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권의 장편소설 몽키 하우스 제1부 <5> 붉은 여자 & 짝퉁

“신사숙녀 여러분, 코리아 채플린 쇼 시작되겠습니다!”

글/김영권(소설가) | 기사입력 2019/07/05 [09:07]

김영권의 장편소설 몽키 하우스 제1부 <5> 붉은 여자 & 짝퉁

“신사숙녀 여러분, 코리아 채플린 쇼 시작되겠습니다!”

글/김영권(소설가) | 입력 : 2019/07/05 [09:07]

악단 연주가 퇴폐 음조로 바뀌자 쭉 빠진 진홍의 무희 등장
꽃뱀처럼 춤을 추던 그녀는 슬며시 춤옷 윗도리 벗어 던지고

 

패티 킴은 패티 페이지, 최희준은 냇킹 콜, 위키 리는 바비 달린
미8군 무대 가수는 독창적 재능보다는 미국 연예인 똑같이 모방

 

▲ 대구 왜관의 기지촌 클럽 이야기가 등장하는 영화 ‘고고 70’ 한 장면.    

 

“이게 얼마만이냐, 응?”


피에로는 신기스럽다는 눈빛으로 청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마 2년이나 3년쯤 됐을까, 근데 형은 왜 이곳으로 왔어?”


“바람결에 떠도는 방랑 인생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겠냐. 어쩌다 보니 그냥 왔지. 하지만 무슨 환락을 찾아 술집에 온 건 아니란다. 진흙 속이라 해도 연꽃 씨 같은 꿈은 가슴에 품고 있지 않겠냐. 나도 너도… 청량리 풍전 홀에 들어간 것도 어떡하든 무대에 서서 대배우로 성공하고픈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지. 하지만 예술의 신께 기도하며 온갖 궂은 잡일을 맡아 했지만 내게 무대는 너무 높기만 하더라. 아무리 한물 간 연예인이나 추문에 휩싸인 배우라도 밤무대에서는 오히려 더 주가가 높고 기고만장하는 세상이더군. 여기로 온 건 일단 잠시나마 무대에 설 기회가 주어진다는 얘길 들었기 때문이야. 혹시 잘되면 미8군 쇼 무대에도 설 기회가 있다니까. 그럼 성공의 문이 서서히 열리는 거지, 흐흣….”


“아, 그렇구나. 난 또 괜히 이상스런 걱정을 했네, 헤헤… 그럼 오늘 밤에도 형이 무대에 나가 연기를 하는 거야?”
“응, 그래. 좀 있다가 야밤에….”


“아까 분장실에서 보니까 유명한 연예인도 몇 사람 있던걸.”
“아, 그 사람들은 오리지널이 아니고 짝퉁이야.”


“응?”
“흉내를 내는 거지. 배삼융, 서영촌, 고붕서, 너혼아, 남징, 일미자, 문주린 등등 참 많다. 다들 이 바닥에서 살아남아 보려고 발버둥치는 거지.”


“아까 그 못생긴 추남 아저씬 누구야?”
“아, 그 형… 이주일이란 예명으로 뛰는 코미디언 형인데… 생김새는 그래도 마음씨는 착한 사람이야. 무대에서는 늘 단역 신세지만, 짝퉁 흉내를 내지 않고 자기 나름의 스타일을 창출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중이지. 하긴 흉내 내려야 흉내 낼 만한 대상도 없으니까 뭐. 흐흣….”


둘은 다시 잔을 쨍 부딪치곤 술을 들이켰다.


“잠깐 갔다올게.”


피에로는 헤벌쭉 하회탈 같은 미소를 짓고 나서 어디론가 바삐 사라졌다.

 

“여긴 한국인 출입금지 구역”


그때 어떤 짝퉁 가수의 노래가 끝나고 음악이 한결 리드미컬하게 변조되었다.


