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민주주의 미래를 위해 김영란 전 대법관이 던지는 화두

“대법원의 선택은 한국사회를 더욱 정의롭게 했는가?”

송경 기자 | 기사입력 2019/10/04 [11:09]

대한민국 민주주의 미래를 위해 김영란 전 대법관이 던지는 화두

“대법원의 선택은 한국사회를 더욱 정의롭게 했는가?”

송경 기자 | 입력 : 2019/10/04 [11:09]

‘가습기살균제’ ‘강원랜드’에서 ‘삼성 X파일’까지 쟁점 다시 짚어
정치쟁점 사법적 판단 구하는 사례 늘자 대법원 현명한 대처 촉구

 

▲ 김영란 전 대법관이 지난 9월17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달개비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 끝 모를 정쟁으로 치닫는 정치 지형 속에서 ‘판결’과 ‘정의’가 그 어느 때보다 의심받는 오늘날, 김영란 전 대법관이 <판결과 정의>(창비)를 출간하고 대법원의 판결을 돌이켜봄으로써 한국사회 정의의 현주소를 짚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김 전 대법관은 우리 사회의 오랜 청탁 관행을 뒤바꾼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입법에 힘쓴 국민권익위원장 등의 경력을 거치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는 데 앞장서왔다.


김 전 대법관은 이 번에 펴낸 책에서 대법관 퇴임 후에 선고된 전원합의체 판결을 되짚어보며 거시적인 관점에서 현재진행형의 쟁점들을 분석한다. 책에는 법관으로서 항상 가지고 있던 김 전 대법관의 오랜 고민과 ‘판결이 추구하는 정의’에 대한 날카로운 관점이 오롯이 녹아 있다.

 

특히 이번 책을 통해 김 전 대법관은 판사들이 순수한 법리만으로 해석하고 재판할 것이라는 통념을 깨고 ‘대법관들이 자신에게 허용된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냉철하게 비평한다.


따라서 책에서는 ‘성희롱 교수의 해임결정취소 소송’ ‘가습기살균제 사건’ ‘강원랜드 사건’ ‘KIKO 사건’ ‘삼성 X파일 사건’ 등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 김 전 대법관이 이 사건들에서 끄집어낸 주제는 가부장제, 자유방임주의, 과거사 청산, 정치의 사법화 등 한국사회에서 꾸준히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다.


사법부는 원칙적으로 주어진 법에 따라 판단하지만, 같은 법에 대해서도 사회가 공유하는 통념의 변화, 민주주의의 성숙도 등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타나기도 하고, 그에 따라 판결도 달라지곤 한다. 김 전 대법관은 그 ‘달라지는’ 판결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으며, 그 방향을 정하는 주체는 누구여야 하는지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판결은 마침표가 아니다. 판결을 통해 사건에 대한 시비는 일단락되지만, 그 판결 속 쟁점의 이유가 되었던 가치에 대한 고민은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쌓여가는 판결을 돌아보며 판결이 우리 사회를 더욱 정의롭게 했는지 살펴보고, 사법부의 판단이 더 옳은 쪽으로 갈 수 있도록 사회 전반의 통념과 공감대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가야 한다.

 

김 전 대법관의 책은 민주시민인 우리가 어디서부터 이 일을 시작해야 할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알려주는 ‘정의를 향한 가이드’가 될 것이다.

 

변하는 사회와 대법원 반응


사실 판결은 우리 사회의 변화를 앞서가기보다 뒤따르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사법부가 변화하는 사회에 발맞추어 사회 정의를 수호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일은 꼭 필요하고 중요하다.


김 전 대법관은 책에서 최근 우리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인 성차별 문제를 다룬다. 사회통념이 변하면서 호주제와 같은 제도적 성차별이 사라지기도 했지만, 가부장제와 같은 성별 계층화는 여전히 남아 있다.

 

김 전 대법관은 이분법적 논리에 기반을 둔 채 오랜 시간 동안 남성 우위의 질서를 구성해온 가부장제의 본질이 단순히 성별의 차이로부터 나오는 현상이 아니라 계층화에 의해 구축된 위계질서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확산되면서 사회가 변하고 가부장제가 점차 해체되어감에도 대법원은 그 변화를 다소 보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김 전 대법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판결을 통해 대법원이 보여주는 변화의 움직임을 감지하며 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어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단어가 대법원 판결에서 처음 등장한 사례를 돌아본다. 성희롱 교수의 해임결정취소 소송이 진행되면서 고등법원에서는 피해자의 성희롱 피해사실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결했지만, 대법원에서 이를 뒤집는다.

 

대법원은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로 판결의 취지를 설명한다. 김 전 대법관은 이 판결을 소개하며 ‘성인지 감수성’이 어떤 것인지, 판결의 과정에서 그것이 왜 필요한지를 역설한다.


또한 다양한 사적 조직 내에 작용하는 헌법 원리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종중 구성원에 대한 논쟁, 교원노조·공무원노조의 참정권 투쟁, 통합진보당의 당내 경선과정에서 불거진 대리투표 논란 등을 짚으며 ‘과연 헌법은 사적 조직의 어느 범위까지,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헌법 위에 세워진 민주주의가 우리 삶과 가까운 영역일수록 오히려 더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세계적 흐름이 된 신자유주의가 한국에 미친 영향이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있음은 다수가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김 전 대법관은 ‘형식적 평등’과 ‘개인의 자유로운 이익 추구’라는 가치가 무엇보다도 우선시되는 신자유주의의 근본 원리가 숨기고 있는 힘의 논리에 우려를 표한다.


