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권의 장편소설 ‘몽키 하우스’ 제3부 <3> 어떤 편지

성병 고치러 왔다 생목숨 잃어가던 여자들 심정은 어땠을까?

글/김영권(소설가) | 기사입력 2019/10/11 [10:29]

김영권의 장편소설 ‘몽키 하우스’ 제3부 <3> 어떤 편지

성병 고치러 왔다 생목숨 잃어가던 여자들 심정은 어땠을까?

글/김영권(소설가) | 입력 : 2019/10/11 [10:29]

억울하게 잡혀온 위안부들은 분노로 치를 떨며 ‘한숨 폭폭’
말 안 듣는 여자에게 복수하려 ‘컨택’…비열스런 미군도 많아

 

“꿈꾸던 미국은 여기 와서 보니 아름다운 나라란 생각은 안 들어”
“거기 살다 죽느니…헛꿈이라도 꾸고 황천 가는 게 낫지 않겠어?”

 

▲ 인천 상륙작전 직후 6·25가 한창일 때 강원도 춘천 근처의 작은 마을에 유엔군 병사들이 침범하여 언례를 폭행한다. 사진은 영화 ‘은마는 오지 않는다’ 한 장면.    

 

몽키하우스의 내부는 군 내부반과 비슷했다.


복도 양쪽에 쭉 늘어선 각 방은 국화반·난초반·장미반 따위로 불렀다. 여성미를 북돋우려는 성싶었으나 안으로 들어서면 삭막한 느낌을 풍겼다.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수십 개의 초라한 침상이 줄느런히 놓여 있었다.


여사감이 수용자들의 일상생활을 엄격히 감독했다. 한 번 찍히면 구금 시간이 연장될 위험도 있으므로 조심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몽키하우스는 성병 치료가 주목적이었지만 접대행실 교육과 재활을 위한 기술 교육도 명목상으로나마 선별적으로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점을 받으면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순화교육에 잘 따르지 않는 이른바 ‘꼴통’들은 좁은 감금실에 처넣어져 고통과 고독을 짓씹어야만 했다.

 

미군들의 엉터리 ‘컨택’


수용소에 처음 입소한 양색시(미군 위안부)들은 일단 진료소로 가서 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 안엔 쇠침대가 몇 개 놓였고 군용 매트 위에 하얀 시트가 씌워져 있었다. 여자들은 이름과 소속 클럽을 밝힌 후 매트에 누워 군의관들로부터 1차 관찰 검사를 받았다.

 

그런 다음 좀 더 은밀한 안쪽 방으로 들어가 심화 검사에 응해야 했다. 군의관이 건넨 유리관에 오줌을 받아 돌려줘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미군 군의관은 유리관을 스텐 플라스크에 꽂곤 빙글빙글 돌린 후 슬라이드 글라스 위에 한 방울 떨어뜨려 세밀검사를 했다.


여자들은 그 성병 검사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설령 결과가 비보균자로 나오더라도 수용소에서 곧 내보낸 주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정상참작이야 있었겠지만, 일단 수용되면 일주일 동안 기본적으로 감금 상태로 지내야만 했다. 대체 왜 그랬을까?


미군들의 엉터리 컨택(성병 보균자 지목)에 의해 억울하게 잡혀온 위안부들도 꽤 많았는데 그녀들은 분노로 치를 떨며 한숨을 폭폭 내쉬곤 했다. 청춘의 낭만과 정욕을 이국의 여인과 함께 한번 풀다가 재수없게 매독균에 걸린 미군도 물론 있었겠지만, 자기 뜻대로 갖고 놀며 지배하려다가 말을 잘 듣지 않는 여자들에게 복수하려고 컨택하는 비열스런 잡놈도 무척 많았기에 불평이 들끓었다. 한 서린 소리도 흘러나왔다.


‘아리랑 아라리~ 좆고개를 넘어가네… 가다 못 가면 발목이 끊어져 죽는다네….’


‘내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아, 하지만 이제… 이 내 보진 내 것이 아니고 이 나라의 보지라네….’


‘헤이, 존… 어서 와서 내 썩어가는 보지를 빨아줘. 박통 따까리들도 함께….’


그건 미군에게 비굴스런 반식민지 상황에서 당한 설움뿐만 아니라 한국 군부독재 정부의 거짓말에 대한 야유이기도 했으리라.