홀 앞쪽의 무대엔 붉은 춤옷 차림의 여자가 올라서고 있었다. 촘촘하게 장식된 수백 개의 진주 구슬이 색색가지로 반짝거렸다. 그 댄서가 리듬에 맞춰 상체를 살랑살랑 흔들기 시작하자 색색가지 구슬들이 현란히 빛나며 쭉 빠진 몸매를 한층 더 도드라지게 했다. 그녀가 입술 새로 요염한 미소를 흘리며 아랫도리를 율동적으로 열띠게 흔들어대자 요란스런 고함과 휘파람 소리가 잇달아 흘러나왔다.


청운은 문득 놀랐다. 무대 위에서 붉은 빛을 흩뿌리며 춤추는 댄서가 아까 길을 안내해 준 ‘붉은 여자’ 같았던 것이다. 화장을 진하게 한 하얀 얼굴과 붉은 빛이 도는 긴 머리카락… 청운은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살펴봤으나 곧 커다란 미군들이 무대 앞으로 바짝 다가들어 광란적으로 함께 춤추기 시작했기 때문에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청운이 맥주를 마시고 잔을 탁자에 놓는데 어떤 이상스런 사내가 다가와 섰다.


“손님, 여긴 한국인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이방인은 여기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한국 사람이 이방인이라구요?”


청운은 놀라 반문하며 사내를 쳐다보았다. 중절모를 쓰고 눈이 엄한 빛을 띠었으며 코 밑에 히틀러 같은 수염을 달고 있었다. 검은 윗도리의 소매가 좀 짧아 손목이 드러난 팔에 필살 무기인지도 모를 지팡이를 건 모습이었다.


“손님, 저급한 민족은 강하고 고급스런 종족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뜻과 달리 추방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현대는 단일민족이 아니라 단일한 이념과 생각에 의해 하나의 강하고 아름다운 나라만이 지구에 존재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아름다운 나라… 혹시 미국?”
“네, 맞췄습니다. 헤헤….”


사내가 미소를 짓자 엄숙하던 히틀러의 얼굴이 서서히 해학적인 채플린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주름살과 앞니 빠진 모습 때문이랄까.


“그럼 답을 맞춘 상으로… 여기 앉아 주지육림을 즐기는 아름다운 나라 미국 군인들을 눈앞에서 생생히 구경하는 특권을 드리겠습니다.”
“피에로 형, 연기를 꽤 잘하는걸.”


“벌써 눈치챘니?”
“긴가민가하면서 속아주는 척한 거지 뭘.”


“짜식이… 이 위대한 미래의 대배우를 무시하면 안 된다구.”
“아냐, 정말 깜짝 놀랐어.”


“괜찮아. 내가 아무리 채플린을 좋아한다고 해도… 어찌 짝퉁 배우가 인생의 목표겠냐. 나도 모방이 아닌 나만의 조선 방랑자를 창조해 내고 싶어. 꼭 그럴 거야.”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 그래서 코리아 피에로의 한 많은 목소리와 몸짓으로 선감도 수용소의 비극을 보여주고, 이 특이한 이방 지대의 이야기도 조선 어릿광대의 눈으로 보고 들려 주면 관객들은 감동을 받을 거야. 나중에 내가 또 스릴 넘치는 체험을 얘기해 줄게.”


“뭔데? 무척 궁금한걸.”
“나중에 천천히… 그건 그렇고 무대 위에서 춤추는 저 여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미국 녀석들 혼을 흔들어 주고 있구먼.”


“히히, 아주 홀딱 빼놓기도 하지. 좀 있으면 특별 쇼를 시작할 테니 앉아서 구경해. 그 다음에 내가 무대에 설 차례라 미리 가서 준비를 좀 해야 하거든. 재미없더라도 비웃지나 말고 나중에 충고해 줘.”
“응, 알았어. 잘해!”


피에로는 특유의 미소를 짓곤 서둘러 사라졌다. 그런 와중에도 지팡이를 슬슬 흔들며 발이 삐딱삐딱 꼬이는 우스꽝스런 걸음을 연습하고 있었다.

 

▲ 큰 무대를 꿈꾸던 상규는 입영통지서를 뒤로 하고, 자신을 동경하는 가수 지망생 미미를 이끌고 무작정 상경한다. 사진은 영화 ‘고고 70’ 한 장면.    

