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위 전 환경부 장관 특별기고

“일본 종군위안부 실체 알려주는 자료 너무나 많다”

글/김중위(전 환경부 장관) | 기사입력 2019/10/25 [10:56]

김중위 전 환경부 장관 특별기고

“일본 종군위안부 실체 알려주는 자료 너무나 많다”

글/김중위(전 환경부 장관) | 입력 : 2019/10/25 [10:56]

전사자보다 성병환자 많아 전력 떨어지자 군 내부에 유곽 도입
일본 육군성 ‘군 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 공문 발견
종군위안부 부인 한국 학자들 ‘거짓된 역사’ 꾸미는 저의 뭔가?

 

▲ 종군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정하려 드는 일부 한국 학자는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종군위안부! 이 말은 일본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서양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일본군 성노예(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라고 부른다. 군 위안부는 군국주의 일본군의 한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성노예제도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례였다.


일본군이 성노예를 제도화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김운태 교수). 그 첫 번째 이유는 성병 환자인 군인이 전사자보다도 많아 군 전력(軍戰力)을 떨어뜨렸다는 경험의 소산이었다.


일본은 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18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했다. 이 전쟁에서 7만2000명의 출병 군인 중 3년 동안 전사 1387명, 전상 2066명인 데 비해 전투에 참가하기 어려운 중증 성병 환자가 2012명이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로 사례로는 1937년 말 난징(南京) 침공 시 자행했던 일본군의 대학살에 이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의 강간 사건들이었다.

 

어린아이부터 어른, 수녀와 비구니에 이르기까지 숱한 중국 여성들은 일본군의 능욕 대상이 되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일본군의 이러한 만행을 아예 국가정책으로 제도화하는 방안으로 마련한 것이 바로 부대 안에 위안소를 설치하고 성노예를 사육하자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김운태 교수는 소화(昭和) 13년(1938년) 일자로 된 일본 육군성 병무국 병무과의 공문 ‘군 위안소 종업부(從業婦) 등 모집에 관한 건’이라는 문서를 발견한 적이 있다.


평생을 일본군 종군위안부 문제에 천착하면서 미국 국가기록보존소를 샅샅이 뒤져 이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한 재미학자 방선주(方善柱) 교수가 쓴 논문을 보면 종군위안부 실태가 더욱 자세하다.


그의 논문에 의하면 일본은 원래부터 유곽(遊廓)제도와 유곽문화가 발달한 나라였다. 일본인의 의식 속에 유곽은 아주 훌륭한 제도였기에 자연스럽게 군 내부에도 이런 제도를 도입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으리라 짐작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도화하고 위안소를 설치할 즈음인 1930년대는 우리나라 농촌이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농촌 사람들이나 빈민들은 도시나 만주로 유랑의 길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다.


당시 일본은 이런 약점을 최대한 이용했다. 주재소 경찰이나 면장 등을 앞세워 위안부를 모집하는 척하면서 때로는 강제 납치와 유괴도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끌려간 처녀들은 전쟁의 종결과 함께 돌아오지도 못한 채 집단 학살된 경우도 있다. 남양군도 트루크 환초(Truk環礁)에 있던 40여 명의 한인 위안부들이 그들이다. 종전이 되자 일본군은 귀국시켜준다고 속여 이들을 트럭에 태우자마자 한꺼번에 학살했다(한국일보 1990년 5월8일자). 자신들이 저지른 죄과가 탄로 날까 두려웠던 것이다.


방 교수는 또 일제는 “길바닥에서, 논에서, 빨래터에서 여성들을 강제 연행했으나 이런 상황을 꾸준히 고발하며 성찰한 사람들도 다름 아닌 일본인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현재의 아베 정권이 짐짓 알고도 부인하고 있지만 일본 도쿄 한복판에는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된 위안부 전시실이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이 자료관에는 ‘기억의 문을 연 여성들’이라는 안내표시를 통해 10개국 위안부 피해자 155명의 얼굴사진이 한쪽 벽면에 빼꼭하게 채워져 있다고 한다.

 

이 자료 전시관의 관장인 이케다 에리코(池田惠理子)는 찾아간 기자에게 “아베 신조 총리가 전시관을 한 번이라도 와서 본다면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인하는 망언을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조선일보 2013년 6월21일).


뿐만 아니라 1946년 7월5일 네델란드 검찰이 극동군사재판소에 제출한 자료나 미군이 남긴 기록물만 해도 위안부를 어떻게 잡아가고 또 위안소를 어떻게 운영했는지를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조선일보 2013년 8월7일).

 

또 1948년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에서 열린 전범재판소의 재판기록에서도 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하여 성노예로 삼았다는 기록이 공표가 되었다(중앙일보·동아일보 2013년 6월24일).


사정이 이러한데도 일본 종군위안부의 강제동원을 부정하려 드는 일부 한국 학자는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거짓된 역사를 꾸미는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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