수용녀들은 아침 6시에 일어나 저녁 9시쯤 잠들었다.


아침 점호와 청소, 세면 등을 하고 나면 식사시간이 왔다. 꽁보리밥에 시래기 소금국 그리고 반찬은 콩잎절임, 무짠지, 새우젓 등 오래 둬도 잘 상하지 않는 음식이었다.

 

그래서 식상한 여자들은 푼돈을 갹출하거나 또 다른 비밀스런 방법으로 식재료를 조달해 스스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이따금 빵과 우유가 나오기도 했지만 오히려 자유에 대한 향수로 인해 더 허기가 지는 모양이었다.


하루 일과는 칼같이 엄격히 정해져 있었다. 식사 후 잠시 휴식을 하고 나면 성병 검진과 치료, 그리고 시시콜콜한 관리 교육이 이어졌다. 빈약한 점심 식사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규칙상 화장을 하지 않은 여자들의 얼굴은 수수할 정도가 아니라 영양실조로 인해 여위고 해쓱했다.


가끔 외출할 기회가 생기면 청운은 여자들의 부탁을 받곤 김치찌개나 된장찌개에 필요한 재료들을 슬쩍 사다 주었다. 그런 날 밤엔 은밀한 축제가 열렸다. 어디서 구했는지 조니워커 같은 양주도 한 순배 돌았다. 음주와 흡연은 엄격히 금지됐고, 만일 발각될 시엔 구금 기간이 두 배로 늘었다. 그런데도 여자들은 도둑고양이처럼 그런 스릴의 묘미를 즐겼다.

 

물론 그런 비밀 축제는 수용소에서 아주 희소했을 터였다. 캄캄한 밤하늘에 문득 뜬 별 하나처럼, 청운은 블루문 클럽에서 알게 된 미애라는 위안부의 간곡한 부탁으로 서너 번 그런 역할을 맡았을 뿐이었다(어쨌든 죄책감은 별로 들지 않았다. 청운 자신도 그 밤의 성찬에 초대받아 한두 번 낀 적이 있었다).

 

▲ 기지촌 할머니들의 서러운 삶을 풀어낸 연극 ‘숙자 이야기’ 한 장면.    

 

댄서 희란은 지금 어디에?


어느 날 미애라는 여자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오빠, 아직도 희란 언닐 좋아해?”


“뭐? 그건 왜 물어?”


청운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희란이란 붉은 옷을 입고 춤추는 댄서였다.


“혹시 그렇다면… 이젠 그만 잊어야 할 거야.”


미애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청운을 바라보며 짓궂게 미소지었다.


“왜?”


“호호… 오빠 얼굴이 하얗게 변하네… 아이 참 재밌어.”


미애는 소녀처럼 깔깔거렸다.


“장난치지 말고 빨리 말해 봐.”


“흥, 누가 장난이래? 그 언니 이미 시집갔어.”


“뭐?… 어디로?”


“서울.”


“서울 어디?”


청운은 겨우 말을 꺼내고 있었다.


“어디긴 어디겠어. 동두천 기지촌에서 용산 기지촌으로 간 거지 뭐. 혹시 꽃가마 타고 가회동이나 안국동 대갓집 며느리로 들어갔다고 공상하는 건 아니겠지, 응?”


“….”


“오빠야, 너무 슬퍼하지 마. 나도 소문으로 들은 얘기니까 확실한 건 몰라. 미8군으로 전속돼 가는 어떤 캡틴을 따라갔다니까… 만약 잘 되면 그 언니도 큰 무대에서 꿈을 이룰지도 모르잖어.”


“나도 그러길 바라.”


“흥, 바라긴 고양이 뿔을 바라. 그 언니가 성공하면 할수록 오빠한테서 더 멀어질 텐데도…?”


“나도 성공하면 되지 뭐. 기차 타고 가면서 바로 옆에 달리는 버스를 바라보는 재미도 괜찮잖아.”


“제발 꿈 깨셔! 뭘로 성공해서 특급열차를 탈 텐데, 응?”


청운은 대답이 궁해 슬쩍 홀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찬바람이 부는 산길을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난 그녀가 여전히 가까운 곳… 그녀로 인해 그리운 동두천에서 춤추고 있다고 착각했었군. 더 큰 착각은 거리가 아니라… 여자의 현실적인 마음과 현재 처한 상황을 잘 모른 채… 제대로 파악해 보려는 시도조차 마다하고 그냥 몽상 속에서 그녀의 매혹적인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야.