 

쭉 빠진 진홍의 무희


‘꿈을 위해 건배!’


청운은 혼잣소리로 중얼거리곤 술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홀과 무대 위의 모습이 유리잔의 볼록한 한 면에 축소되고 응집돼 비쳤다. 붉은 무희의 머리카락과 하얀 얼굴, 춤옷에 달린 무지갯빛 구슬들이 서로 교차하며 앙증맞게 반짝였다.


청운은 어릴 때 술에 취한 아버지가 보여준 만화경이나 요지경 속의 모습을 감상하듯 가만히 주시했다. 그녀는 신비로운 비밀을 지닌 동화 속의 인형같았다.


어느 결에 악단의 연주가 고즈넉하고 애조 띤 음조로 바뀌었다. 휘황하던 조명이 흐릿해졌다. 무대 앞 플로어에서 광적으로 몸을 흔들어대던 거대한 사내들이 하나 둘 자리로 돌아가 앉아 술을 마셨다. 부나비처럼 날아다니는 여자들 중에 제 취향에 맞는 아가씨를 꿰어 찬 채. 사람의 얼굴을 가진 그 나비들은 향기가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끌려 살포시 앉았다.


진홍의 무희는 무대 뒤로 사라지지 않고 석상인 양 가만히 서 있었다. 언젠가 제주도의 외딴 바닷가에서 본 적이 있는 검붉은 석회암 인어상 같았다. 마치 파도가 밀려오듯이 악단의 연주가 은은하면서도 퇴폐적인 음조로 바뀌자 진홍의 무희는 쭉 빠진 몸매를 감질나게 흔들며 미소지었다. 무대 위의 조명은 이미 어둑하게 바뀐 가운데 찬란한 무지갯빛이 빙글빙글 돌며 그녀에게로만 비쳐 어느 천상계의 선녀 같아 보이게 했다. 꽃뱀처럼 리드미컬하게 춤을 추던 그녀는 슬며시 춤옷 윗도리를 벗어 옆으로 내던졌다.


상체를 슬쩍 비틀자 망사 브래지어에 감싸인 젖가슴이 출렁거렸다. 위쪽을 향해 솟은 도발적인 유두가 견디다 못한 양 비어져 올랐다. 어디선가 쩝쩝 하고 빨아대는 소리가 났다. 술잔을 빠는지 옆에 앉은 여자의 입술이라도 빠는지….


무희는 애조 띤 한 줄기 트럼펫 소리에 따라 느릿느릿 몸을 꼬면서 아랫도리 허울마저 벗어 내렸다. 팔등신의 매끄러운 몸매가 에로틱하게 꿈틀거리자 여기저기서 괴성과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달러 또는 군표로 접은 종이 비형기가 무대를 향해 막 날아갔다. 맥주병을 입으로 가져가 꿀꺽꿀꺽 마신 어느 흑인은 병 입구에 입김을 휘휘 불어 애잔한 곡조를 자아내더니 그 맥주병 주둥이가 옛 고향 애인이라도 되는 양 쪽쪽 빨아댔다.

 

미국 본토 연예인 짝퉁


잠시 후 막이 다시 열리고 무대 위엔 위대한 미래의 대배우 피에로가 등장했다. 막이 열렸다기보다 피에로 스스로 살며시 젖히고 상체를 내민 뒤 구멍 속의 쥐새끼처럼 이쪽저쪽 둘러보다가 불쑥 튀어나왔다는 게 사실에 가깝긴 하지만….


피에로는 마이크를 빼들고 입으로 가져가 백남봉이나 남보원이 하듯 원맨쇼를 펼치기 시작했다. 긴 휘파람 소리는 대포알이나 미사일이 멀리 날아가는 것을 묘사하는 성싶었다. 이어 폭발하는 소리가 꽤나 요란했으나 앞니가 빠졌기 때문인지 더러 불발탄 같은 싱거운 소음도 섞였다. 그래도 피에로는 열심히 성대 묘사를 해 나갔다.


