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비행단장실에서 만나 회의…거기서 사살명령 하달
“전두환 사령관, 광주 왔다는 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
JTBC는 3월14일 “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39년 만의 ‘첫 증언'” 제하의 기사에서 김용장 전 주한미군 방첩 정보요원의 증언(부제=광주 전투비행단서 모여 회의…발포명령 정황 뚜렷)을 보도했다. 이 프로에 출연한 김용장 전 주한미군 방첩 정보요원은 “전두환씨(당시 보안사령관)가 그 당시(1980년) 5월21일 낮. 그러니까 한 점심시간쯤에 헬기를 타고 광주에 왔다”고 증언했다. 1980년 5월21일은 광주 민주화 항쟁 당시 계엄군이 발포한 날. 김용장씨는 “이미 거기(광주 505보안부대)에 와서 대기하고 있었던 정호용 특전사령관, 505보안부대장 이재우 대령 그리고 또 한 분이 계셨는데요. 그분이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마는, 그분들이 전투비행단장실에서 만나서 어떤 회의를 했고 그리고 거기서 사살 명령이 하달됐다고 그렇게 보고(미군 상부)를 했다”고 폭로하면서 “광주에 왔다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김용장씨의 증언은 “광주학살 발포 당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헬기를 타고 광주에 왔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사건발생 이후 39년 만에 광주 발포 명령자로 지목된 이상, 사실을 밝히기 위한 정치·법조계의 사실추적 작업이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전두환은 ‘광주 학살자’로 인생을 마감할지도 모르는 아주 절박한 순간에 도달했다.
▲ 김용장 전 주한미군 방첩 정보요원은 3월14일 JTBC <뉴스룸>과의 인터뷰에서 “전두환씨(당시 보안사령관)가 그 당시(1980년) 5월21일 낮, 그러니까 한 점심시간쯤에 헬기를 타고 광주에 왔다”고 폭로했다. <사진은 JTBC 스포트라이트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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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뉴스룸>을 진행하는 손석희 앵커는 김용장씨를 향해 먼저 “당시에 미군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던 것인가요. 미군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다고 제가 소개는 해드렸는데요”라고 질문했다.
“움직일 수 없는 사실”
이에 김용장씨는 “제가 광주에서 근무를 했었는데요. 미국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정보를 입수해서 보고를 했습니다”라고 답했다. 김씨는 이어 “이건 내 주장이 아니고 우리 정보원을 통해서 받은 정보를 보고를 한 것입니다. 나는 지금 앞으로 어떤 얘기를 해도 제가 개인적인 추측이나 제 의견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제가 보고했던 내용만을 얘기를 합니다”라고 피력, 자신의 증언이 ‘사실’임을 전제로 했다.(이하 -앵커의 질문, ▲김용장씨 답변)
-그렇습니까? 그러면 거기서 발포 명령이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취득을 하셨습니까?
▲그 정황으로 봐서 그렇습니다. 그분이, 전두환씨가 서울로 귀환한 뒤 바로 발포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도 정황이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아까 그렇게 말씀을 드렸던 거고요. 일단 알겠습니다. (5월)21일에 전두환씨는 당시 용산에서 있었던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주장이고 그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건 어떻게 할까요? 그러니까 ‘오전 11시에 서울 용산구 국방부회의에 참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그것으로 지금까지 ‘광주에 내려가지 않았다’는 것의 근거로 삼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손석희 앵커는 “저는 그 기록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광주에 왔다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건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건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대표적으로 어떤…인터뷰를 풀어가도록 하죠, 그러면. 제가 듣기로는 그렇게 보고를 해서, 매우 중요한 보고를 했다는 것으로 표창도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무튼 알겠습니다. 제가 가장 지금 궁금한 것은 5월21일에, 그러니까 1980년 5월21일에 전두환씨가 광주를 찾은 것으로 증언을 해주셨는데 이건 지금 39년 동안 계속 전두환씨는 그날, 즉 광주 민주화 운동이 진행되던 그 기간 동안에 광주를 가지 않은 것으로 돼 있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굉장히 중요한 증언이 됩니다. 그 당시 상황을 좀 전해주시겠습니까?”라고 질문을 이어갔다.
그러자 김용장씨는 단호하고 준엄한 어조로 “전두환씨가 그 당시 5월21일 낮. 그러니까 한 점심시간쯤에 헬기를 타고 광주에 왔습니다”라고 답했다.
아래는 이 증언의 주요한 질의응답 내용이다.
▲ 1980년 5·18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장군. © 펜그리고자유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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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도청 앞 사살행위
-헬기를 타고?
▲그렇습니다. 이미 거기에 와서 대기하고 있었던 정호용 특전사령관, 505보안부대장 이재우 대령 그리고 또 한 분이 계셨는데요. 그분이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마는 그분들이 전투비행단장실에서 만나서 어떤 회의를 했고 그리고 거기서 사살 명령이 하달됐다고 그렇게 보고를 했습니다.
-사살 명령이요?
▲그렇습니다. 이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전두환씨가 헬기로 서울로 돌아간 이후에 바로 광주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 사살 행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걸로 봐서 거기서 전달이 됐다고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어떤 근거자료가 있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고 거기서 사살 명령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발포 명령이 있었다는 것은 김용장 선생님의 추측이죠?
