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권의 장편소설 '몽키 하우스' 제2부 <2> 대니 보이

성탄절에 텍사스클럽 양색시가 처참한 꼴로 살해당했다

글/김영권(소설가) | 기사입력 2019/08/02 [10:10]

김영권의 장편소설 '몽키 하우스' 제2부 <2> 대니 보이

성탄절에 텍사스클럽 양색시가 처참한 꼴로 살해당했다

글/김영권(소설가) | 입력 : 2019/08/02 [10:10]

어둑한 뒤쪽 계단에서 건장한 흑인이 한 여인의 목을 조르고…
놈은 고릴라처럼 씨근벌떡거렸고 여자는 벗어나려 애를 썼지만

 

곱던 얼굴은 얻어맞아 시퍼렇게 멍들고 부어올라 못 알아볼 정도
유방 잘려나간 데다 음부엔 콜라병 깊이…항문에는 우산 찔러넣어

 

▲ 미군 달러가 지배하던 시절부터 이태원에서 살아온 세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이태원’ 한 장면.  

 

청운은 어딘지도 모를 천왕산 기슭의 고향 마을에 살던 어린 시절, 양공주라고 욕을 먹던 어떤 누나를 본 적이 있었다. 여름날 매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걷고 있는데, 허물어져 가는 산기슭 오두막집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여자가 살며시 이름을 불렀다. 민들레 홀씨를 불어 날리며 청운을 향해 살풋 미소 지었다.


청운은 주춤주춤 다가갔다. 뱀영감집 딸 선애 누나였다. 두어 해 전쯤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던 그 누나…. 서글서글한 눈과 앵두 같은 입술로 방긋 웃곤 하던 그녀는 청운을 친동생인 양 귀여워해 주었다. 땡깔(꽈리)을 입속에 숨긴 채 개구리 소릴 내어 어린 청운을 놀리며 까르르 웃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집이 가난한 데다 엄마인 뱀영감댁 아지매마저 병으로 앓아누워 골골거리는 형편이라 선애 누나의 해쓱한 얼굴엔 문득문득 수심의 그늘이 어리곤 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청운은 그런 애슬픈 모습이 왠지 더 정겹고 고와 멍하니 쳐다보았다. 스스로 내심 외로웠기 때문일까.

 

“양놈한테 맞고 쫓겨나 저 꼴”


어느 날 저녁, 서녘하늘에 진 노을을 홀로 바라보던 청운은 탱자나무 무성한 골목을 지나다가 누나네 집으로 들어섰다. 흐릿한 등불이 비친 낮은 마루에서는 세 식구가 웅크려 앉아 저녁밥을 먹고 있었다. 낡아빠진 상 위엔 꽁보리 밥과 된장찌개만 놓여 있었다.

 

선애 누나가 부엌으로 들어간 사이 청운은 누나의 숟가락을 들고 밥을 살짝 떴다. 쌀알 하나 없는 완전한 보리밥은 푹 불려서 그런지 문들문들했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가난을 모르던 청운은 쌀밥보다 훨씬 별미라고 생각하며 된장으로 비벼 맛나게 먹었다.


뱀영감은 원래부터 땅꾼은 아니었다. 꽤 부지런한 농사꾼이었는데, 아지매의 병에 뱀이 특효약이란 소릴 듣고선 매일 뱀을 잡으러 다녔다. 하지만 아지매가 차라리 죽는 게 뱀탕을 먹느니보다 낫다며 상을 잔뜩 찡그린 채 거부한다는 소문이었다. 그래서 뱀영감이 대신 먹곤 그 기운을 전해주기 위해 아지매를 껴안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병이 낫긴 커녕 더 심해지고 있다는 얘기만 나돌았다. 영감님은 성이 백씨였는데, 뱀탕 때문인지 어쩐지 평소에도 늘 불그레한 얼굴로 혀를 날름날름했기에 동네 사람들은 뱀영감이라고 불렀다. 영감이 술을 한잔 들이켠 불콰한 얼굴로 능글맞게 웃으며 부르면 청운은 슬슬 도망치곤 했었다.


