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今疏通-용적우아(用敵于我)

책략가들이 고의로 반대파 남겨놓는 까닭은?

글/이정랑(중국고전연구가) | 기사입력 2019/08/23 [10:37]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今疏通-용적우아(用敵于我)

책략가들이 고의로 반대파 남겨놓는 까닭은?

글/이정랑(중국고전연구가) | 입력 : 2019/08/23 [10:37]

권모술수 운용하는 사람은 敵조차 필요한 존재로 이용
軍 통솔할 땐 武를 나무로 삼고 文을 씨앗으로 삼는다

 

▲ 음모와 암투가 판치고, 이권과 청탁이 오고 가며 배신과 보복이 난무하는 냉혹한 정치 세계를 그린 JTBC 시즌제 드라마 ‘보좌관’ PR 장면.    


1. 용적우아


용적우아(用敵于我). 적이 있어야 내가 있다.


적을 씨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없애려는 생각은 생각이 짧아도 아주 짧은 사람의 행동방식이다. 권모술수(權謀術數)를 노련하게 운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적조차도 필요한 존재로 남겨놓고 이용한다.


<전국책> ’한책(韓策)‘에는 이런 얘기가 실려 있다.


한(韓)나라 재상 공숙(公叔)과 한나라 왕이 아끼는 아들 궤슬은 권력을 놓고 늘 서로 대립했다. 이 정쟁은 결과적으로 궤슬이 국외로 망명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공숙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궤슬이 망명하기 전에 자객을 보내 궤슬을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측근 하나가 말리고 나섰다.


“그러지 마십시오. 태자 백영은 재상을 매우 주목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궤슬이라는 존재 때문입니다. 궤슬을 견제해야 하기 때문에 재상께서 중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궤슬이 죽는다면 재상이 표적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궤슬이 존재해야만 태자도 어쩔 수 없이 재상의 역할에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적의 존재 가치를 말해주는 이 대목은 적의 역량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적’은 어쨌거나 좋을 것이 없다. 그러나 상대의 작용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냉정히 따져보고 난 후 힘의 균형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의 책략을 생동감 있게 조정할 줄 알아야 한다.


절대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이 저지를지도 모르는 실수를 방지하는 경계 신호로 작용할 수도 있고, 어떤 유용한 목표가 될 수도 있으며, 자기 진영의 단결을 다지는 모종의 자극제가 될 수도 있다. 나아가서는 실수와 사고를 해명하는 구실이 될 수도 있다. 그 이해득실은 간단하게 논할 성질의 것이 못 된다.


역사상 일부 정치 책략가들은 정치적 필요성에서 고의로 반대파를 남겨놓곤 했는데, 그 책략이 의미심장하기 짝이 없다.

 

2. 이무위식 이문위종


이무위식 이문위종(以武爲植 以文爲種). 무(武)를 나무로 삼고 문(文)을 씨앗으로 삼는다.


<울료자> ‘병령(兵令)’ 상권에 문과 무에 대한 훌륭한 구절이 있다.


군을 통솔할 때는 무를 나무로 삼고 문을 씨앗으로 삼는다. 무는 겉이고 문은 속이다. 이 둘의 관계를 살필 줄 알면 승패를 알 수 있게 된다.


이는 군을 다스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옛날 장수들은 문무를 겸비하는 데 힘을 쏟았다. 문무는 서로 대비되면서 표리를 이룬다.

 

<사기> ‘역생육가열전’에서는 “문무 겸비는 나라를 오래도록 유지시키는 법술”이라고 했다. <손자병법> ‘행군편’에서는 “문(어짐·은혜)으로 영(令)을 세우고 무(법·규율)로 이를 시행하면 반드시 얻는다(승리한다)”고 했다.

 

‘문무’ 병행은 고대에서 군을 다스리는 기본 수단이었다. 병사들을 통솔하려면 교육이 있어야 하고 규율도 집행해야 한다. 이 둘은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있어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좌전’ 희공(僖公) 27?28년조의 기록을 보면, 기원전 636년 봄, 진(晉)나라 문공은 중원을 제패하기 위해 정복 전쟁을 적극적으로 준비했다. 그는 먼저 백성이 편안하고 즐겁게 각자의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효과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또 이름뿐이긴 하지만 주(周)나라 천자의 행동을 존중함으로써 각국의 호의를 얻어두었다.


그 해에 진의 문공은 주나라 천자가 자신에게 준 봉토인 원(原, 지금의 하남성 제원현)을 공격했다. 출병하기 전에 문공은 3일 만 공격하겠노라고 선포했다. 그는 3일이 지나도록 점령하지 못하자 그 지역 주민들이 곧 투항할 것이라는 믿을 만한 정보가 들어왔음에도 이를 기다리지 않고 미리 약속한 대로 90리 밖으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문공은 특별히 전문기구를 설치하여 관리의 등급 및 규율과 관련된 문제를 처리했다. 그 뒤 문공은 진나라 백성들이 정부를 믿으며 서로 신의를 지키고 자진해서 질서를 바로잡는 등 백성들의 교양이 이미 성숙했음을 알게 되었다. 기원전 632년 문공은 마침내 군대를 출동시켜 초나라와 복(지금의 산동성 복현 남쪽)에서 싸워 승리를 거두고, 진나라를 마침내 천하의 패자로 만들었다.


북송 말기에서 남송 초기에 이르는 기간, 송나라 군의 대부분은 금나라 군대의 일격조차도 견디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악비(岳飛)와 한세충(韓世忠) 등이 이끄는 군대는 강력한 전투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특히 악비는 우국충절의 사상으로 군대를 정신 무장시키고 엄격한 규율로 병사를 다스려 ‘군사를 움직일 때 추호의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악비의 군대는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고 여러 차례 강력한 금나라 군대와 당당히 맞섰다. 적국인 금나라 군대조차도 ‘산은 움직이기 쉬워도 악비의 군대는 깨기 힘들다’고 실토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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