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기생충 핏빛 엔딩 노래로 장식한 성악가 이지혜

“헨델 오페라곡 추천…봉 감독은 다 계획이 있었더군요"

이재훈(뉴시스 기자) | 기사입력 2020/02/21 [12:06]

‘기생충’ 기생충 핏빛 엔딩 노래로 장식한 성악가 이지혜

“헨델 오페라곡 추천…봉 감독은 다 계획이 있었더군요"

이재훈(뉴시스 기자) | 입력 : 2020/02/21 [12:06]

핏빛 비극 휘몰아칠 때 ‘나의 사랑하는 이여’ 열창곡 흘러
“전체 영화음악 분위기가 바로크인 줄 모르고 추천했던 곡”

 

▲ 뮤지컬 배우 이지혜가 2월18일 오후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인터뷰를 마친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카데미 4관왕’에 빛나는 영화 <기생충>의 클라이맥스.  박 사장(이선균 분) 아들 ‘다송’의 가든 생일파티,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가족이 번영할 거라 믿고 있던 기택(송강호 분)은 인디언 복장을 하고 있던 그 자리에서 선을 넘고 만다.


박 사장이 기택을 마음에 들어 한 이유는 (계급의) 선을 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특유의 냄새’로 특정되는 계급적 차이는 근본적으로 나눠져 있었다. 파티에서 그 선의 침범이 명확해진 순간 기택의 손으로부터 박 사장에게 칼이 꽂히는 파국이 빚어진다.


관객들이 이 기이하면서도 잔인한 장면에 소스라칠 때 음악이 흐르면서 장면 전환을 알린다. 헨델의 오페라 <로델린다>의 아리아 ‘나의 사랑하는 이여(Mio caro bene)’가 흘러 나온다. 권력욕이 넘친 귀족으로부터 쫓겨난 왕이 (<기생충>에서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근세처럼) 감옥에 갇혀 있다 나오자 왕비 ‘로델린다’가 그 재회를 기뻐하면서 부르는 노래. 나중에 곡이 전조가 돼 어두운 풍의 단조로 바뀌는 부분에서 영화는 핏빛 비극으로 몰아친다.


영화에서 이 곡을 부르는 성악가 역을 뮤지컬 배우 이지혜가 맡았다. 단역이지만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분위기를 결정짓는 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지난 2012년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엠마를 통해 데뷔한 이지혜는 첫 영화 오디션을 봉준호 감독의 작품으로 치렀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캐스팅된 행운의 배우다.


봉준호 감독은 중앙대 성악과 출신인 이지혜에게 출연 장면에 사용할 음악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나의 사랑하는 이여’는 이지혜가 추천한 곡 명단에 포함돼 있었고, 봉 감독이 이 곡을 골랐다. 


헨델은 바로크 시대를 완성한 작곡가로 정재일 음악감독과 봉 감독이 작품의 전체 분위기로 구상한 바로크와도 기가 막히게 접점을 이뤘다.


최근 흥인동 충무아트센터에서 만난 이지혜는 “영화의 전체 음악 분위기가 바로크인 줄 모르고 추천했던 곡”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내가 성악도였을 뿐인데 ‘감히 추천을 어떻게 할 수 있겠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며칠 동안 고민에 고민을 했죠. 연주하는 악기가 첼로만 있다고 해서 떠오른 것이 바로크였어요. 처음에는 ‘나의 사랑하는 이여’가 튈까봐 걱정을 했죠. 그런데 영화 전체에 바로크 양식이 녹아 있는 것을 보고 ‘감독님은 다 계획을 갖고 계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하하. 오페라 <로델린다> DVD도 구해서 다 보셨더라고요.”


처음 접해본 영화 현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봉준호 감독님을 비롯해 스태프 들이 모두 좋아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았죠.”


영화에서 맺었던 인연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함께 작업하기도 한 정재일 음악감독이 지난 2월15일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아이마켓홀에서 연 단독 콘서트 현장을 <기생충>에서 연교 역을 맡은 배우 조여정 등과 함께 찾았다. 이지혜는 이 영화를 통해 조여정 등과 친분이 생겼다.


이지혜는 정 감독의 콘서트에서 <기생충>에 삽입됐던 ‘짜라구리’와 ‘믿음의 벨트’가 연주되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며 한참 동안 음악 이야기를 즐겁게 이었다.


운명 같은 <기생충> 출연은 안주하지 않은 이지혜의 성향 덕이기도 하다. 이지혜는 뮤지컬계에서 청순가련한 대표 캐릭터인 엠마로 데뷔한 이후 한 동안 ‘첫사랑 전문 배우’가 통했다.<베르테르>의 롯데, <드라큘라>의 미나, <스위니 토드>의 조안나, <팬텀>의 크리스틴 등이다.


비슷한 역만 맡아도 뮤지컬배우 이지혜의 위상은 공고했을 것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을 오필리어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뮤지컬 <오필리어> 등 캐릭터 변주를 고민해온 그녀는 2017년 뮤지컬 <레베카>의 ‘나(I)’ 역을 맡아 한 단계 도약했다. 현재 뮤지컬판에서 떠오르는 블루칩 배우 중 한 명이다.


뮤지컬 <레베카>는 아내 레베카의 의문의 사고사 이후 그녀의 어두운 그림자를 안고 사는 남자 ‘막심 드 윈터’와 그런 막심을 사랑해 새 아내가 된 윈터 부인인 ‘나’, ‘나’를 쫓아내려는 집사 ‘댄버스 부인’ 등이 막심의 저택 ‘맨덜리’에서 얽히고 설키는 이야기를 긴장감 넘치게 그린 작품.