선애 누나가 고향 마을을 떠난 건 뱀영감이 중풍에 걸려 반신불수가 된 후였다. 그래도 대여섯 달 동안 지극정성으로 부모님 병수발을 한 덕에 뱀영감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약값은 물론이고 조석 끼니마저 제대로 댈 수가 없는 형편인 모양이었다. 병석에 누운 엄마와 반신불수인 아버지를 두고 선애 누나는 어느 날 홀연 떠나 버렸다. 무정하게….


그 누나가 왜 저기 저런 모습으로 앉아 있는 걸까? 과연 선애 누나가 맞는 걸까? 청운은 의심스러워하면서도 점점 더 다가섰다. 길고 앙상한 팔이 뻗어 오더니 청운을 끌어 꽉 껴안았다. 전에 품에 안길 때와는 달리 허전하고 구슬픈 느낌이었다. 그 향긋하던 몸내음도 이젠 없었다.

 

더구나 누나는 어린 청운이 의지할 기둥이라도 되듯 얼굴을 숙인 채 어깨에 기대며 뜻 모를 소릴 중얼대는 것이었다. 몸을 파르르 떨면서 울먹거리다가 갑자기 미친 여자처럼 깔깔 웃기도 했다. 청운은 힘에 겨웠지만, 옛 누나와 지금 누나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대로 꼭 안아주려고 애를 썼다.


지나가던 국민학생 형들이 양갈보니 뭐니 하며 저들끼리 히히덕거렸다. 그건 아마 부모로부터 들은 얘기일 터였다. 동네 어른들도 ‘미친 년…양색시 짓 하다가 양놈한테 맞고 쫓겨나 저 꼴이 됐다나 어쨌다나…’ 하고 쑥덕거렸다.

 

그 당시엔 문둥이들이 간혹 나타나 구걸을 하곤 했는데, 천형 받은 죄인이라며 천대하던 그들보다 오히려 양갈보를 더 사갈시했다. 서러운 눈물이 흘러내리는 선애 누나의 빛 잃은 큰 눈을 청운은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 대니 보이’


음악 소리가 경쾌하게 바뀌고 미군들이 내지르는 환호성과 휘파람으로 인해 청운은 추억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과연 어느 쪽이 추억이고 어느 쪽이 현실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미군들과 함께 어울려 있는 홀의 여자들이 잃어버린 먼 고향의 선애 누나와 겹치곤 했다. 양갈보라는 생소한 이름 앞에서…. 그녀들은 모두 부모가 지어준 본명을 지우고 익명의 요녀로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이다. 미란, 애희, 정아, 메리 킴, 신시아 같은 가명은 그녀들의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 여자가 장막을 젖히며 무대 위로 물 흐르듯 걸어나왔다. 진홍색 춤옷 차림의 댄서였다. 흑백 미군의 환호성에 대해 그녀는 요염한 미소를 던지며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전처럼 붉게 물들이지 않은 검은 생머리채가 율동적으로 나부꼈다. 그녀는 재즈 곡조에 맞춰 진홍 요정인 양 춤을 추었다. 천장에서 오색 미러볼이 빙빙 돌며 그녀의 드러난 흰 살갗에 몽환적인 빛무늬를 그렸다. 어찌 보면 한 마리 화사(花蛇)처럼 매혹적인 몸놀림의 춤사위였다.


은근히 기다림직한 스트립쇼는 없었다. 겉옷을 벗어 던지자 알몸 대신 하얀 모시적삼이 나타났다. 춤은 관중의 눈길을 현혹시키려는 듯 다채롭게 변화했다. 디스코에 캉캉춤이 뒤섞이더니 무당의 살품이춤에서 우아한 궁중무로 나아갔다. 하얀 반투명 치마의 레이스가 허벅지 위로 펄럭 올라가기도 했다. 그녀의 얼굴은 진한 화장 때문인지 희디희었고 입술은 피를 머금은 장미꽃잎처럼 붉었다.

