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권 세태풍자 소설 ‘불 꺼진 무인등대’ <7> 동해 할망

“인생살이 그런 거지…어느 집구석인들 문제가 없을까”

글/김영권(소설가) | 기사입력 2020/02/14 [11:59]

김영권 세태풍자 소설 ‘불 꺼진 무인등대’ <7> 동해 할망

“인생살이 그런 거지…어느 집구석인들 문제가 없을까”

글/김영권(소설가) | 입력 : 2020/02/14 [11:59]

“저눔 할애비인 김일성이는…” “과거사 너무 집착지 말게”
왕년의 떡집 할배와 고물상 영감, 술잔 기울이며 이념 논쟁

 

편한 분위기 취한 손님들 삶의 고민, 집안 문제 꺼내 놓고…
동해 할매 “생선 가시 발라 먹듯 견뎌 넘어가는 게 삶의 묘미”

 

Q는 멍하니 서 있다가 발길을 옮겨 어느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큰 개암나무 옆의 허름한 건물 앞에 멈췄다.


그는 ‘희망’이란 글자만 간신히 남아 있는 낡은 유리문을 밀었다. 그러고는 백발 할매에게 고개만 까딱한 후 밖에 선 채 나무 밑 화단의 꽃들을 바라보았다. 한창 때의 어여쁨을 지나 이제 시들어감의 허무 미학을 보여주고 있었다.


5분쯤 후 안으로 들어가자 밥상이 거의 차려진 상태였다. 가지 무침, 호박전, 시금치와 질금 나물, 데친 두릅, 풋고추에 된장, 겉절이 김치 등등…. 채소 위주의 반찬이었다. 잠시 후 해물찌개가 담긴 뚝배기가 나오자 식탁은 한층 풍성해 보였다.


아담한 식탁이 네댓 개쯤 놓인 좁은 공간엔 대부분 낯익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원래는 여자들의 수다로 시끄러운 편인데 오늘 따라 야쿠르트 아줌마와 꽃집 아주머니는 얌전히 식사 중이고, 왕년의 떡집 할아버지와 고물상 영감 그리고 페인트 가게 아저씨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한창 떠들어대고 있었다.

 

▲ 사진은 경주 성동시장 밥집에서 뷔페를 즐기는 사람들. <사진=최갑수(여행작가)> 

 

허름한 밥집에서 이념 전쟁


“아따, 저놈의 애숭이 녀석은 제 할애비 덕분에 북한 괴수가 돼 낼모레면 미국 대통령하구 만난다는디…평생을 뭣 빠지게꼬롬 지랄 고생한 난 도대체 뭐여, 엉?”


고물상 영감이 탄식조로 내뱉곤 소주를 쭉 들이켰다.


“허허, 그래도 제 할아비와 아비 뺨치고 영웅이 될 수도 있는 눔이니 너무 그리 욕하지 말더라구…. 현재 자기가 처한 어려운 상황보다 그걸 극복해 꽃피우는 사람이 영웅이니까 말여. 자기 인생을 어찌 살아왔는지, 어려운 고비마다 어떤 결단으로 넘어왔는지 스스로 반성해 보는 게 더 필요한 시점이여.”


왕년의 떡 기술자가 대꾸한 뒤 막걸리 잔을 들어 천천히 음미하듯 꿀꺽꿀꺽 마셨다.


“허허, 이거 참 말세의 언어도단이여! 저놈들이 과거에 어떤 악독한 짓을 저질렀는지 모른단 말인가? 세상 말짱 헛살았구먼 그려. 저 처참했던 6·25 동족상잔은 알 테니 넘어가더래두…아마 이건 잘 모를 거여.”


“음, 그놈의 엽색행각 말인가 보구먼. 소녀와 처녀들로 이뤄진 기쁨조…허지만 그런 건 자고로 남한 대통령과 권력자 그리고 부자들이 더 신나게 누렸을 텐데 뭘.”


“허참, 대동강에 나룻배 슥 지나가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니깐두루.”


“그럼 피비린내 나는 정적 숙청 말인가 보구먼. 음, 그것 또한 남한에서도 역시….”


“어허, 참 뭘 잘 모르는군. 한 국가를 경영해 나가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흠, 그런데 이건 그놈이 국가 대의를 위해 그런 게 아니라, 사리사욕 땜시 벌어진 거여. 말 그대로 제 손으로 직접 사람을 죽인 살인자!….”


