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권 세태풍자 소설 ‘불 꺼진 무인등대’ 제2부 <2> 의혹의 눈-첫 번째 이야기

“새해 국운 예언? 아무리 신명이 밝은들 뭘 전망하겠어”

글/김영권(소설가) | 기사입력 2020/03/06 [13:55]

김영권 세태풍자 소설 ‘불 꺼진 무인등대’ 제2부 <2> 의혹의 눈-첫 번째 이야기

“새해 국운 예언? 아무리 신명이 밝은들 뭘 전망하겠어”

글/김영권(소설가) | 입력 : 2020/03/06 [13:55]

“백화만신이야말로 성녀…그분에 비하면 난 일개 창녀라고나 할까”
“예부터 무당과 창부가 왕이나 정치가 상대로 신탁매음 일인이역”

 

“복잡다단한 나라의 미래운명 예언한다는 게 과연 가능하겠어요?”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미국의 기침 한 번에 흩어져 버리잖아요”

 

화정은 젊었을 적 수많은 무녀(巫女) 중에서도 영험한 꽃요정으로 불렸다. 본래 미인이었으나 내림굿을 받고 영혼이 육체를 물시하게 되자 저승의 정신적인 면이 더해져 그런지 한결 신비스런 모습으로 변해 여느 관능파 인기 여배우보다 더 청춘 남녀의 동경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자신이 고아로 태어났음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어두운 결점을 좀 밝게 활용하려고 애썼다고나 할까. 마치 꽃이 어디에 피어나더라도 환경이나 상황을 탓하지 않고 요정처럼 마술을 부려 어여쁜 환상을 선사하듯이…그래도 어쨌든 부유한 집안의 딸로 입양되었다는 건 행운이 아닐까? 혹은 그렇지 않을까?


그녀는 과거에 신문이나 방송과 인터뷰를 할 경우 이 부분에서는 ‘글쎄요…’ 하고 얼버무리며 입가에 미소를 짓곤 했다. 남들의 운명을 꿰뚫어 통찰해낸다는 영험스런 무당이면서도.


사내의 업무엔 그 미소의 의미를 캐내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 스웨덴 출신 영화배우 그레타 가르보. 인기 절정일 때 홀연 은퇴한 후 신비스런 베일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세상 풍문과 흉측한 사건


세상 풍문에 의하면, 화정은 경상도 남녘 진주에서 태어났으나 어찌어찌하여 먼 강화도 바닷가의 부잣집으로 입양돼 들어갔다고 한다. 아들자식만 넷인 집안의 고명딸인 셈이었다. 섬에서 초등학교를 마치자 인천으로 나가 중고교를 다닌 후 대학은 서울로 진학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강화도 집의 다섯 부자(父子) 형제 간에 어떤 비밀스런 골육상쟁이 무르익던 끝에 해괴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당시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80여 세의 아버지와 둘째아들은 피투성이 상태로 즉사했고, 큰아들은 심한 부상을 입어 빈사 상태였으며, 화가인 셋째는 사흘 전 유럽 여행을 떠났는데, 대학생인 막내아들만 아무런 말도 없이 홀연 종적을 감춰 버렸기에 주요 피의자로 용의선상에 올라 있다는 것이었다. 70여 세에 이른 노모(老母)는 1여 년 전부터 괴질에 걸려 자리보전 중이었으므로, 경찰은 행방이 묘연한 막내를 추적하는 데 수사력을 집중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공전 상태가 자꾸 길게 이어졌다.


사건이 발생하기 한 달 전쯤 화정(호적명은 유은숙)은 이미 서울로 들어가 대학에 다니고 있었지만, 세상 풍문은 왠지 흉측한 살인사건과 그녀 사이에 모종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보려고 상상력을 한껏 발휘하는 성싶었다.


어여삐 성장한 양딸과 다섯 부자지간의 내밀한 욕정이 불씨로 작용해 엽기적인 패가망신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을까 하고 공상하는 것이었다. 여우 같은 년이 몸을 요리조리 잘 놀려 사내들 혼을 빼놓았겠지 뭘.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 간다긴 하지만, 어차피 친딸 아니니깐 지놈들이 스스로 몰래 욕심을 품었는지도 모를 일이지.