그러면서 대표적 사례로 ‘가습기살균제 사건’ ‘통상임금 사건’ ‘철도노조 파업 사건’ 등을 살피면서, ‘계약만능주의’에 기초하여 법보다 계약을 우선하고, 결과적으로 우월적 지위에 있는 당사자를 보호하는 판결이 내려진 과정을 되짚으며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법원칙이 처한 위기를 지적한다.

 

또 ‘강원랜드 사건’과 ‘KIKO 사건’을 돌아보면서 ‘갑’의 지위와 자유방임주의가 결합했을 때의 힘과, 이러한 힘의 논리를 긍정한 대법원 판결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법률과 사법부의 사명을 다시 한번 환기한다.


특히 법경제학의 세계적 석학인 알랭 쉬피오의 논의를 들여와 신자유주의적 흐름에 대해 간명하고도 치밀한 비판을 전개하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를 통해 일반 시민들은 계약만능주의를 우려할 만한 판결들이 가진 위험성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법조 종사자들에게는 이 내용이 신자유주의적 판단이 만연한 현 상황에 대한 서늘하리만치 날카로운 지적이 될 것이다.

 

뗄 수 없는 정치와 사법의 관계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라는 용어는 더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의 ‘사법농단’ 사태 이전에도 사법과 정치 영역의 결합 시도와 실제 결합이 수없이 이뤄져왔음은 대다수의 시민이 짐작하고 있는 일이다. 정치적 판결이 점차 확대되는 원인과 정치적 판결의 과정에서 고려되는 사항에 대해 알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 전 대법관은 두 경우로 나누어 사법과 정치의 관계도 돌아본다. 우선 과거사 청산 문제에 직면한 사법부가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살펴본다. 사법부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 정부의 일방적인 결정에 대해 형식적인 법적용 절차를 제공하는 데 그침으로써 ‘정치의 사법화’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수준의 역할을 수행했던 시기를 지나면서 수많은 사법 피해자를 낳았다.


이에 대해 재심의 방법을 사용하여 과거사 청산을 시도했던 이용훈 코트(대법원)의 재심 판결들을 돌아보며 김 전 대법관은 그 과정의 뚜렷한 한계를 지적한다.

 

또 과거사 ‘청산’이 아닌 ‘정리’의 수순을 밟았던 양승태 코트 시기에 이루어진 과거사 관련 사건의 판결 과정에서 적용된 논리가 가진 문제를 지적한다. 국가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재심 대상자들에게 이 잘못된 판결 논리가 가져온 더 큰 상처를 생각하면 김 전 대법관의 지적은 더욱 안타깝고 뼈아프다.


마지막으로는 정치적 판결의 대표 사례라 할 만한 ‘삼성 X파일 사건’과 ‘PD수첩 광우병 보도 사건’을 돌아본다. 김 전 대법관은 이 부분을 통해 정치적 판결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정치적 판결이 이루어지는 이유를 지적한다.

 

동시에 정치적 쟁점이 정치의 영역에서 해소되지 못하고 사법적 판단을 구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근래의 경향 속에서 대법원이 현명한 대처 방법을 찾아낼 것을 촉구한다.


김 전 대법관은 재판연구관으로 일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판결은 선택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에 받았던 충격을 언급한다. 그 충격은 대법관으로 일하던 당시에는 두려움의 근원이 되었고, 이후에도 ‘그 선택의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놓지 못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 전 대법관은 대법관 퇴임 이후 국민권익위원장,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등 판결과 정의에 대해 더 깊은 고민을 할 수 있는 자리를 거치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판결과 정의>는 그 고민 끝에 다다른 또 하나의 잠정적 결론이다. 김 전 대법관은 이 책을 통해 대법원 판결 속에 반영된, 혹은 반영되지 않은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어진 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에 그치는 판결은 인공지능에게 판결을 맡겼을 때와 다르지 않은 결과를 낼 것이다. 그렇기에 ‘법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에 세계와 법의 미래를 생각하고 상상해보는 일’이 필요하다.

 

김 전 대법관은 그 과정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만 하는 가치들을 짚어내며, 독자들로 하여금 대법원의 판결이 이 과정을 잘 수행한 결과인지 판단할 수 있도록 한다.


자신이 참여하지 않은 대법원의 판결을 비평한다는 것이 주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김영란 전 대법관은 ‘정의’라는 화두를 전면에 내걸었다. 오랫동안 법조에 몸담은 자로서의 의무감을 넘어 이것을 민주사회 시민으로서의 책무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결이 가진 정의의 무게를 달아내는 김 전 대법관의 마음과 우리 사회가 더욱 정의로운 민주사회가 되길 열망하는 시민들의 마음이 여기서 만난다.

 

김 전 대법관의 통찰과 시각은 우리 사회의 정의를 고민하는 모두에게 생각의 밑거름으로 자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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