“드드드드… 타타타타타… 피융 피융… 으윽,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 제군들은 삼천리 금수강산과 한민족을 위해 사즉생의 정신으로 싸워 달라… 드르륵 드르륵 콰쾅… 으흑, 나는 피눈물을 머금고 가네… 소련 놈한테 속지 말고, 미국 놈들 믿지 말고… 참다운 자주 독립과 해방 세상을 이뤄다오….”


마지막 말은 불분명해서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저 피에로 형은 뜬금없이 왜 저런 소릴 지껄이고 있을까, 하고 청운은 고개를 저었다.


‘무대에서 저런 덜떨어진 헛소릴 왜 하는 거야? 더군다나 대부분의 관객이 미국 군인인 판에 누가 그런 이상스런 소릴 알아먹겠느냐구, 응?… 가만 있자, 혹시 미군들이 알아먹지 못하게 일부러 그런 대사를 늘어놓은 건 아닐까? 흠,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그건 이 홀에선 아무런 메아리도 없고 의미도 전달되지 못하는 독백에 불과하지 않느냔 말야.’


청운의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피에로는 지팡이를 빙빙 돌리며 한국 말로 계속 지껄였다.


“신사 숙녀 여러분!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코리아 채플린 쇼가 시작되겠습니다! 자, 박수로 환호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박수 소리는 별로 나지 않았다. 그 대신 검푸른 장막을 젖히며 한 아가씨가 무대로 툭 뛰어나왔다. 장막 위쪽에 매달린 별들이 흔들리며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무명 저고리에 검정 치마 차림인 그녀는 한쪽 팔목에 꽃이 가득 담긴 대바구니를 걸고 있었다. 아담하고 가냘파 보이는 몸매였다.


그녀는 한숨을 폭폭 내쉬며 종종걸음으로 이리저리 거닌다. 무슨 큰 고민거리라도 있는 모양이다. 급기야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늘 향해 빌며 기도를 드린다.


그때 방랑자 채플린이 지팡이를 빙빙 돌리며 지나간다. 꽃팔이 아가씨는 마치 그가 하느님이라도 되는 양 우러러보며 꽃 한 송이만 팔아 달라고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한다. 무언극이라 말은 없지만 무수한 말보다 더 애절해 보인다.


채플린은 콧수염을 움찔거리며 고민스런 표정이다. 그러더니 천천히 아가씨를 일으켜 세워 정겨운 미소를 짓는다. 아가씨가 안도의 숨을 쉬자 그는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곤 뭔지 한동안 속삭인다. 아가씨는 좀 놀란 눈으로 머뭇거렸으나 채플린의 재촉에 못 이겨 결국 한 발짝 두 발짝 무대 앞쪽으로 걸어 나간다. 그러고는 대바구니에서 조화(造花) 같은 장미와 동백꽃을 집어들어 미군들을 향해 공손히 던졌다. 키스를 함께 담아….


반응은 별 신통찮았으나 동전 몇 개가 무대 바닥으로 되돌아오긴 했다. 꽃팔이 아가씨는 몸을 굽혀 그걸 주웠다. 그리고 콧노래를 여리게 흥얼거리며 일어서는 순간 채플린은 갑자기 뒤돌아서며 음흉한 히틀러의 웃음을 흘린다. 어느 새 그의 머리 위엔 낡아 빠진 방랑자의 모자 대신 금빛 별이 달린 대원수의 군모가 얹혀 있다. 히틀러는 독사 같은 눈으로 아가씨를 노려본다. 그녀가 흐느끼며 마지못해 동전을 건네주자 히틀러는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레 웃곤 꽃팔이의 야윈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삐딱삐딱 걸어 장막 뒤로 사라진다.


홀의 관객들 속에서는 야유가 흘러 나왔다. 아무래도 히틀러의 사악함을 질타하기보다는 짝퉁 채플린의 연기에 실망한 나머지 내는 소리가 아닌가 싶었다.