“그건 금시초문인걸. 혹 유언비어 아녀?”


“흥, 잘 들어 둬. 저눔의 할애비인 김일성이는 열일고여덟 무렵 이웃집 물건을 훔치려다 발각되자 동네 노파를 목 졸라 죽이고, 그 끔찍스런 장면을 목격하곤 달아나는 친구 또한 돌로 뒤통술 내리쳐 살해했다는 얘기여…그런 뒤 만주로 도망쳤다가 항일 독립군 대장으로 위장한 소련의 앞잡이로 변신해 북한 괴수가 된 거란 말이시.”


“과거사에 너무 집착하면 좋질 않어. 정신분열병의 원인이 된다잖어.”


“설령 정신병자가 되는 한이 있더래두 진실을 밝힐 건 밝혀야지.”


“어허, 참…너무 그러니까 고물인생이 되도룩 고물상이나 하고 있는지 몰러.”


“아니, 이 무식한 떡장수가 찹쌀 맵쌀 분간 못하는 소릴 지껄이는군, 엉?…야, 정신 차려!…우리 이러지 말고 평소의 마음으로 한번 돌아가 보자구…만일 자네가 나를 목 졸라 죽였다고 한번 가상적으루다 생각해 보자구. 떡장수 자넨 아마 양심의 가책 땜시 고민함시롱 떡을 만들지도 먹지도 못한 채 차츰 빼빼 말라 가다가 자살할지도 몰러.”


“…?”


“그런데 김일성이는 점점 더 피둥피둥 살이 찌고 번들번들 웃음 지으면서 수많은 자기네 인민과 우리 대한민국 국민을 농락 유린하지 않았느냔 말야…그리고 지금 그 철면피 얼굴은 자식을 지나 손자에게 대대손손 전해지고…마치 러시아 인형처럼 속에서 아마 또 계속 나오지 않을까? 너무 닮아 보여 구역질이 나고 진저리칠 지경이라니께….”

 

저들의 상처는 누가 치유하나?


낡은 텔레비전 화면이 바뀌어 광고 방송이 나오자 두 노인은 각각 막걸리 잔과 소주잔을 들어 건배하곤 쭉 들이켰다. 한번 시작된 암보험 광고는 끝없이 반복되었다. 드라마를 통해 인기를 얻은 탤런트가 나와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계속 되풀이했다. 지겨울 정도였다. 도대체 암을 조심해 건강을 챙기라는 건지, 반복 암시에 무의식적으로 세뇌돼 암에 걸리라는 건지 의심스럴 지경이었다.


백발 할매가 리모컨을 집어 눌러 화면이 바뀌었다.


광화문 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깃발을 흔들며 소리치고 있었다. 한반도기, 태극기, 성조기 등이 바람 불지 않는 청명한 날씨임에도 사람의 기운에 의해 마구 펄럭였다. 그들은 패거리를 이루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대체로 깃발을 흔드는 방식이 조금 달랐다.


울긋불긋한 원색 옷을 걸친 노인장 위주의 패거리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상하좌우로 격렬히 흔들어댔다. 그에 비해 평상복 차림의 사람들은 자연스레 생기 띤 얼굴로 웃음 짓기도 하며 깃발을 흔들되 수직보다는 수평적으로 부드럽게 흔들다가 어느새 저절로 태극무늬를 그리는 것이었다. 그 패에도 노인은 있었으나 젊은이 못잖게 풋풋해 보였고, 성조기를 치흔들어대는 패에도 중년 남녀가 섞여 있었는데 오히려 늙은이들보다 한층 더 기묘한 광기에 사로잡힌 모습이었다. 노인의 부드러움도 청춘의 순수성도 어디선가 잃어버리거나 빼앗겨 버린 듯싶은 저들의 상처를 과연 누가 어떻게 치유해 줄 수 있을까?


바야흐로 한반도는 다시 보기 어려운 풍운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파격적인 남북한 정상회담에 이어 곧 북미 정상회담이 벌어질 판이었으며, 또한 전국적인 선거와 전직 대통령 재판이 예정돼 있었다.