그 당시 빗발치던 경찰 조사나 언론 인터뷰에서 그녀는 단 한마디 “양부모님과 오라버니들에게 지극한 사랑을 받았기에 너무 죄스러워요”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물론 베일 뒤쪽에서 수많은 물음과 답변이 있었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스러지고 그 말만 남아 귀신의 숨소리처럼 떠돌았다.


얼마 후 그녀는 학교를 그만두는가 싶더니 마침내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 무렵 우후죽순이나 독버섯마냥 생겨나던 야담과 실화 따위 폭로성 잡지의 극성스런 짓거리도 차츰 시들해지고, 경찰도 방향을 바꿔 주변의 우범자와 원한 관계를 중심으로 수사망을 펼쳤다. 하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한때 세상을 뒤흔들었던 패륜적인 골육간 살인은 결국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됐다.

 

그녀 인생 어떻게 변해갔나?


잠적 후 그녀(유은숙)의 인생은 어떻게 변해 갔을까?


세상에 떠도는 소문이야 가지각색 많지만 사실과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만약 가능하다면 그 진실을 캐보는 것도 그에게 주어진 임무의 하나였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아 보였다.


“흠, 명함이라도 한 장 우선 줘 보세요. 난 아직 댁의 이름도 모르는걸.”


여인은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쭉 펴며 말했다.


“아, 네…명함은 없고…제가 이런 일에 전문이 아니다 보니…저는 그냥 Q라고 합니다.”


사내는 더듬더듬 대꾸했다.


“호호, 아마 여왕의 퀸(Queen)은 아닐 테고 의문의 퀘스천(Question)인가?…설마 요즘 인터넷에서 갑자기 유명해진…그 무슨 미남 천재라는 별명의 Q는 아니겠죠?”


“네, 뭐….”


사내는 긴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하긴 그렇겠지. 그렇다고 실망하진 말아요. 요즘은 가짜 천재들과 인조 성형미녀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니까.”


“네.”


“음, 그래도 얼핏 보니 꽤 미남인 건 사실이군요. 후후, 콜롬보처럼 꺼벙해 보여서 천재라고 하긴 우습지만….”


“네.”


그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뭘 할까요?”


여인은 하품을 했다.


“그냥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시면 되죠 뭐…화정이라는 특이한 존재의 인생에 대해 추억하면서….”


사내는 겸허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나 자신을 추억한다? 후후, 그럼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어 보세요. 아무래도 내가 먼저 알려 드리긴 싫으니까.”


“그럼 가벼운 것부터 하죠.”


“그래요.”

 

▲ 한국의 버뮤다 삼각지로 불리는 신들린 마을 ‘울진리’. 수십 년간 되풀이되고 있는 미스터리 사건 해결을 위해 대한민국 최고의 ‘점쟁이들’이 모였다! 사진은 영화 ‘점쟁이들’ 한 장면. 

 

“백화 만신에 비하면 일개 창녀”


“그레타 가르보라는 은막의 스타는 인기 절정일 때 홀연 은퇴하곤 신비스런 베일 속으로 자취를 감춰 버렸잖아요. 대체 왜 그랬을까요?”


“흠, 위대한 외국 여배우의 심정을 어찌 짐작할까. 혹시 싫증이 나서 그러지 않았을까?”


“영원히 헤로인으로 남기 위한 일종의 술책이란 얘기도 있던데요.”


“글쎄…별로 가볍지도 않은 시작인걸…물론 술책이 판을 치는 세상이니 더 높은 술책으로 대응했을 수도 있겠지. 다른 한편으론 그녀 자신이 그 당시의 세상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걸 깨닫곤…아마도 진정한 자기가 무엇인지 찾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


“그녀는 그 망각의 베일 속에서 과연 행복했을까요?”


