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91,봄’…‘1987’의 뜨거운 함성은 어떻게 차가워졌나

한국판 ‘드레퓌스’…‘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다룬 ‘1991,봄’

문병곤 기자 | 기사입력 2018/11/08 [09:19]

영화 ‘1991,봄’…‘1987’의 뜨거운 함성은 어떻게 차가워졌나

한국판 ‘드레퓌스’…‘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다룬 ‘1991,봄’

문병곤 기자 | 입력 : 2018/11/08 [09:19]

“사람들은 힘없는 진실보다 힘에 의해 날조된 거짓을 좋아했다.” 학생들의 잇따른 분신자살로 ‘분신정국’이라 불렸던 1991년 봄은 4년 전의 열기와 달리 냉랭했다. 여론은 더 이상 학생 민주화 운동을 믿지 않았고, 정치권마저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당시 27살의 한 청년은 자신이 쓰지도 않은 한 장의 유서 때문에 감옥에 갇혀야했다. 놀라운 점은 그를 감옥에 가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이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자살사주 혹은 자살방조라는 사법사상 유일무이의 죄명. 이와 같은 꼬리표를 달고 청년 강기훈은 1992년 7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왜 1991년의 대한민국은 이 청년을 감옥에 집어넣었을까. 1987년 뜨거웠고 찬란했던 6월 10일의 항쟁은 4년 후 왜 짙은 그림자를 남기고 사라져야만 했을까.


 

▲ 영화 ‘1991, 봄’의 포스터 <사진제공=인디플러그> 

‘6월 항쟁’이후 김대중·김영삼 분열…다시 군부 정권

여소야대 타개하기 위한 노태우의 ‘꼼수’…3당 합당

1991년 ‘분신정국’, 언론·정치·국민이 눈 돌린 사건

‘3당 합당’서 시작된 정치 비극…지금까지도 이어져

 

지난 2017년 개봉한 영화 <1987>은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둘러싸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세력과 목숨을 걸고 진실을 알리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뤄서 화제가 됐었다. 영화는 당시 사건을 은폐하려던 상부 지시를 무시하고 법대로 부검을 강행한 최환 부장검사, 영등포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전직 기자이자 민주화운동가인 이부영이 옆방에 수감된 고문 경찰관들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뒤 친한 교도관을 통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전달하여 폭로하게 된 실제 사건을 소재로 흥미진진하게 엮어내며 관객과 평단에서 좋은 반응을 받았다.그리고 1987년 일어났던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본격적인 민주주의를 연 민주화 운동’이라는 평을 받으며 5.16 군사정변으로부터 시작된 27년 군부 독재의 끝을 내고 '제도적인' 민주주의가 회복되는 계기가 됐다고 지금까지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지난 10월31일 1987년의 4년 후를 배경으로 하는 작은 영화 <1991,봄>이 극장에 걸렸다. 영화는 1991년 학생 운동에서 발생했던 여러 건의 분신자살과 투신자살에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한 청년을 위주로 진행해 간다. 그 청년은 자신이 쓰지도 않은 동료의 유서 때문에 감옥에 가야만 했다. 그가 바로 강기훈이다. 

 

영화 <1991, 봄>은 거의 30여년이 지난 후, 기타를 치고 있는 강기훈씨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가 연주하는 클래식 기타 곡들의 호소를 듣다보면 관객은 어느새 6월 항쟁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국가에 의한 개인의 매몰’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6월 항쟁의 뜨거운 함성을 기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그 속에서 사그러져가던 1991년은 기억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다시 군부

