상스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회식비를 그가 나서서 낸다고 했다. 여전히 남자답고, 마초답고, 건강미 넘치는 자신감을 보였다고 했다.

 

이런 것 때문에 그는 500편 이상의 영화 주연을 맡았으면서도 재산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속이 없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남자는 그렇게 통크고 의연하다는 면을 보여준 셈이다. 회식 자리에 초대받아 갔으면서도 쩨쩨해보이는 것 같아서 그가 먼저 호주머니를 털어내고 일어나는 남자. 이런 마초 근성의 남자를 가졌다는 것이 행복하고, 그런 상남자를 영원히 떠나보냈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

 

일부 연예인들을 보면 연예인 생활 십수 년만에 강남에 수십억, 수백억짜리 빌딩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대단히 잘한 일이다. 그러나 신성일은 산업화와 개발시절 청춘스타로서 매일 푸대에 담을 정도로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러나 친구들 사귀고, 여자 만나는 사이 모두 빠져나갔다. 그것이 자랑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마지막 청춘의 마초 시대를 그렇게 그는 웅변해주었다.

 

 

▲ 4일 오후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신성일 씨의 빈소에 배우 엄앵란 씨가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그의 아내 엄앵란은 이렇게 말했다. 신성일은 가정의 남자가 아니었다. 세상의 남자, 사회의 남자, 대문 밖의 남자지 집안의 남자가 아니었다. 일에 미쳐서 집안은 나한테 맡기고, 자기는 영화만 하러 다녔다. 집에서 하는 것은 늦게 들어와서 자고 일찍 나가는 것밖에 없었다.”

 

1960년대, 70년대 우리들의 형이나 삼촌들의 모습 그대로다. 가정보다 직장, 자식들보다 직장 상사와 동료와 어울려 거래처와 술집을 전전하며 세상을 일구었다. 그러다가 분위기가 확 바뀌자 가정으로부터, 자식들로부터 소외되고, 사회로부터는 낙오되고 도태되어서 외톨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장인정신, 직업정신을 외면해선 안된다. 신성일이 영화에서나 실제 삶에서 그 대역을 해주고 떠났으니 그 시대 청춘들은 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그 시대를 변호할 근거가 마련되지 않았는가. 그의 아내 엄앵란의 말처럼 그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화려한 한국 영화가 나왔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그때 우리들의 삼촌, 형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의 오늘날이 있었다. 그러니 수많은 신성일에게 우리는 고마워해야 한다. 다만 그런 마초들이 답답한 할베 꼰대가 돼버린 것이 안타깝지만...

 

 

▲ 이계홍 칼럼니스트   

신성일은 중앙일보에 연재한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던 한 여성의 이야기를 고백했다. 여성이 세상을 떠난 상태이긴 했지만 신상도 공개됐다. 이때 신성일은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장자연을 가지고 놀던 재벌기업가들, 권력자들은 언론이 숨기는 사이 신성일은 솔직한 고백과 아픔을 얘기한 것을 가지고 두둘겨 맞았다.

 

그는 이 고백을 청춘은 맨발이다책으로 내고, 또 책의 출판기념회에서 "사랑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지금도 애인이 있다. 마누라에 대한 사랑은 또 다른 이야기"라고 말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고, 언론이 조져댔다. 정직하게 말하면 비난받는 시대, 그래서 위선을 권하는 사회가 돼버렸으나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솔직성을 여전히 내보였다.

 

필자는 그의 팬이었다. 남자다운 그의 마초 근성을 사랑했다. 영화에서나 삶에서나 이렇게 진실하고 건강한 연기자를 보지 못했다. 한국 영화계에서는 찾기 힘든 헐리우드 스타의 면모 그대로다. 남성미를 갖고 근대화된 도시를 활보하며 청춘의 기백과 좌절을 절규한 그는 그레고리 펙이나, 폴 뉴먼, 로버트 레드포드, 브레드 피트 이상의 헐리우드 스타다. 우리는 그런 자산을 가졌던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그러나 그는 일생동안 딱 하나 과오를 범한 것이 있었으니 국회의원에 나간 것이다. 영화배우라고 해서 정치를 하지 말란 법은 없다. 성공한 정치인도 많다. 그러나 그는 선택지를 잘못 선택했다. 정치인이라도 캐릭터상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에 나서서 투쟁하는 야당 정치인 모습이지, 보수 수구적 정당인이 될 수 없었다. 지역기반 때문이었겠지만, 그래서 그의 실패는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명성을 정당이 이용했을 뿐, 그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혈혈단신 광야에 서는 청춘의 표상 그대로 정치인생을 살았으면 그의 인생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거기에 뜻하지 않게 비리에 연루돼 2년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는 2000년 제16대 총선 때 대구 동구에서 한나라당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진출했다. 하지만 옥외광고물업자 선정과 관련해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돼 2005년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년만에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정치계의 속성을 잘 몰라서 걸려든 덫이라고 생각한다. 기존 정치인들이야 이보다 수십 배의 금품을 받고도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가는데 그는 멋모르고 후배를 돕는답시고 나섰다가 똥바가지를 쓰고 감옥살이를 했다. 이것도 그의 건강을 악화시킨 절대 요인이 되었다. 그의 묘비명에는 국회의원 경력은 지워버렸으면 한다. 영원한 영화배우로 우리 가슴에 남는 것이 그를 위해서나, 우리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본다.

 

잘 생긴 얼굴, 박노식과 같은 맨주먹 의리의 깡패 모습보다 도시적 고뇌를 지닌 멋진 깡패 모습의 그는 우리들의 영원한 신화가 되었다. 가정적이고 소민적인 행복을 누리는 오늘의 청춘들은 그런 마초 근성의 아버지들이 있었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khlee0543@naver.com

 

*필자/이계홍. 소설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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