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今疏通-외불피구 내불피친

“통치자라면 자신을 위해 힘쓰는 인재 망라해야 한다”

글/이정랑(중국고전연구가) | 기사입력 2019/09/20 [11:18]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今疏通-외불피구 내불피친

“통치자라면 자신을 위해 힘쓰는 인재 망라해야 한다”

글/이정랑(중국고전연구가) | 입력 : 2019/09/20 [11:18]

간부 임용 때 개인적 감정 개입시키면 ‘외불피구’ 불가능
‘내불피친’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당파 짓는 구실로 작용

 

통치자는 자신을 위해 힘쓰는 인재를 망라해야 한다. 사진은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법무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모습. <사진출처=청와대>    

 

1. 외불피구 내불피친


외불피구(外不避仇), 내불피친(內不避親). 밖으로는 원수라 하여 피하지 않고 안으로는 친척이라 하여 피하지 않는다.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대부 기해(祁奚)는 도공(悼公) 때 ‘중군위(中軍尉)’라는 벼슬을 지낸 정직하고 공평무사한 인물이었다. ‘사기’ ‘진세가 (晉世家)‘에는 이 인물과 관련하여 이런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기해는 나이가 많아 퇴직하려 했다. 도공은 그의 청을 받아들이는 한편, 그의 후임으로 재능 있는 인물을 추천해보라고 했다. 기해는 서슴지 않고 해호(解狐)를 추천했다. 도공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해호? 그 사람은 당신과 개인적인 원한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오.?”


기해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에게 재능 있는 인물을 추천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개인적인 감정이 있건 없건 저는 그런 점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도공은 해호를 기해의 후임으로 발탁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해호가 일을 맡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도공은 기해에게 다시 적절한 인물을 추천하도록 했다. 기해는 망설임 없이 기오(祁午)를 추천했다. 이번에도 도공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오? 기오는 당신 아들이 아니오?”


“적절한 인물을 추천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제 아들이든 아니든 저는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도공은 즉시 기해의 아들 기오를 후임으로 발탁했다.
이 이야기는 ‘좌전’ 양공(襄公) 3년조(기원전 570년)에도 기록되어 있다.


봉건사회에서 인사 관리는 군주의 말 한 마디면 그만이었다. 진나라 도공은 자진해서 신하에게 의견을 물었고 기해도 공평무사하게 추천했으니 후대의 칭찬을 받기에 충분하다. 도공이 취한 행동은 비교적 수준 높은 통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기해의 추천은 도공의 의지에 부합했고 도공의 묵인이 있었기에 실현될 수 있었다.


통치자는 자신을 위해 힘쓰는 인재를 망라해야 한다. ‘인재를 천거할 때 밖으로는 원한을 꺼리지 않고 안으로는 친인척이라 해서 꺼리지 않는다’는 외거불피구(外擧不避仇), 내거불피친(內擧不避親)‘도 이런 전제하에서만 비로소 통할 수 있다.


사회가 발전하고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능력 있는 간부 선발과 활용은 이미 개인의 인상을 표준으로 삼던 것에서 과학적인 시험과 면접 등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선발과 임용 제도가 완전히 갖추어진 다음에라야 제대로 사람을 알고 적절한 인물을 뽑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지도자는 간부 임용 때 자신의 개인적 감정을 개입시키게 되어 ‘외불피구’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해지며, ‘내불피친’ 또한 오히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파를 짓게 하는 구실로 작용하기 십상이다.

 

2. 관맹상제


관맹상제(寬猛相濟). 너그러움과 엄격함의 조화를 이룬다.


춘추시대 정나라의 공손교(公孫橋)는 자(字)가 자산(子産, 흔히 정자산으로 많이 알려진 정치가)인데 당시로서는 혁신파 정치가라 할 만했다. 정나라에서 집권 10여 년 동안 그는 완고한 수구세력을 타파하는 데 힘을 쏟았다. 충성과 근검을 강조하고 ‘사치’를 반대했으며, 토지 제도와 군사 제도를 개혁했다. 법을 통해 특권을 제한하고 정치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작고 보잘것없던 정나라의 국력은 크게 증강되었고 국위도 높아졌다. 정자산이 정치 통치술로 실행한 것은 바로 이 ‘관맹상제’라는 계책이었다. 이러한 자산의 공적은 봉건시대 통치자들에 의해 높이 평가받았다.


‘너그러움과 엄격함의 조화‘를 뜻하는 ’관맹상제‘, 이 말은 기원전 522년인 ’좌전‘ ’소공(昭公)‘ 20년조에 나온다.


정나라 자산이 병이 났다. 자산은 대신인 자대숙(子大叔)에게 당부했다.


“내가 죽으면 그대가 정치를 맡게 될 것이 틀림없다. 덕 있는 자만이 너그러움으로 백성을 따르게 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엄격함으로 대하는 것이 상책이다. 대저 불이 뜨거우면 백성이 이를 보고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불 때문에 죽는 자는 드물다. 물이란 약해 보이므로 사람들이 업신여겨 물장난을 하다가 죽는 자가 많다. 그러므로 너그럽게 다스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정자산은 백성을 통제할 때 지나치게 엄해도 지나치게 너그러워도 좋지 않다고 했다. 지나치게 엄격하면 백성들이 무서워하고, 지나치게 너그러우면 게을러지기 쉽다. 그러나 우선은 너그러워야 하고, 그 다음에 엄해야 한다. 너그러움은 엄격함에 비해 훨씬 장악하기 힘들다.

 

자산이 죽은 다음 집권한 자대숙은 ‘엄격함’을 버리고 ‘너그러움’으로 정치를 했는데, 사회가 이내 혼란에 빠지고 도적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그는 그제야 엄격하게 다스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노나라의 공자는 이 이야기를 듣고는 “훌륭하도다! 정치가 너그러우면 백성이 게을러지는데, 게을러지면 엄격함으로 바로잡는다. 엄격하면 백성이 잔인해지는데, 잔인해지면 너그러움을 베푼다.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로 정치다”라고 감탄했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정론해(正論解)’에도 거의 같은 대목이 있다.


이러한 공자의 통치 이론은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군주·장수·재상들에 의해 떠받들어져 왔다. 통치 책략으로서 엄격함과 너그러움의 결합은 지금도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지도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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