1987년의 슬프지만 뜨거웠던 열기는 어떻게 다시 차가워져 갔을까. 시작은 제 13대 대통령 선거부터였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관심을 모은 후보는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그리고 야당의 이른바 3김으로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이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을 비롯한 야권인사들은 통일민주당을 창당, 결집하고 김영삼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김대중은 일찍이 차기 대통령 선거에 불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내었고, 1987년 7월 10일의 기자회견에서도 "나는 대통령이 되는 데 관심 없다. 현재로서 불출마 선언은 변함이 없다"고 발언하였으나, 바로 다음 날인 7월 11일 인터뷰에서 "작년의 불출마 선언은 전두환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하면 불출마 한다고 한 것이지, 이번처럼 국민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고 발언하면서 불출마 선언을 하룻밤 만에 뒤집게 된다. 이로써 김영삼과 김대중은 야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두고 격돌을 예고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을 같이 이끌어 온 김영삼과 김대중에 다수의 유권자들은 단일화를 기대했다. 마침 두 사람은 경쟁하다시피 양보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김대중은 1986년 “나는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 김영삼도 “사면·복권이 이루어진다면 김대중 씨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하겠다”고 했다. 대부분의 국민은 두 사람의 선의와 양식을 믿었다. 단일화는 시간문제로 여겨졌다.

 

그런데 상황은 점점 이상하게 돌아갔다. 1987년 5월 통일민주당을 창당할 때만 해도 손을 맞잡고 훈훈한 모습을 보여준 그들이었지만, 점점 그들 사이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실 이들의 물밑에선 오래전부터 신경전이 치열했다. 일단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박빙의 승부 끝에 패배 이후로 김대중과 동교동계는 군사정권의 노골적인 탄압을 받고 있었다. 김대중은 유신 이후로 일본망명, 국내납치, 체포, 사형선고, 미국망명 식으로 계속 떠돌면서 세력이 많이 약화돼 있는 상태였다. 

 

반면 김영삼은 유신체제에서도 계속 야당 국회의원과 총재로 활동했고, 5공화국 들어서도 가택연금과 정치활동규제에 묶이긴 했지만, 측근들을 내세워서 상도동계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1985년 신한민주당,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은 모두 김영삼계가 주도하고 살아남은 김대중계 일부 인사가 가담하는 형식이었다. 당연히 통일민주당 내에서 국회의원 후보와 당직 인선은 대체로 김영삼계 위주였다. 김대중계는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6월항쟁 이후 다가오는 대선과 총선에 대비해서 미조직 지구당을 창당하고, 지역조직을 정비해야 한다는 김대중의 제안을 김영삼이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서 회피하면서 불만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6월항쟁 직후 양김후보 단일화 문제가 불거지자, 어차피 둘 다 양보하지 않을 테니 경선을 하라는 제안도 나왔다. 하지만 이미 주요 지구당과 당직을 김영삼계가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당내 경선은 결과가 뻔할 것이라는 주장과 또 당내경선을 하게 되면 분명 정권의 돈을 앞세운 정치공작으로 당이 엉망진창될 것이라는 지적에 경선제안은 묻히게 된다. 이제 남은 것은 양김 간의 자발적인 합의인데, 이 또한 쉽지가 않았다. 물밑 협상은 지지부진 했고, 국회의원 후보 선정 문제까지 얽히면서 점점 양 세력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 분열의 결과는 역사가 말해주듯 절망적이었다. 결국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네 사람이 모두 나와도 결국 노태우가 김대중이 이기는 선거'인 4자 필승론은 김대중 후보를 탈당과 독자출마로 몰고 갔지만 결과는 처참히 빗나갔고, 당시 있었던 KAL기 테러 참사로 인해 보수 계층 표가 결집하여 상당수 지역에서 노태우 후보가 앞설 수 있었다. 독재 세력을 청산하고 민주 정부를 세우고자 했던 국민의 열망이 서로 먼저 대통령을 하겠다고 싸우던 야권에 의해 스스로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좌절감과 충격을 안겼다. 