 

그런데 춤추며 얼굴을 살짝 돌리는 순간 다른 한쪽 뺨은 검은 색이었다. 검은 반쪽 얼굴의 붉은 입술을 아프리카의 처녀인 양 비밀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춤이 격렬해질수록 하얀 얼굴과 검은 얼굴이 빠르게 교차하더니 이윽고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여 버렸다. 그래도 붉은 입술은 뭔가 비밀을 말하려는 듯 살짝 열리곤 했다. 서서히 춤 동작을 갈무리하면서 그녀는 무대 구석으로 사라지더니 잠시 후 마이크를 들고 메아리처럼 속삭이며 나타났다.


“대니…대니….”


그건 연인을 부르는 요정 에코(Echo)의 목소리에 못지않았다. 홀 안의 미군들은 그 부름에 화답하듯 환성을 질러댔다. 무희는 인사도 하지 않고 애닯은 목청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Oh Danny boy, the pipes are calling(오 대니 보이, 저 피리들이 부르고 있어)
From glen to glen and down the mountain side(골짜기에서 골짜기로 그리고 산 아래로)
The summer's gone and all the roses dying(여름은 떠났고 모든 장미들은 죽어가고 있어)
‘Tis you, ‘tis you must go and I must bye(넌 가야 하고 난 작별을 해야 해)
But come ye back when summer’s in the meadow(그러나 여름이 초원에 머물 때나)
Or when the valley’s hushed and white with snow(골짜기가 눈에 덮여 하얗고 잠잠할 때는 돌아와)
Oh Danny boy, I love you so(오 대니 보이, 난 너를 너무나도 사랑해…)


대니 보이란 과연 누구일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아일랜드는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생활이 많이 어려웠다. 청년들까지 1차 세계대전 등에 징용당했다. 이 노래는 이런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전쟁터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대니를 사랑하는 소녀가 헤어지기 안타까워 부른 이별의 노래라고 한다. 또는 멀리 떠난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애틋한 노래라는 얘기도 전해 온다.


정면으로 보이는 얼굴은 어찌 보면 좀 흉측하기도 했으나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코를 중심으로 얼굴의 반은 백색이고 반은 흑색으로 화장한 모습이었다.


미군들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어디선가 ‘몽키 걸’이란 말이 들려오긴 했지만…), 흑인과 백인들이 잠시나마 함께 어울려 먼 고향 아메리카 초원의 추억을 되새기는 양 컨추리송을 따라 불렀다. 향수에 젖어 눈물을 글썽이는 녀석도 있었다. 누가 그들을 포악하고 야비한 양키라고 욕할 수 있겠는가? 그 순간만큼은 신마저 어여삐 여겨 눈물을 닦아 줄 터였다.


무희를 향해 달러 지폐와 동전이 날아갔다. 춤을 끝낸 그녀는 환호성에 답해 손 키스를 던져준 후 무대 장막 뒤로 사라져 갔다.


청운은 담비처럼 잽싸게 무대 위로 올라가 그녀의 춤옷과 달러화를 챙겨서는 곧장 뒤따랐다. 장막 뒤의 분장실 겸 대기실로 들어서자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 여자들의 수다가 왁자지껄했다. 그녀는 화장대의 거울 앞에 앉아 티슈로 화장을 지우고 있었다. 청운이 돈을 내밀자 그녀는 거울을 통해 슬쩍 쳐다보더니 고갯짓으로 탁자를 가리켰다. 청운이 돈을 놓고 돌아서는데 그녀가 한 마디 툭 던졌다.


“헤이, 아조씨…옷은 두고 가야죠.”


청운은 자기 팔에 걸쳐져 있는 붉은 옷을 내려다보곤 얼핏 놀란 표정이었다. 그는 곧 허물 같은 춤옷을 옷걸이에 건 뒤 몸을 돌려 나갔다.


“잠깐!”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았으면서도 쓸쓸한 울림을 지닌 목소리에 청운은 슬쩍 돌아보았다.


“왜요?”
“동전과 은화는 가져가요. 팁이에요.”
“뭘요, 괜찮아요. 하하, 아좀마….”