정치꾼 모리배들은 대승적 관점에서 나라와 국민의 앞날을 생각하기보다 자기네 파당의 이익을 위해 확성기를 들고 마치 개가 짖듯 떠들어댔다. 그들의 이기적인 선전 선동에 의해 국민은 광화문 광장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지 못한 채 서로 쪼개져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는 셈이었다. 특히 이성을 잃고 광분하는 일부 꼴통 잔당들의 짓거리는 인간이길 아예 포기한 미친 개짓 같았다. 과연 누가 저들을 저런 꼴로 타락시켰는가?


“낼모레 트럼프와 정은이가 싱가포르에서 만나면 대체 어찌 될랑가 모르겄네. 잘 돼야 헐 텐디…….”


옛 떡장수 할배가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잘 되긴 개똥 지랄이 잘 돼? 아마 모르긴 몰라도…얼마 전 두 놈이 주거니 받거니 도박을 벌이다가 욕지거리 끝에 파토 놓았듯 이번에도 그 꼬라지 나고 말걸. 아, 옛날 김일성이 때부터 회담이니 뭐니 요란뻑적허게스리 나팔을 불어댔지만 다 깡통 깨지는 소리에 불과했잖은감. 지금 두 녀석 다 쇼를 하고 있는 거여. 트럼프는 특검수사와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기 땜에 미국 국민을 슬쩍 속여야 허구, 정은이 녀석은 붕괴 위험에 처한 공산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트럼프 카드로 일대 도박을 벌이는 중이란 말여. 허헛, 괜히 멋모르고 헛물 켜지 말란 말여.”


고물상 영감이 제풀에 흥분해 콧김을 내뿜으며 뇌까렸다.


“그래도 이번엔 쇼든 도박이든 큰 도박판이여. 전 세계 사람들이 지켜볼 테니 말여. 만일 사기 도박판이란 게 드러난다면 이 세상은 우스꽝스런 청개구리 개골창이 되는 셈이겠지. 미국도 북한도 설령 떡을 치더래두 그딴 식으로 치진 않을 거구먼.”


“흐흥, 아마 이번에도 좋게 할 듯 할 듯하다가 결국엔 깽판을 치고 말 텡께 어디 두고 보랑게.”

 

고물상 영감 vs 꽃집 아줌마


“왜 사기 도박 쇼란 말이 나왔는지 그 원인을 알면 판이 좀 더 잘 보일 거예요.”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던 꽃집 아주머니가 말했다.


두 노인은 논쟁을 멈추곤 자기네에 비해 훨씬 젊은 여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꽃집 아주머니는 말을 이었다.


“아무리 좋은 것도…심지어 사랑마저도…믿음이 없다면 사기 도박 쇼가 되는 거예요. 세상을 오래도록 사셨으니 더 잘 아시겠죠…미국과 북한은 서로 불신이 극에 달해 있는 상태예요. 일반적으로 북한이 워낙 속임수와 사기를 많이 쳐서 그렇다고 알고 있는데, 실상 미국은 더 심한 파천황적인 도박 쇼 중독자이며 낯 두껍고 비열스런 사기꾼이란 얘기예요. 자기네들은 추와 악을 물리치는 아름다운 나라의 정의로운 왕자로 자처하며 온 세계를 제멋대로 마구 주무르고 있잖아요, 네? 강자의 선민의식과 과대망상이랄까.

 

하지만 요즘 미국이 하는 짓을 보면 진정한 강자가 아닌 사이비 깡패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군사력을 앞세운 그들의 강압과 어거지는 아마 약소국 사람들에겐 큰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면서 강도 살인범으로 느껴질지도 몰라요. 우리 한국인도 때때로 그런 걸 느끼잖아요. 특히 북한은 미국과 오랜 세월 적대관계로 지냈기 때문에 서로의 진실을 믿을 수 없고 약속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예요. 이건 개인들 사이에도 마찬가지잖아요. 북한 사람들 눈에 미국은 악마의 제국으로 비친다고 해요.”


“허허, 꽃집 마담님이라 어여삐 봐주려 했더니만 갈수록 태산이로구먼. 울긋불긋한 꽃 속에 묻혀 살다 보니 부지불식간에 빨갱이가 되었는가.”


고물상 영감이 이죽거렸다.