 

▲ 3당 합당 이후 일어난 분신정국은 1987년과 달리 언론과 정치, 국민이 눈을 돌린 사건이었다. <사진제공=인디플러그> 

 

3당 합당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당선은 됐지만 낮은 득표율인 36.6%을 얻었을 뿐더러 이어진 13대 총선에서도 과반확보 실패로 여소야대의 국면을 맞으면서 힘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한국정치의 대격변이자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준 3당 합당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3당 합당의 배경은 이러했다. 여소야대 상황과 강해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정치권에도 자연스레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제도권 정치인 국회 운영에서도 항상 과반수를 차지하던 제1당 그러니까 집권 여당이 독식하던 국회 부의장과 상임위원장을 정당 의석수대로 배분하는 관례가 이때 처음 만들어졌고 모든 법률·예산 심사와 국회 통과가 여야 4개 정당의 협상으로 처리되었다. 4개 정당이 의석을 절묘하게 나눠가진 결과 어떤 정치 세력도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민주화 흐름을 타고 4.19 혁명 이후와 마찬가지로 남북통일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는가 하면 1989년 문익환 목사와 대학생 임수경 양, 소설가 황석영의 잇단 방북, 평민당 서경원 의원 방북 사건은 노태우 정권을 긴장시켰다. 이에 따라 재야와 운동권에서 일던 통일 논의도 공안정국을 조성해서 눌러버렸으며 더욱이 노태우 대통령은 선거 공약으로 중간평가를 제시한 상황이라 그야말로 정권은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에 노태우와 민정당은 이런 위기 상황을 한 방에 바꿀만한 해결책을 연구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합당을 통한 정계 대개편이었다. 1992년 차기 총선과 대선까지 지역 대립에 기초한 4당 구도가 계속 갈 거라고 본 사람은 드물었다. 4당 체제에 만족하는 정치인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야 3당도 그리 상황이 순탄한 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1990년 2월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면서 민주자유당이 탄생했다. 민주자유당은 나중에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등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총선에서 비롯된 여소야대는 도로 여대야소가 되었고,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유일한 원내 야당으로 남게 된다. 이후 4자 구도로 이어져 왔던 지역정치 구도가 순식간에 호남 대 非호남으로 단순화되면서 정치적으로 호남이 고립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 1991년 강기훈씨가 대신 썼다고 사법부가 판단했던 유서. <사진제공=인디플러그>     ©

 

유서 대필 사건

이렇게 3당 합당은 6월 항쟁 이후의 개혁적 분위기를 일거에 뒤집은 보수적 정치격변이었다. 이에 대해 학생운동권을 비롯한 재야세력, 야당(평화민주당)은 강하게 반발하였다. 심지어 당시 대학가에서는 80년대식의 거리시위가 재연되기까지 하였는데, 1991년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면서 시위는 더욱 확산됐다. 이로부터 두 달간 연쇄적으로 분신자살이 일어난다. 

 

이렇게 계속 분신자살이 일어나자 당시 서강대 총장인이었던 박홍 루카 신부는 "죽음의 블랙리스트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죽음의 세력, 어둠의 세력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그는 그 배후세력을 '전염병 같은 이들'이라 규정한 뒤 "이들은 그늘에서도 엄청난 힘을 갖고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이는 물귀신 공법으로 물 마시듯 폭력을 전염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유신정권에 맞서다가 감옥에 갔다온 이력이 있던 시인 김지하는 1991년 5월 5일에 조선일보에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해서 분신자살을 맹비난했다. 

 

이러한 발언들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검찰은 이에 호응하여 분신 조장 세력을 밝혀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1991년 5월 8일, 김기설 당시 전국민족민주연합(통칭 전민련, 진보연대의 전신) 사회부장이 서강대에서 분신자살했다. 그런데 그의 친구인 동 단체 총무부장 강기훈(姜基勳)이 유서를 대필해줬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이에 검찰은 바로 강기훈 씨에 대해 유서대필 등 자살방조 혐의로 압수수색 영장을 발급받아 강기훈의 필적을 입수하는 등 강기훈을 자살방조 피의자로 특정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또 검사 및 검찰 직원은 관례와 달리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방문해 필적 감정문건에 대해 설명했고, 국과수 직원은 "어떠한 감정을 원하느냐?"고 전화통화를 하기도 했다.

 

정치권도 이에 고개를 돌린다. 당시 평민당과 김대중 총재는 제1야당으로 책임감 있는 정치 세력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상당히 온건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대중은 공개적으로 평민당은 '온건 중도 정당'이라면서 급진적인 학생 운동, 전투적인 노동 운동과는 선을 그었다.