 

물론 지난 달에 동두천 읍내에서 만나 함께 영화를 보고 생맥주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지. 난 쑥스러워 마음속의 그리움을 고백하지 못했건만… 아, 혹시 그녀는 나를 애정이나 연정이 별로 없는 목각인형으로 착각해 버린 건 아닐까?

 

이번 달 휴일에 다시 만나게 되면… 용감하게 이 심정을 직접 고백하거나 편지라도 써볼까 고민 중이었는데… 훌쩍 떠나가 버리다니… 음, 아마 그녀는 애초부터 나를 연인이나 남자로 전혀 생각지 않았는지도 몰라….’


청운은 노송(老松) 옆에 서서 한손을 짚어 고단한 몸을 의지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난 사실 그녀가 성공하길 바라지 않아. 오히려 그녀가 더 추락하면 좋겠어. 미8군 무대에 서서 화려하게 각광을 받게 되면 축하보다는 되레 저주하고파. 왜냐하면 내게서 점점 더 멀리 떠나는 것 같으니까. 흐흐, 차라리 만신창이 신세가 되어 마음 하나만 지닌 채 내게 돌아온다면 폭 껴안아 주련만….’


청운은 고개를 떨구며 고목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야밤의 솔바람 소리에 산새들이 잠결에 내는 울음이 이따금 섞여 들곤 했다.


‘그녀는 지금 서울 하늘 아래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미8군 쇼 무대에서 선녀처럼 춤추며 노래하고 있다면 그나마 좋을 텐데… 이태원이나 삼각지 부근에서 내가 전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


청운은 문득 서울 땅이 그리워졌다. 천국보다는 지옥에 더 가까운 땅…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엄마에게 버림받고 홀로 거렁뱅이 꼴로 헤매 다니던 청량리, 동대문, 청계천, 종로, 서울역, 남산, 남대문, 명동… 그녀가 살고 있기에 더 그리운지도 몰랐다.


청운은 어둠 속에 묻힌 채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원숭이보다 못한 인생


얼마 후 청운은 허적허적 산길을 걸어 내려갔다.


숙소 쪽으로 발길을 옮기려는데 어디선가 여자의 흐느낌 소리와 억누른 귀곡성 같은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외딴 산속의 건물에 많은 여자들이 갇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청운은 문득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귀신이니 유령이니 하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아니, 그럴 수도 있었다.


몽키하우스에 수용된 여자들은 대부분 한창 젊은 나이인데도 의외로 무슨 동백꽃이 지듯 목숨을 떨구곤 했다. 우선 페니실린 쇼크로 인한 갑작스런 사망은 참 어이없고 억울한 참극이었다. 성병 고치러 왔다가 주사 한번 잘못 맞아 고통 속에 생목숨을 잃어 가던 여자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혹시 자신의 인생이 원숭이보다 더 못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그런데 문제는 그런 짐승 같은 죽음이 무척 자주 발생한다는 사실이었다. 여자들 각자의 체질을 고려치 않고 일률적으로 투여한 약은 독이 되어 불현듯 목숨을 앗아 가곤 했다. 또 다른 경우는 탈출하려고 야밤에 2층 건물 위에서 뛰어내리다가 뇌진탕으로 숨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런 여자들 중엔 성병에 감염되지도 않았는데 악의를 품은 미군의 컨택에 의해 억울하게 끌려 온 경우가 많았다.

 

여자들의 시체는 상패동 공동묘지에 매장되기도 했지만 아마포에 둘둘 말아 외진 산속에 대충 묻어 버릴 때도 있었다.


그렇게 졸지에 원한 맺힌 망자가 된 양색시들의 혼백이 귀신으로 변해 서럽게 운다고 해서 이상스런 일은 아니리라. 청운은 바짝 긴장해 귀곡성이 들려오는 곳으로 점점 다가갔다.

 

귀신에 대한 공포심은 곧 사람 걱정으로 바뀌었다. 흐느낌 소리는 아까 슬쩍 피해 나왔던 2층 여숙사의 난초반 방 쪽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또 누가 죽었나?’