“좀 더 들어 보세요…막걸리 드시면서…6·25 전쟁의 참혹상은 두 분 다 겪으셨겠죠? 남한과 북한 모두 초토화가 되고 수많은 생명은 불귀의 객이 되었죠. 전쟁을 겪은 분들 중에도 사실 모르는 사실이 있어요…미군 폭격기의 무차별 폭탄 투하에 의해 금수강산은 쑥대밭이 되었대요. 미국은 남아도는 재래식 무기를 마치 땡처리라도 하려는 식으로 온 산하에 수십 번씩 연거푸 마구 쏟아부었다는 거예요. 사람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은 거겠죠.

 

미군들도 남의 나라에 와서 애먼 목숨을 잃은 사람이 많지만…삼가 애도를 표합니다만…이 한반도 작은 땅에서 미군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학살극은 너무나 비극적이고 악마적이었단 얘기예요…그들은 남한의 충청도 노근리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죄없는 피난민들을 죽였지만, 적지인 북한에선 차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끔찍스런 짓을 저질렀대요.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황해도 신천군을 점령한 미군은 양민 수만 명을 마구 살해하고 부녀자와 소녀들을 악마처럼 낄낄대며 강간했다더군요. 또 그들은 원암리의 화약 창고에 500여 명의 엄마와 어린애들을 가둔 채 불로 태워 죽였다고 해요. 북녘 각지에서 비슷한 화마지변이 벌어졌기 땜에 그들도 우리처럼 트라우마라고 하는 외상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거겠죠. 미군과 미국을 악마시하는 그들은 피해망상증 환자라고 진단할 수도 있겠으나 그들 자신으로서는 현실인 거예요. 그러니 불신감과 적대의식이 쉬이 지워질 수 있겠어요?”


“꽃요정이 아니라 꽃마녀 같은 이 늙은 아가씨야! 그래서 대체 뭘 어쩌자는 거여, 응?”


고물상 영감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우리 속에 천사와 악마가 있듯 미국과 북한 속에도 악마가 있어요. 지금은 불신의 벽을 넘어 서로 신뢰를 향한 첫걸음을 떼놓으려 하는 순간이니 좀 지켜보자는 거죠.”


“그럼. 개인 간에도 믿음이란 얼마나 중요하던가? 첫술에 배 부를 수야 있겠나.”


왕년의 떡장수 할배가 점잖게 중얼거리곤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따, 요 영감탱이가 꽃마녀의 혀놀림에 녹아 버렸구먼. 음흉 떨지 말구 정신 차려, 이 멍청한 친구야! 괜히 나중에 호랭이 할마시한테 엉덩이 맞지 말구 말이여.”


“추한 소리 그치고 소주로 입이나 헹구지 그려.”


두 노인네가 왈가왈부 실랑이 벌이는 새 꽃집 아줌마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4관왕을 휩쓸며 92년 오스카 역사를 새로 쓴 한국영화 ‘기생충’ 한 장면. 

 

할매네 밥집은 동네 사랑방


Q는 얘기를 듣느라 밥을 아직 반밖에 먹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벽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러곤 수저를 좀 더 빨리 움직였다. 그렇다고 급속도가 된 건 아니고 평소의 속도를 찾은 정도였다.


아침과 저녁을 주로 과일이나 떡 같은 간단한 음식으로 때우는 그에게 점심은 식사다운 식사며 포만감을 향유하는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과식하진 않고 항상 80퍼센트 선에서 수저를 놓았다. 100퍼센트 이상을 먹어 봤자 그 조금의 욕심 탓에 1초 후부터는 만족감보다 괴로움이 엄습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식탁 앞에서의 절제 미학이랄까. 그건 수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얻은 지혜였다.


채소 나물 위주의 소박한 식단이지만 간혹 백발 할매가 고향인 속초에 주문해 특송돼 온 해산물로 만든 요리가 구미를 돋웠다. 매운탕, 청어구이, 가자미 물회, 청정 미역 무침 등…서울 한구석에서 느껴 보는 싱싱한 동해 바다의 특미였다. 술꾼 남편에게 워낙 당한 탓인지 원칙적으로 술은 팔지 않았다. 단골이 반주 삼아 청할 경우 겨우 한두 병 내줄 뿐이었고, 주정이 심한 사람은 다음부터 출입금지되었다.