▲아니, 추측이 아니고, 이미 저는 그걸 보고를 했기 때문에 이미 모든 정황으로 봐서 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미군 당국에 그 내용을 보고하셨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미군 당국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미국 당국의 어떤 반응은 없습니다. 우리가 보고서를 내면 그 보고서가 우리 본부로 올라가고, 그 본부에서 우리 INSCOM이라고 정보보안사령부 그쪽으로 보내면 거기서 다시 미 국방본부로 와서 일부는 CIA로 들어가고 일부는 백악관으로 들어가고 이렇게 해서 거기서 배포가 됩니다.
플라이트 플랜(Flight Plan)
-그런데 이건 여러 가지 좀 따져봐야 될 문제인데요. 왜냐하면 그렇게 된다면 근거자료가 기록으로 남아 있을 것이고, 그러니까 보고 내용이. 그건 지금 공개가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조사를 통해서 그것은 확인을 해봐야 되는 문제인데. 일단 여기까지만…
▲그건 얼마든지 확인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헬기가 출발을 하면 기록이 남습니다. 그것을 갖다가 플라이트 플랜(Flight Plan)이라고 해서 비행계획서라는 게 있습니다. 전두환씨가 헬기를 타고 어디로 출발했다고 하면 비행계획서, 영어로 말하면 플라이트 플랜(Flight Plan)인데요. 그건 절대 남게 돼 있습니다. 그건 도착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따져보면 바로 나옵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두 가지를 말씀해 주셨는데요. 5월21일 점심경에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 그리고 505보안부대장인 이재우 대령 등이 모여 있는 광주전투비행단장실에 전두환씨가 도착을 해서 있었고, 아마도 거기서 발포 명령을 한 것 아니냐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것을 미군 당국에 보고를 해주셨다고 했는데, 그건 사실 지금 저희한테 어떠한 근거자료가 있지는 않기 때문에 일단 이 시간에는 김용장씨의 주장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이건 내 주장이 아니고 우리 정보원을 통해서 받은 정보를 보고 한 것입니다. 나는 지금 앞으로 어떤 얘기를 해도 제가 개인적인 추측이나 의견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제가 보고했던 내용만을 얘기를 합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거기서 발포 명령이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취득을 하셨습니까?
▲그 정황으로 봐서 그렇습니다. 그분이, 전두환씨가 서울로 귀환한 뒤 바로 발포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도 정황이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아까 그렇게 말씀을 드렸던 거고요. 일단 알겠습니다. 21일에 전두환씨는 당시 ‘용산에서 있었던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주장이고 그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건 어떻게 할까요? 그러니까 ‘오전 11시에 서울 용산구 국방부회의에 참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그것으로 지금까지 ‘광주에 내려가지 않았다’는 것의 근거로 삼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전부 다 말을 하고 나니까
-‘5월21일 국방부 회의 참석’ 기록 어떻게 보나.
▲저는 그 기록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광주에 왔다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건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건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인이 혹시 직접 보셨습니까?
▲우리 사무실과 단장실의 거리는 약 1km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에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연락을 받았습니다.
-누구에게 연락을 받으셨습니까?
▲우리 정보원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당시의 정보원이 직접 보고 그러면 연락을 했다는 얘기인가요?
▲그렇습니다.
-그 정보원은 지금 생존해 계십니까?
▲지금 살아 계실 겁니다.
김용장씨는 5·18 첫 증언을 결심한 이유와 관련 “지금 처음입니다. 아직까지 어떤 언론사가 저한테 인터뷰를 요구한 적도 없었고 제가 자진해서 양심선언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정보기관에서 근무하다 보면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에 있는 언론기관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심지어 저는 JTBC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래도 공신력이 있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언론이 바로 JTBC입니다. 그래서 JTBC가 한 번 이 일을 그래도 차선책이나마 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제가 했고요”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래도 증인들이 살아 있는 동안 광주에 대한 진상이 이루어져야지 우리가 만약에 죽고 나면 그 일을 누가 하겠는가. 지난 39년 동안 제가 가지고 있는 십자가는 굉장히 크고 무거웠습니다. 이제 제 개인적으로도 이걸 내려놓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부 다 말을 하고 나니까 제 개인적으로 굉장히 마음이 그야말로 가볍고 참 편합니다”라고 덧붙였다.
김용장씨는 “지난 39년 동안에 제가 가지고 있는 십자가는 굉장히 크고 무거웠다”면서 “이제 개인적으로도 이걸 내려놓고 있다. 이렇게 전부 다 말을 하고 나니까 제 개인적으로 굉장히 마음이 그야말로 가볍고 편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한미군 방첩 정보요원의 근무 규칙에는 취득한 정보의 외부 발설을 금하고 있다. 근무할 때나 그 기관을 떠나 민간인이 됐을 때도 마찬가지다.
발포 명령자 전두환 지목
그런데 그가 한국 언론을 향해 1980년 광주 민주화 항쟁 때 광주시민 학살을 했던 발포 명령자로 전두환씨를 지목, 증언을 한 것은 아주 특별한 일로 보인다. 그 당시 사건과 관련 비밀해제가 임박, 미군 내부의 재가가 이루어진 것에 따른 것이라는 조심스런 예측을 해볼 수도 있다.
미국 정부는 1960년 이승만 당시 대통령을 하와이로 망명시켜, 한국 국민과의 관계를 차단·단절시켰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전두환 광주학살 발포 명령자 지목은 마지막으로 전두환을 버리는 카드로 의미할 수도 있다.
moonilsu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