“모를 일이지 뭘…80여 년이란 인생 중 40여 년의 세월을 자신의 성(城) 속에 칩거해 지냈다니 보통 여잔 아니겠지. 아마 스스로를 이 세상의 인간이 아니라 옛 이집트의 여자 파라오라고 몽상했는지도 몰라. 그래서 세속의 팬들을 떠나 자진 유폐를 택했을까? 빠르게 늙어 가는 아름다웠던 육체를 팬들이 알아보기 전에 자폐해 버리면…그들의 머릿속에 추한 현실 대신 적어도 환상은 남아 영원히 지속될 테니…그걸 꿈꾸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녀는 그 성채 속에서 얼마나 숨이 막혔을까? 허전하고 허망하고 고독하다 못해 때때로 무서운 공황장애가 영혼을 덮치진 않았을까!…모르긴 해도, 그녀의 본정신이 어떤 식으로든 왜곡돼 자신을 본격적으로 속이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희대의 성녀(聖女)였던지….”


“화정 여사님도 최근 5년여 동안 칩거하셨죠? 혹시 동병상련이라도 느끼셨나요?”


“글쎄요. 시대도 현실도 삶도 아주 다르니까요. 그리고 난 사실 그 불세출의 여배우를 잘 몰라요. 영화 한두 편 본 것뿐…그 외엔 다 풍문이죠. 이미지나 풍문만으론 한 인간…특히 여자의 진실을 알긴 어려울 거예요.”


“그렇겠죠. 여사님의 스승이신 백화 만신님과 곧잘 비교되기도 하는데 어떠세요?”


“그분이야말로 성녀죠. 그분에 비하면 난 일개 창녀라고나 할까.”


“….”


“뭘 그리 놀란 척하세요. 이미 꽤나 알려진 얘긴걸.”


“소문이 아니라 진실이 중요하니까요.”


“호호, 혹시 잡지사에서 미남계를 쓴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말도 곧잘 하는군요.”


“별 말씀을…사실 저는 특정 잡지사 기자가 아니라 무명 작가예요…세상에 알려진 사실이나 풍문보다는, 파란만장했던 시대를 살아온 여사님의 마음속 진실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보고 싶은 거죠. 아마 잡지사에서도 이런 점을 고려해 저 같은 꺼벙이를 보냈을 거예요.”


“그건 오히려 더 무서운 소리예요. 아무튼 난 이미 잡지사 측에도 사실만 얘기할 뿐 마음까진 열어 보인다고 약속하진 않았으니까…그러니 차라리 진실이나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려고 애쓰기보다는, 기존의 언론 보도를 모두 찾아 모아서 흥미로운 소설을 써보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물론 가능한 한 다 찾아보았죠. 흥미 위주는 아니었지만…하지만 왜곡된 사실도 있잖아요? 조작되거나 왜곡된 사실이 진짜 사실보다 더 강력한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고요. 여사님께서도 이번 기회를 활용해 악랄한 왜곡을 바로잡는 게 여생에 유익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호호, 그래 봤자 또 하나의 색다른 풍문을 퍼뜨리는 꼴이겠죠.”


“아니에요. 특히 화정 여사님의…무녀 시절과 요정 시대 사이엔 갭이 너무 커서…어거지로 공상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거든요.”


“호호, 뭘 그렇게 생각하면서 더듬거려요. 어차피 둘 다 사실인걸. 머나먼 옛날 옛적부터…무당과 창부가 신당에서 왕이나 고위층 정치가를 상대로 신탁 매음의 일인이역을 했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잖아, 응?”


“누가 언제 어디서 뭘 왜 했느냐가 더 중요하죠.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보면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 사특한 악녀라는 딱지가 붙기도 하지만, 화정 여사님의 경우엔 어딘지 애처로운 희생화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좀 있으니까 말이죠.”


“이기적인 계집이 누굴 위해 뭘 희생했을까!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영화 제목 같군.”


“어쨌든, 한땐 인생의 운명을 알려주고 나라의 앞날을 족집게처럼 예언하여 세간에 이름이 화려했잖아요.”