청운은 여자가 했던 말투로 대꾸하곤 곧장 밖으로 나갔다. 뒤에서 여자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진홍의 무희와 흑인


밤도 제법 깊었다.

일을 하는 사이 창문을 바라보면 눈송이가 불빛에 섞여 언뜻언뜻 보이다가 사라지곤 했다.


무대 위에서는 무명 가수와 코미디언들이 번갈아 나와 재롱을 떨고 있었지만 관중들은 별 관심 없이 술을 마시며 이제 짝짓기 상대에 열중한 상태였다. 서로 마음을 맞춘 남녀는 웃음을 나누며 서둘러 홀을 빠져 나갔다. 육중하고 큰 그림자와 작고 가냘픈 그림자를 벽에 남기며….


청운은 가능한 한 현실을 있는 대로만 보고 자기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때였다. 이상스런 신음소리가 청운의 귀를 곤두세웠다.


“아악…살려 줘요….”


그건 눈을 밟는 발자국 소리처럼 미약하여 지옥 같은 악마산에서 특수훈련을 받은 청운마저 뭔지 헷갈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곧 홀의 골마루를 지나 뒷문 쪽으로 달려갔다. 어둑한 뒤쪽 계단에서 건장한 흑인이 한 여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놈은 잔뜩 화난 고릴라처럼 씨근벌떡거렸고 여자는 가녀린 팔로 벗어나려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디스 이즈 데드 키스. 흐흐흐….”


흑인은 음흉스레 웃으며 신음하는 여자의 입술을 빨려고 들었다. 죽음의 키스. 놈은 마치 영화를 찍는 배우 같은 폼이었다.


“핫, 핫….”


여자는 곧 숨이 넘어갈 듯 할딱거렸다. 청운은 일단 고주망태라도 된 듯, 비틀비틀 계단을 걸어 내려가며 흑인에게 상체를 한번 쿡 부딪쳤다. 놈의 성난 눈알이 청운에게로 향했다.


“갓뎀! 개쇼키!”


녀석이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짖었다.


“갓뎀!”


청운은 대꾸하며 히죽 웃었다. 흑인 녀석의 한 손이 별안간 청운의 멱살을 잡았다. 억센 악력이었다. 청운은 맥없이 끌려가는 척하다가 왼손으로는 목의 급소를 재빨리 슬쩍 찌르는 동시에 오른쪽 주먹으로 놈의 명치를 세게 올려쳤다. 놈은 양손을 놓고 허우적대며 주저앉더니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좀 있다 깨어나 현실을 알아보면, 훗날 하나의 추억이 될 거야.”


청운은 중얼거린 후 급히 여인을 안아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진홍색 입술 사이로 신음소리를 흘려냈다. 하얀 목에 짙은 손자국이 나고 파란 정맥이 어렴풋이 내비쳤다.

 

인적이 좀 뜸한 골목의 전신주에 그녀를 기대어 앉힌 청운은 뺨을 찰싹찰싹 두드렸다. 여자는 신음소리만 낼 뿐이었다. 인공호흡 겸 충격요법으로 입술을 한번 빨아 볼까 하고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여자의 눈이 서서히 뜨였다. 청운은 곧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천천히 심호흡을 몇 번 했다. 붉은 옷과 붉은 구두가 아니더라도 청운은 그녀가 바로 그 진홍의 무희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여자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앞에 웅크린 남자가 자신의 입술을 탐했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그런 일 없었으니 걱정 마요.”


청운은 중얼거렸다.


“뭐라구요? 내가 왜 여기 이러고 있죠? 혹시 당신이 날 납치했나요?”
“아뇨.”
“그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무슨 일이 있긴 했지만 별일은 없었어요.”
“무슨 소리죠?”
“어떤 흑인이 당신의 목을 조르고 있더군요.”
“그럼 당신이 구해 줬나요?”
“가능하다면 그런 얘긴 아무한테도 하지 마세요. 그놈은 아마 술에 취해 계단에서 굴렀다고 생각할 테니 일을 만들지 말자구요.”
“알았어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이젠 일어서서 어서 갈 길을 가요.”
“술 취하면 개귀신처럼 달라붙는 놈들이 많아요. 흰둥이들도 마찬가지예요. 혹시 내 보디가드가 될 생각 없나요?”