<레베카> 속 ‘나’는 뮤지컬에서 성장하는 대표 캐릭터 중 하나다. 극 초반에는 연악하고 지켜주고 싶은 순수한 모습이 부각되지만, 전개가 될수록 댄버스 부인은 물론 레베카의 그림자에도 지지 않는 당당함을 보여준다.


5번째 시즌을 공연 중인 뮤지컬 <레베카>(3월15일까지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 다시 출연한 이지혜는 더욱 더 깊어진 ‘나’를 보여주고 있다.


“저라는 사람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색깔을 투영했어요. 2017년도의 ‘나’는 리액션을 하기 바빴죠. 제가 할 것만 찾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상대 캐릭터의 감정이 어떨까’에 초점을 맞추지 못했죠.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은 경우도 많았죠. 그런데 이번에는 디테일이 쌓였어요. 그러다 보니 리액션의 반응도 달라졌고요.”


호평을 받고 있는 이지혜의 ‘나’ 캐릭터 해석에 ‘서브 텍스트’의 겹도 더 층층이 쌓였다. 예컨대 댄버스 부인이 ‘나’가 레베카를 대체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하고 심지어 레베카처럼 익사하도록 권유하는 장면.


열린 창문 밖 폭풍우가 몰아치는 레베카의 침실에서 ‘나’와 함께 있던 댄버스 부인이 ‘레베카’를 부르고 곧 이어 무대가 회전하면서 댄버스와 ‘나’가 ‘저 바다로 뛰어!’를 주고 받을 때의 폭발력은 어마어마하다.


이지혜는 지난 작품 출연 당시, 해당 장면에서 보이지 않던 바다가 이번에는 보였다고 했다. “짙은 암흑 속에서 무섭게 일렁거리는 바다가 보이는 거예요. 실제로도 너무 무섭고 위협적으로 다가왔죠. 그 파도를 보면서 나의 캐릭터가 극한으로 치닫는 부분이거든요.”


이 장면에서까지 ‘나’는 막심에게 자신은 필요 없는 존재이며 끝내 레베카를 대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후 막심이 레베카 관련 사실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이후 ‘나’가 바다를 볼 때는 안개가 자욱해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는다. 


“‘나’의 마음가짐이 달라진 거죠. 댄버스의 존재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느낀 거예요. 이번 시즌에서 ‘나’가 그렇게 급성장하는 부분에서 성장 궤도를 찾았고 그래서 나의 마음이 크게 다가 왔어요.”


연약한 보트를 타고 이국의 바다를 구름처럼 떠다닐 것 같던 나는 그렇게 이지혜를 만나 눈부신 당당함을 뽐내며 주체적인 여성으로 거듭난다.


청순가련 이지혜의 겉모습만 본 관객과 팬들은 예상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지혜는 털털하며 ‘4차원의 매력’도 가지고 있다. 국내 창작 뮤지컬 캐릭터 중 가장 적극적이며 재기발랄하다는 평을 듣는 <난쟁이들>의 백설공주 역을 맡고 싶다고 공공연하게 말할 정도다.


이처럼 이지혜는 다방면으로 많은 고민을 하는데 일부 주변에서는 “너 정도의 캐릭터면 확실한데 무슨 고민을 하느냐”고 묻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제일 잘 안다고 겸손한 이지혜는 “스스로 당당하게 ‘배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내게 포장된 부분이 있을 수 있어요. 어쨌든 팬들, 기자들도 저의 꾸며진 모습을 보게 되는 거죠. 그러니 혼자 있을 때도 나를 채찍질하지 않으면 ‘고인 물’이 될 것 같은 우려가 생기죠. 고이기 시작하면 촌스럽게 되는 거죠.”


지난해 10월 역삼동 최인아책방에서 열린 아티스트 토크 ‘뮤지컬 배우 이지혜’를 통해 소규모의 공간에서 팬들과 진심을 터놓고 만나고, 3월4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카이·강홍석·민경아 등 다른 뮤지컬 배우들과 갈라 콘서트 ‘비욘드 더 베스트‘를 여는 등 다양한 작업도 열심히 하는 이유다.


하지만 연연해하지는 않는다. 세상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뒤 얻은 초연함이다. 너무 출연하고 싶어하던 작품의 오디션에서는 떨어지고, 역시 출연하고 싶었지만 ‘내가 감히’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비운 오디션에서는 합격했던 경험도 반영이 됐다. ‘후자의 대표적인 예’가 <기생충>이었다.


“한때 정말 초조하게 살면서 정작 내것을 돌아보지 못한 순간들이 있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성공과 실패를 감히 단정지어 가능성을 줄이는 경우도 있었죠.”


무대 위에서 성장한 <레베카>의 ‘나’는 결국 현실에서 성장한 이지혜이기도 하다. 뮤지컬은 ‘꿈의 세계’로 여겨지지만 이지혜는 그 세계에 정당성을 불어놓고 현실과 맞물리게 만든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끝없이 살고 또 산다.


“<레베카>의 ‘나’를 만난다면 토닥여주고, 안아주고 싶어요. ‘여태까지 잘해왔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요. 여러 힘듦을 잘 이겨내 대견하고, 잘 성장해서 ‘정말 멋있는 여성이 됐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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