청운은 바짝 긴장해 발걸음을 빨리했다. 문을 두드려 안으로 들어선 그는 일순 쓴웃음을 지었다. 여자들은 어떤 비극이 아니라 감동적인 드라마 때문에 코를 훌쩍이며 흐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이미 방을 싹 정리한 후 드러눕거나 둘러앉아 미애가 읽는 편지에 귀를 기울이는 중이었다. 편지지는 다섯 장은 넘어 보였다. 그 구구절절한 사연을 미애는 제 나름대로 감정을 잔뜩 넣어 마치 성우처럼 낭독해 나갔다.


“…이곳 미국에 오고 나서야 내 조국 대한민국의 참모습이 보여. 아, 그리워 죽겠어. 내가 그토록 생지옥이라고 욕했던 그곳의 땅과 하늘이 늘 내 몸과 마음을 감싸주었다는 걸 생각하면 안타깝고 미안스럽고 슬퍼져.

 

그곳에서 꿈꾸던 미국은 정작 여기 와서 보니 별로 아름다운 나라란 생각은 안 들어. 엄청 크고 넓은 땅에 거대한 빌딩도 많지만… 난 왠지 고향의 박꽃 핀 초가집이 그립단다. 뭐 그렇다고 이곳이 꼭 실망스럽다는 얘긴 아냐. 인간적으로 너무나 자유스러워. 곰이 동굴 속에서 쑥인지 마늘인지 뭘 먹고 사람이 됐다는 소리 따윈 우스울 정도로… 동두천을 떠나왔다는 것 자체가 인간 승리로 생각될 정도야.


아메리칸 드림은 목숨을 걸고 한번 꿈꿀 만해. 어차피 그곳에서 가망 없이 살다 죽느니… 헛꿈이라도 꾸며 온몸으로 부딪쳐 보고 나서 황천으로 가는 게 낫지 않겠어?

 

여기서 살다 보면 구차스런 과거보다는 이 현재에 쿨하게 살고 있는 내가 대견스럴 때도 있어. 그래도 왠지 미국 사람들은 이미 다 빨아먹고 버린 사탕을 주워 핥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더라.

 

난 그곳에 있을 당시, 사실 미국 사람들이 쓴 자기계발이니 성공학이니 하는 책을 구해 읽기도 하면서 내 감정을 억누르고 신세계를 향해 일로매진했었지.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 다들 너무나 일상적으로 뻔뻔스럽게 그런 걸 하고 있어서 내심 좀 부끄러울 지경이었어.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것을 부자연스럽다며 비웃기도 했고….


나로선 성공 엔진을 달고 여기까지 왔기 땜에 일단은 직진해 나가야 할까 봐. 다행히 여긴 남녀 차별이 없어서… 동두천에서처럼 하면… 뭘 못 할까 싶기도 해. 하긴 인종 차별의 벽이 너무 높은 듯하지만 말야. 나 스스로 차츰차츰 극복해 나가야겠지.

 

앞으로 좀 여유가 생기면 대학에 시간제 학생으로 등록해 전부터 꿈꾸던 관심 분야를 수강해 보려고 해… 보통 사람들은 운명이란 아주 얄궂은 것이라고 얘기하지. 운명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의 운명은 우리들 안에서 함께 숨쉬며 살아가고 있다잖아. 우리가 그걸 들여다보고 용기를 불러일으킨다면….”


청운은 한구석에 선 채 듣고 있었다. 아마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간 전직 위안부 여자로부터 온 편지인 모양이었다. ‘헬조선’을 떠나 ‘아메리카 파라다이스’로 떠난 어떤 여인의 사연은 그냥 편지가 아니라 드라마틱한 인생극장의 장면으로 이 지옥 같은 기지촌 땅에 남은 여자들에겐 느껴졌을 터였다.


미애는 귤 한 조각으로 입을 축인 후 계속 읽어 나갔다.

 

어떤 여인의 아메리칸 드림


“…꿈이 현실로 변하면 마음속을 덮고 있던 환상의 베일이 벗겨지는 것일까?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리자 처음 본 다른 세상 앞에서 신기함도 있었지만 오히려 두려움이 앞섰어. 내가 한국에서 마음속으로 지녔던 미국에 대한 친밀감은 허무하고 공허해지고 말았지.