 

당시 국민들 사이에선 연속되던 분신자살에 '사정은 이해한다만, 그렇다고 저렇게 극단적으로까지 해야 하나'라는 회의론이 돌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는데, 마침 뉴스에서 학생이 친구를 도와 자살을 방조했다는 사건이 보도되자, 운동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결국 국민들이 등을 돌린 학생운동은 실패로 끝난다.

그리고 유서 대필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강기훈과 그의 주변인들은 결백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검찰에 의하여 자살방조죄로 기소된 강기훈은 1992년 7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 6개월이 확정된다.

 

▲ 1991년 유서대필 사건 이후 강기훈씨는 현재 작은 음악회에서 직접 기타를 연주하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사진 속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강기훈씨. <사진제공=인디플러그> 

 

현재진행형

영화 <1991, 봄>은 1991년 당시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지금까지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보여준다. 누군가는 세월호 참사를 “국가적 폭력과 무관심에 학생들이 희생된 것은 1991년이나 2014년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하며 희생자를 위한 이팝나무 숲을 꾸리는가 하면, 누군가는 1991년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 받은 후원금으로 작은 농장을 꾸려 생산물을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전하는가하면, 또 어떤 군대에서 벌어지는 의문사들에 대한 진상조사를 촉구하는 1인 시위를 진행하기도 한다. 

 

그리고 국가가 씌운 유서대필 사건의 누명의 장본인 강기훈씨는 ‘강기타’로 불리며 자신이 직접 기타를 치는 작은 음악회를 여는가 하면, 말기 암환자로 소소한 사진을 찍으며 삶을 살아간다. 

 

그는 영화 속에서 감독의 “얘기 좀 해달라”는 요구에도 “삶은 시시하게 살아야한다”고 말한다. 마치 자신이 억울하게 빼앗기고 누명을 씌워진 채 살아야했던 자신의 일상을 어떻게든 회복하려는 마음인 것 같아 관객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유서대필 사건의 조작을 담당했던 당시 사법기관에 있던 인물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초점을 맞춘다. 

 

먼저 유서대필 조작사건을 진두지휘했던 당시 강신욱 부장검사는 대구지방검찰청,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을 거쳐 대법관이 되었다. 대법관 지명과 청문회가 있던 당시 유서사건에 대한 질문에 “(강기훈 씨가 재판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면) 재심을 청구하면 될 일”이라고 답했던 강신욱 부장검사는 ‘2009 진실과화해위원회’가 재심권고 결정을 내리자 말을 바꿨다. “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사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난센스, 특정 단체가 입맛에 맞는 결론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에게선 잘못된 수사에 대한 사과나 미안한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강기훈 씨를 맞닥뜨리자마자 “'뽕쟁이'(마약사범)나 똑같은 놈”이라며, 모든 증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광기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던 신상규 주임검사(강기훈 최후 진술서 中)는 사건 이후 부장검사, 검사장 등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다. 잠을 재우지 않고 반복질문을 이어가는 밤샘 조사 때, 강기훈 씨를 못 자게 하는 역할을 맡았던 곽상도 당시 검사 역시 부장검사로 승진했다. 검찰을 나온 이후에는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 비서관을 지냈으며 2016년엔 국회의원에 출마, 낙선운동에도 불구하고 60.3%의 득표율로 대구 중구남구 국회의원으로 선출됐다.

 

사건 2심 판사였던 부구욱 판사는 2014년 TV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여전히 강기훈 씨가 범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이유로 유죄 판결 이후 분신 사건이 사라졌음을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판결 다음 해인 93년부터 2015년까지 33명의 분신자살이 있었다. 부구욱 판사는 청주, 인천, 서울중앙지방법원의 부장판사를 역임하고 현재 영산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김기춘 또한 사건 이후 제15, 16, 17대 3선 국회의원을 지내고 2013년에는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비서실장으로 발탁됐다. 현재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재구속된 상태다. 

 

penf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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