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보다 재미있는 명당야사…정몽주 묘터에 얽힌 이야기

정몽주 상여 이끌던 ‘깃발’ 날아간 곳은 천하 대명당

글/장천규(천명동양철학연구원장) | 기사입력 2020/01/10 [11:42]

소설보다 재미있는 명당야사…정몽주 묘터에 얽힌 이야기

정몽주 상여 이끌던 ‘깃발’ 날아간 곳은 천하 대명당

글/장천규(천명동양철학연구원장) | 입력 : 2020/01/10 [11:42]

정몽주 무덤 이장하려 상여 메고 모현읍 지나던 중 회오리 바람
바람 따라 펄럭이던 ‘명정’ 문수산 내려앉아…그곳이야말로 길지
후손들 ‘영천 이장’ 포기하고 모현읍 문수산에 정몽주 묘지 조성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 정몽주 선생의 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 정몽주 선생의 묘가 있다. 정몽주 선생은 고려의 충신으로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 후 고려대신 ‘이성계의 조선’을 따르라 했으나 굴하지 않고 고려의 충신으로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문수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두 개의 혈을 만들었는데, 그 두 개의 혈에는 정몽주 선생과 이석형 선생의 묘가 있다. 이곳에는 두 묘의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 야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후 개성 근처에 무덤을 만들었는데 시간이 지난 후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이장을 하게 되었다. 정몽주의 자손들이 정몽주의 상여를 메고 가는 도중 경기도 용인시 모현읍을 지나가던 중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회오리 바람이다!”


“만장과 상여를 잘 잡아라!”


회오리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 정몽주의 명정(銘旌, 장사지낼 때 죽은 사람의 신분을 밝히기 위해 품계·관직·성씨 등을 기재하여 상여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하관이 끝난 뒤에는 관 위에 씌워서 묻는 깃발)이 펄럭였다.


“명정이 날아갑니다.”


명정이 회오리 바람에 휘날리며 하늘 높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날아가는 명정을 따라 달려갔다.


“저쪽입니다.”


명정은 회오리 바람에 날려 문수산 아래에 내려앉았다.


후손들은 명정이 내려앉은 곳에 도착했다.


“이곳으로 명정이 날아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후손들은 생각에 잠겼다. 경북 영천으로 가는 도중이라 이곳에서 지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명정이 이곳에 날아온 것은 이곳에 묘를 조성하라는 뜻입니다.”


“이곳을 보십시오! 청룡·백호·현무·주작 등 사세가 갖추어진 천하 길지입니다.”


“맞다. 이곳에 묘를 만듭시다!”


그때 정몽주의 증손녀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


‘이 명당 자리를 내가 가져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정명주의 증손녀는 골똘히 생각했다.


‘아! 저 밑의 연못 물을 떠다가 이 자리에 부어야겠다!’


증손녀는 다음날 묘를 쓰기 위해 산소를 손본다는 것을 알고 밤을 세워가며 연못의 물을 퍼 나르기 시작했다. 물을 묘 터의 능선에 계속하여 부었다.


날이 밝고 정몽주의 후손들이 이장을 하기 위해 혈처에 올라왔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이곳이 이렇게 물이 나는 지역이었나?”


증손녀가 밤새 물을 길러 묘 터에 부은 줄 모르는 후손들은 의논했다.


“이렇게 물이 나는 곳에 모시면 안 됩니다.”


“저 옆 능선에 가봅시다.”


사람들은 명정이 떨어진 곳을 포기하고 옆의 혈처에 가보고 깜짝 놀랐다.


“이곳 역시 대명당 터 입니다. 이곳에 모십시다.”


후손들은 하는 수 없이 명정이 떨어진 곳을 포기하고 다른 명당 터에 정몽주 선생을 모셨다.

 

시간이 지나고 정몽주의 증손녀의 남편인 이석형이 세상을 떠나자 증손녀는 친정으로 와서 남편의 묘 자리가 없으니 정씨 문중의 땅을 내달라고 청했다.


정씨 문중에서는 하는 수 없이 “그럼, 자리를 하나 찾아보시오!”라며 허락을 했다.


증손녀는 옛날 정몽주의 명정이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이곳에 묘를 조성하겠습니다.”


“아니, 그곳은 증조부의 명정이 떨어진 곳으로 증조부의 묘를 쓰려 했으나 물이 많이 나서 사용하지 못한 곳이다.”


“아닙니다. 그 자리가 나빠도 이곳에 묘를 쓰겠습니다.”


“이 자리를 주십시오!”


“그래라.”


정몽주의 증손녀는 그곳에 남편 이석형의 묘를 조성했다.


시간이 흘러 정몽주 선생의 후손들이 묘 앞에 비석을 세울 때의 일이다. 정몽주 선생은 조선의 태종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府事 修文殿大提學 監藝文春秋館事 益陽府院君)으로 추증되었는데 후손들은 조선에서 받은 벼슬을 비석에 기록하여 세웠다.


비석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천둥과 번개로 인해 벼락을 맞아 비석이 깨졌다. 후손들은 직감했다.


“이것은 필시 조선 관직을 받은 것에 대한 조상님의 분노입니다.”


“비석에 조선의 관직을 빼고 고려의 관직만 기록합시다!”


후손들은 모두 그 말에 동의를 했다.


후손들은 정몽주 선생의 묘비에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쓰고 비석을 다시 세웠다. 그 후 비석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정몽주 선생은 명당 자리로 이장한 후 문묘(공자를 모신 사당)에 배향되는 동방 18현의 한 분이 되었으며 그 후손들은 번성했다.


풍수가들은 이석형의 자리가 더 명당이라 하여 이석형의 후손들이 정승·대제학·판서 등 과거급제자가 수없이 많이 나왔으며 연안이씨가 조선의 명문가가 되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정몽주 선생의 묘나 이석형 선생의 묘 모두 천하 대명당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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