 

차라리 이 순간부터 즉시 빨리 그런 헛된 공상을 버리고 현실을 바로 보는 게 아주 필요하다고 판단했어. 그래야만 나중에 제대로 된 친밀감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공항을 빠져나갔단다.

 

너무도 넓은 땅… 내가 얼마나 작고 고지식한 미물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시가지를 지나 택시를 타고 존의 집으로 가는 동안, 사람 사는 데는 어디나 그럭저럭 비슷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 어쨌든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야 하니까.


존이 동두천에서 속삭인 말은 대부분 허풍선이란 게 차츰 시일이 흐르면서 드러났지만 백프로 뻥은 아니기에 내가 잘해 실현시켜 보려고 해. 나름 정은 많아서 매일 껴안아 주며, 어서 빨리 나를 닮은 아기를 낳아 달라고 조르고 있어. 호호…

 

시부모도 인간미 있는 분들이라 어떤 편견 없이 아주 잘해 주셔. 한국 노친네들도 조선족이나 베트남 등지에서 시집온 며느리들을 따스하게 대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

 

아 참, 출국할 때 적어 온 은희 전화번호로 연락해 보았는데 전혀 불통이었어. 아무래도 무슨 사단이 있지 않나 싶어 걱정인데 어찌 해볼 방도가 없어서… 막 겁이 나곤 해.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속담에 배신당한 적이 너무 많으니 말야. 어디서든 별일 없이 살고 있으면 좋을 텐데… 이런 얘길 하면 괜히 우울해지니깐 그만 할래.


난 여기서 열심히 살 거야. 이곳 아메리카 어딘가에 뼈를 묻을 각오로 일하고 새끼를 낳아 퍼뜨릴 테야. 그러면 어느 훗날 제삿술 한잔 받아 먹을 수도 있으려나… 호호, 사람 맘은 참 간사한가 봐. 떠나오고 보니 더 그리운 고향… 그곳에선 늘 쌍을 찡그리며 무시했던 고추장과 된장과 김치찌개가 얼마나 먹고 싶은지…

 

그리고 밤마다 꿈에 이따금 나타나는 기억이 있어. 고향의 낡은 초가집 우물가에서 검둥개가 새끼를 낳는 장면인데… 그건 실제로 있었던 일이기도 했거든. 그래도 꿈과 사실이 막 헛갈려. 우물 옆에 선 오래 묵은 무화과 나무엔… 새악시가 구박을 못 견뎌 목매 죽었다는 얘기가 떠돌았지.


검둥개는 바로 그 나무 밑에서 말없이 헐떡거리며 새끼를 낳고 있었어. 초여름 오후라 학교에서 돌아오니 모두 논밭에 나갔는지 집은 텅 비어 괴괴했지. 어린 계집애였던 난 처음엔 너무 놀라 울음을 터트렸어. 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고통스런 신음소리와 허연 침과 꼬리 밑의 핏물…

 

난 개가 죽는 줄 알고 캄캄한 천둥번개 같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떨었어. 하지만 얼마 후 검둥이가 무녀리 첫 새끼를 낳고 이어서 두 마리 세 마리… 다섯 마리까지 꼬물이 강아지를 낳는 동안 난 경이스런 맘으로 응원하며 지켜보았어. 마치 내가 낳듯이…

 

검둥이는 기진맥진한 모습인데도 새끼들의 몸을 깨끗이 핥아 주더구나. 그러자 검정과 하양이 여러 가지 무늬로 섞인 강아지들이 귀엽게 낑낑거리며 어미 젖을 빨기 시작했지. 그제야 검둥이는 안락하면서도 연민 어린 눈으로 제 새끼들과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하더군. 내가 가져다 준 국밥은 본체만체한 채….


그 모습을 보며 난 개에게도 내가 모르는 영혼이 흐른다는 걸 느꼈어. 언젠가 아기를 낳으면 피부 색깔이나 생김새가 어떻든 내 몸처럼 사랑해 줄 거야. 한번 속담을 흉내 내 얘기해 볼까 봐… 생명은 영원하고 편견은 변한다… 호호, 정말 그럴까 몰라.

 

어쨌든 우린 그런 희망을 갖고 살자꾸나, 응… 아, 너무 그리워. 너도 이곳에 와서 함께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구 경아, 희영, 안나도 보고 싶다고 전해줘….”

 

<다음 호에는 ‘꽃의 낭떠러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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