좀 전의 상황은 약간 예외적이었는데, 아마 오랜 단골인 데다 어쨌든 민족사의 큰 고비를 눈앞에 둔 때인 만큼 사소한 언쟁쯤 그냥 봐주는 듯싶었다. 더구나 심한 드잡이도 아니었고, 나름 고군분투한 꽃집 아줌마가 고물상 영감의 상스런 핀잔을 견뎌 넘어 그 꼴불견 딸기코를 슬쩍 쭈그러뜨렸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백발 할매라곤 해도 고생을 많이 해서 그렇지 나이가 그리 많진 않았다. 예순을 갓 넘었을 뿐인데 염색도 하지 않고 별달리 꾸미지도 않아 퍽 늙어 보였다. 주인이 그렇다 보니 식당의 내부 장식은 수수하다 못해 몰풍경했으며 차림표조차 없었다.

 

벽 한쪽에 붙여 둔 누렇게 바랜 종이엔 잔치국수, 칼국수, 감자 옹심이, 냉면 따위 글자가 씌어 있었는데 그 아래 적힌 가격은 예적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된 음식인 밥은 늘 오곡으로 지었고 국(또는 찌개)는 그날 그날 할매 마음대로 정해 한 가지만 끓였다.


단골들은 식사를 마친 후에도 차를 홀짝거리며 한두 시간씩 죽치고 앉아 수다를 떨 수 있었다. 일종의 사랑방 같다고나 할까. 손님들은 편안스런 분위기에 끌려 삶의 고민과 집안의 문제 따윌 꺼내 놓곤 했다.

 

그러면 할매는 “어휴, 인생살이란 게 다 그런 거지 뭐…어느 집구석인들 아무 문제 없는 데가 있을까. 그것두 자기 복이라 생각허구 견뎌 넘어가는 게 삶의 묘미여. 마치 생선가시 발라 먹듯이…”라고 한 마디 툭 던졌다.


그런 백발 할매에게도 이빨 새에 낀 가시 같은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건 서른이 넘도록 결혼하지 않고 연애도 하지 않는 막내딸 때문이었다. 술고래 아비한테 질려 남자를 싫어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면 야쿠르트 아줌마는 “그깐 걱정일랑 말어유. 아즉 필이 꽂히는 녀석이 없는 모냥이쥬 뭐. 인연을 만나먼 지가 먼저 사죽을 못쓸 텐께유…아줌씨도 옛날 옛적에 아저씰 고렇게 만나 연애한 결과 연이를 본 게 아닌감유 뭐…” 하곤 호호 웃었다. 할매는 대꾸 없이 입속으로만 죽은 술꾼 영감을 향해 지청구를 해댔다.


백발 할매의 남편은 우물 파는 기술자였다고 한다. 수도가 보편화되기 전 우물은 한국인의 성스런 식수원이었기에 한땐 돈도 많이 벌었다. 하지만 집구석엔 한두 푼 갖다 주었을 뿐 모조리 주색잡기로 탕진해 버렸다. 그러곤 어느 날 자기가 판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얘기였다. 할매는 때로 백발을 세게 흔들며 중얼댔다.


흥, 그 이기적인 주정뱅이 영감탱이가 이 세상에 환락을 남겨두고 스스로 갔을 리 없지. 필경 자진이 아니라 실족했을 거구먼….


Q가 숭늉까지 마신 다음 밥값을 내고 밖으로 나서려는데 백발 할매가 급히 부르더니 봉다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감자가 하두 토실토실해 몇 개 넣었은께 나중에 출출할 때 먹어.”


“아니, 됐어요. 오늘은 도서관이 아니라 시내로 나가야 해서요.”


“시내에선 핫도그만 먹고 감자는 못 먹는감? 빨랑 가방에 넣어 가더라고.”


Q는 거듭 사양했으나 할매는 끝끝내 건넸다. 간혹 식사 전후에 파전, 찐고구마, 무화과 따위가 디저트인 양 나오곤 했는데 Q가 배부르다며 물리쳤기에 봉지에 싸 주곤 했다.


“아따, 저 할마시가 훤칠한 미남 총각에 홀려 사위 삼으려나 보구먼. 딸내미보담두 할마시 자신부터 먼저 생각하고 여기도 맛난 것 좀 내오랑께.”


고물상 영감이 이죽거렸다.


“저 영감탱이가 오늘 따라 왜 자꾸 저 지랄일꼬? 이태백 따라 취한 김에 황천 가려나, 응?”


할매도 지지 않았다.


Q는 마지못해 봉다리를 받아 들고 밖으로 나섰다. 개암나무 그늘이 서늘했다.


<다음 호에는 ‘이면도로’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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