여자가 하얀 치아를 살짝 내보이며 웃음 지었다.


“하하, 빨리 가봐야 해요.”


청운은 그 말을 뒤에 남기곤 급히 클럽을 향해 발을 옮겼다. 어디선가 캐럴송 소리가 희미하게 끊어질 듯 들려왔다.

 

▲ 윤금이 살해사건이 모티브로 등장하는 영화 ‘살인의 강’ 한 장면.    


크리스마스 이브엔 온 거리가 흥청망청했던 데 비해 정작 성탄절 당일이 되자 왠지 썰렁한 풍경이었다. 간밤에 진탕 마시고 정욕까지 탕진해서 그런지 몰랐다. 혹은 비밀스런 아름다운 사랑마저도…거리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도 허전해 보였다. 한산한 골목엔 겨울바람만 윙윙 불어대며 흙먼지를 날렸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고요하던 기지촌은 갑자기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살인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블루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텍사스 클럽의 이층 뒷방에 사는 한 양색시가 처참한 꼴로 살해당했다는 얘기였다.

 

피해 여성의 곱던 얼굴은 마구 얻어맞아 시퍼렇게 멍들고 부어올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한쪽 유방이 잘려나간 데다 음부엔 콜라병이 깊이 박히고 항문에서 직장까지 우산을 찔러넣었으며, 입에는 성냥개비를 한 움큼 쑤셔넣은 끔찍스런 모습이었다고 목격자들은 질린 목소리로 전했다. 새벽녘에 비명소리를 들었다는 말도 나왔다. 양키 놈의 짓이 분명하다면서 입술을 짓씹으며 울부짖는 여자도 있었다.


“그렇게 착실하고 사근사근하던 애가 뭘 잘못했다고 그토록 비참하게 죽인 거야, 응? 설마하니 좆을 안 빨아 줬다고 그랬을까…흐흑, 시골 부모 모시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온 심청이 같았던 애가….”


“그 골방에서 무슨 개수작이 있었는지 누가 알겠어. 아무튼 살인자가 잡혀얄 텐데….”


그렇지만 미군 앰뷸런스가 나와 시체를 싣고 간 것으로 끝이었다. 미군 헌병들은 여자들의 탄원과 호소를 보곤 눈살을 찌푸렸을 뿐 별다른 조사를 하지 않았다. 미군들이 감쪽같이 모두 귀대한 후 부대의 철문은 굳게 닫히고 출입금지령이 내렸다.


미군부대는 한국 경찰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설령 살인자라 하더라도 미군 군적을 지닌 자라면 일단 그 속으로 잠입해 버린 이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치 신성한 솟대의 공간처럼, 범죄자들은 그 속에 숨어 있다가 미국으로 귀대해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한국 정부나 경찰은 자기 나라의 국민이 비참하게 강간 살해당했다 하더라도 미군 측에 맡겨 둘 수밖에 없었다. 그건 소파(SOFA), 즉 한미주둔군지위협정 때문이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선 아무런 보도도 없었고, 다음날 배달된 신문 한구석의 ‘휴지통’란에 짧은 가십성 기사로 요리돼 나와 있을 뿐이었다.


설움을 참지 못한 여인들이 철문을 잡고 흔들며 울부짖었지만 차가운 바람과 함께 눈발만 더욱 짙어질 뿐 묵묵부답이었다.


(*1992년 10월28일 동두천시 보산동에 있는 미군전용 클럽 종업원이던 윤금이씨가 피살되었다. 이 사건으로 미군 범죄의 심각성이 전국적으로 인식되었다. 범행 자체로도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지만, 범행 미군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보여진 한미관계의 불평등으로 인해 더욱 분노했다. 동두천 시민사회단체들은 대책위를 꾸려 투쟁했으며 ‘군 손님 안 받기 운동’ 등이 이어졌다-지은이 주)


<다음 호에는 ‘무정 세월’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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