 

미8군과 GI 문화


6·25 전쟁은 미국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한국에 상륙하는 계기가 되었다. 휴전 이후 한국에 미군이 대규모로 주둔하게 되면서 소위 ‘GI 문화’가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의 미군 주둔 캠프가 있었고 그곳에는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클럽이 있었는데 그곳 무대가 미8군 쇼 무대이고 여기에서 연주하거나 노래하는 이들을 미8군 연예인이라고 불렀다.

 

미8군 쇼는 노래, 춤, 코미디, 마술 등이 가미된 버라이어티 쇼의 형태를 취했기에 악단, 가수, 무용수, 코미디언이 모두 포함된 쇼단을 구성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봉조의 할리우드 쇼, 김희갑의 에이원 쇼, 베니 김(김영순)의 베니 쇼, 송민영의 토미아리오 쇼, 박성원의 블랙 아이스 쇼, 김동석의 웨스턴 주빌리 쇼 등이 당시 활동한 미8군 쇼단들이었다.

 

미8군 무대는 1960년대 전반기에 전성기를 누리고 베트남전쟁이 발발하면서 쇠퇴했지만, 한국 대중음악에 깊은 영향을 행사했다.


이들은 분기별로 용산의 USIS라는 곳에서 공개 오디션을 거쳐 실력을 인정받아야만 무대에 설 수 있었다. 오디션에서 부여받은 레벨은 음악인의 가치이며 거기에 근거해 실력자들은 충분한 보수를 보장받았다.


미8군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왕도는 없었다. 최신 레퍼토리를 입수해 끊임없이 연습함으로써 실력과 흥행성을 배가하는 길이 유일했다. 악보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기에 미군 라디오 방송을 녹음하고 최신 음반을 입수해 일일이 채보하면서 소속 용역회사 창고에서 지지리 연습했다.


미8군 쇼가 긍정적인 영향만 끼친 건 아니었다. 비록 불모지인 연예계에 물줄기를 불어넣고 끼 있는 연예인을 발굴하는 역할을 일정 정도 했지만 한국 고유의 정서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미8군 무대에 선 가수나 코미디언들은 독창적인 재능보다는 미국 본토의 인기 연예인을 가능한 만큼 똑같이 모방할 때 훨씬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패티 킴은 패티 페이지를, 하숙생 최희준은 냇킹 콜을 모창했고, 위키 리는 바비 달린을 모방해 인기를 얻었다. 누구는 봅 호프를, 또 누구는 프랭크 시내트라를, 누군가는 제임스 딘을, 그리고 재기발랄한 김상국조차도 루이 암스트롱을 흉내내야만 계속 무대에 설 수가 있었다.


그들은 예인으로서의 독창성과 자부심보다는 미국 본토에 있는 오리지널의 이미지를 그럴 듯하게 복사(capy)함으로써 가치를 인정받는 신세였다.


그들이 한국에서 유명짜한 밤무대 가수로 뛸 때 미8군 무대에서의 경험과 인기는 실력의 기준이 되었다. 그 자신 유명한 미국 개그맨을 모방하는 밤무대의 사회자가 출연자를 ‘미8군 출신!’이라고 소개하면 현란스러운 홀은 금세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일단 퇴장했던 피에로는 곧 무대 위에 다시 나타나 능글능글한 목청으로 다음에 등장할 여가수를 뻥튀기로 소개하곤 내빼 버렸다.


이국적인 얼굴에 키가 후리후리한 패리 킴이 나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티브이에 자주 출연하는 패티 킴과 비슷한 모습에 똑같은 창법이었으나 참된 기운이 부족한 짝퉁의 모창이었다. 그런 대로 향수를 자극했기 때문인지 환호성이 일었다.


홀 여기저기서 술잔 부딪치는 소리와 남녀가 서로 껴안은 채 쪽쪽 빨아대는 소리가 났다. 먼 이국땅에서 온 사내들은 작고 분단된 코리아의 여인들에게서 모정을 느끼는 것일까? 혹은….


<다음 호에는 ‘동백꽃’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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