“빛 좋은 개살구죠. 생각해 봐요. 한 개인의 운명은 현재의 모습으로 50퍼센트 정도 통찰해 볼 수 있을지 몰라도, 복잡다단한 정치 경제 따위가 뒤섞여 돌아가는 한 나라의 미래 운명을 예언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이겠어요? 그리고 우리나라가 아무리 조리 있게 판을 짜보려고 애쓰더라도 미국의 기침 한 번에 온통 흩어져 버리잖아요, 응? 나라의 운명은 일개 무당의 신통력보다는 차라리 미·중·러 3대국 주정뱅이에게 물어 보는 게 더 현실성이 있을 거예요. 아마 그들은 한국 정치가들처럼 거짓말을 밥먹듯 하진 않을 테니까…그때나 요즘이나 이 나라 정치판은 신의 진리나 바른 정신상태에 의해 진행되는 게 아니라, 정치꾼 나리들의 입맛에 따라 조삼모사(朝三暮四)하는 실정이잖아. 음, 무당한테 나라의 운명을 물으려면 이제 한국이 아니라…저 멀리 제정일치 시대와 비슷한 아프리카의 소왕국으로 가 보는 게 낫겠지 호호….”

 

“국운 예언? 괜히 신명 희롱”


“새해 초만 되면 역술가니 명리학자니 유명한 당골들이 신년 국운을 점치는데…어떻게 생각하시죠?”


“이젠 신도 인간보다 한 단계 강등돼 버린 세상인 것만 같아요. 신탁 예언이 아니라 희망사항이자 엔터테인먼트죠 뭐. 혹시 백화 스승님이라면 가능할지 몰라도….”


“그런데 그분은 가난하고 불쌍한 빈민과 서민들의 컴컴한 앞길을 틔워 주고 고달픈 운명을 어루만져 주었을지언정 그런 예언에 대해서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잖아요? 나라의 만신(萬神)이라고 불리면서도…물론 국태민안 대굿은 꼬박꼬박 노구를 이끌고 나와 거행하시지만….”


“부자와 정치 모리배들이 결탁하여 사리사욕 따라 좌지우지해 버리는 나라인걸…아무리 신명이 밝은들 뭘 어떻게 전망하겠어? 괜히 사람과 신명을 희롱하는 짓이라고 당신 스스로 경계했겠지. 아, 그때 그분의 가르침대로 따랐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으려나….”


“후회되세요?”


“후횔 해본들 무슨 소용 있으리오. 어차피 내 자질이 그뿐이었는걸. 하긴 만약 홀연 그 당시로 되돌아가 선택의 기로에 선다 해도 별다를 수 없는 것…그게 즉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아닐까?”


“….”


“만일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아쉬움이 크다면…후회보다는…오히려 바로 지금 가능한 뭔가를 향해 노력하는 게 낫겠지. 그 누가 그 옛날로 돌아갈 수 있으리…지금 못한다면 다시 그때가 와도 못하고 앞으로도 못하겠지.”


누구의 입에선지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돌아갈 수 있다면 회귀하시겠어요?”


“모르죠. 반반이기 때문에 지금 이러고 있겠지 뭐.”


“가슴속에 늘 하얀 눈이 사락사락 내리나 보네요.”


“언제던가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아. 지금도 강화도를 생각하면 그런 느낌이 드니까. 아무도 밟은 적이 없는 하얀 새벽 눈길 위로 사락사락 내려 쌓이는….”


“신의 말씀 같은 백설이라고 하셨죠. 인간의 허물을 고이 덮어 주는….”


여인은 눈을 살포시 내려 감은 채 감회에 젖은 모습이었다.


“이젠 인간에 의해 오염돼 하늘에서 내려올 때부터 순수히 환영받지도 못하지.”


“가짜로 환호하고 있는 듯싶긴 해요.”


“음…요즘도 그분은 이 미친년더러 다 정리하고 마니산 대신당으로 들어오라고 하시지만…아마 그런저런 세상이 다 싫어서 이렇게 숨어 옹크려 있는지도 몰라.”


“그분 백화 만신님도 이미 연로하신 터라 혹시 후계자를 세우려는 뜻이 있는 게 아닐까요?”


여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불지옥 속을 헤매면서도 반성하지 못하고 히득대는 잡년이 가련스러워 그러셨겠지요.”


그러고는 옹크린 그대로 고개를 숙이곤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다음 호에도 ‘의혹의 눈’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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