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再讀新書 人物論[30]

불완전한 지략가 이사, 권력의 달콤한 맛에 취하다!

글/이정랑(중국고전 평론가) | 기사입력 2020/11/20 [11:39]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再讀新書 人物論[30]

불완전한 지략가 이사, 권력의 달콤한 맛에 취하다!

글/이정랑(중국고전 평론가) | 입력 : 2020/11/20 [11:39]

李斯는 대학자와 지략가, 정치가의 자질 한몸에 고루 갖췄던 인물
“능력 있는 사람은 양식 창고 안의 쥐, 무능한 사람은 뒷간의 쥐”


“세상 살면서 미천한 게 가장 큰 치욕이고 가난한 게 가장 큰 슬픔”
이사의 모략으로 한비는 무고한 죽임 당하는 것 한탄하며 사약 마셔

 

▲ 천하통일을 위한 열망으로 전쟁이 난무하던 춘추전국시대 이야기를 그린 영화 ‘공자 춘추전국시대’ 한 장면.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인가?


<역경(易經)>에서는 “음양이 고르지 못해 일이 잘 안 풀리는 비괘(否卦)가 극에 이르면 음양이 잘 조화되어, 모든 일이 형통한 태괘(泰卦)가 찾아오고, 소인이 극성하여 군자를 잃게 되는 박괘(剝卦)가 극에 달하면 기운이 순환하는 복괘(復卦)가 찾아온다”라고 만물 순환의 원리를 밝히고 있다.


이것이 중국 봉건 관료사회의 운행 법칙이요, 처세의 도리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못 되기 때문에, 부귀영화를 포기하지 못해 이름과 몸을 망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곳간의 쥐, 뒷간의 쥐


중국 역사에 있어서 대학자와 지략가, 그리고 정치가의 자질을 한몸에 고루 갖췄던 인물인 이사(李斯)가 바로 이런 불완전성의 실례라 할 수 있다.


그는 진나라 승상으로 막강한 권세를 누리고 있을 때, ‘재물이 너무 많아서는 안 된다’는 순자(荀子)의 훈계를 생각하며 여러 차례 고향으로 돌아가 개를 키우며 유유자적하는 소박한 삶을 살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공리와 권세에 대한 욕망이 지나쳐 이를 떨치지 못했고 끝내 부자(父子)가 함께 요참(腰斬, 산 채로 허리를 절단하는 형벌)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는 전국시대 말기 초나라 상채 출신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했고, 젊은 시절에는 문서를 관장하는 벼슬을 지냈다. 사마천은 <사기> ‘이사열전’에서 이사의 성격과 관련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이사가 미관말직에 있던 어느 날, 뒷간에 가서 용변을 보다가 분뇨를 훔쳐먹고 있는 쥐들을 발견했다. 쥐들은 분뇨를 먹다가 사람이나 개가 오면 황급히 도망치곤 했다.


얼마 후 그는 국가의 창고에서 편안하게 양곡을 훔쳐먹는 또 다른 쥐들을 발견했다. 이 쥐들은 뒷간의 쥐들과는 달리 놀라거나 두려움 없이 배불리 먹으면서 통통하게 살이 쪄 있었다. 이사는 이 쥐들을 비교하면서 감개 어린 한마디를 내뱉았다.


“유능함과 무능함의 차이는 이 쥐들과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자신의 방법에 달려 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양식 창고 안의 쥐고, 무능한 사람은 뒷간의 쥐다.”


이 이야기는 이사의 성격을 설명해주는 동시에 미래의 결말을 예고하고 있다.


양식 창고의 쥐가 되어 마음껏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그는 미관말직을 사퇴하고 제나라로 가서 유학의 대가인 순자를 스승으로 삼았다. 순자는 공자의 유학을 계승하여 공자의 이름을 걸고 강학에 힘쓰는 한편 이를 개선하여 유학의 전통적인 ‘인정(仁政)’ 관념을 줄이고 법치 사상을 도입했는데, 이것이 이사의 구미에 딱 들어맞았다.


이사는 성실한 태도로 순자와 함께 부지런히 치국과 관료의 자세 등 제왕 기술을 깊이 연구했다. 어느 정도 학문이 이루어지자 그는 순자에게 작별을 고하고 진나라로 갔다.


왜 진나라로 가느냐고 순자가 묻자, 이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미천한 것이 가장 큰 치욕이고 가난한 것이 가장 큰 슬픔입니다. 남보다 잘되기 위해서는 뭔가 큰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지요. 제나라 왕에게는 진취적인 기상과 의지가 없고 초나라도 딱히 추진하는 일도 없습니다. 오로지 진왕만이 큰 뜻을 품고 제와 초를 합병하여 중원을 통일할 준비를 하고 있지요.

 

따라서 진나라야말로 기회를 찾아 큰일을 이룰 만한 국가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제나라나 초나라에 남아 있다가는 망국의 백성이 될 것이 빤한데 어떻게 저의 미래를 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진나라로 가서 기회를 찾고자 합니다.”

 

진왕에게 상소 올렸지만…


순자는 그가 떠나기에 앞서 항상 절제를 염두에 두라는 충고를 잊지 않았다. 잘 나갈 때 지나치게 나아가지 말고 절제함으로써 퇴로를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진나라로 간 이사는 태후의 신임과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던 여불위의 문화로 들어가 능력을 인정받고 작은 관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위치에서는 군공을 세울 수도 없었고 뛰어난 정견을 제시할 수도 없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그는 진왕의 관심을 끌 방법은 상소를 올리는 것뿐이라는 결론을 내린 후, 당시의 형세를 면밀히 조사하여 진왕에게 주청을 올렸다.


“능력이 뛰어나 대업을 이룬 사람들은 대부분 기회를 잡을 줄 알았습니다. 과거 진 목공 시기에 국력이 강성했음에도 중원을 통일하지 못했던 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 주의 세력이 강대하고 위왕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전복시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둘째, 당시엔 제후국들의 역량이 비교적 강대하여 진나라와 비교해볼 때 상당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 효공(孝公) 이후로는 주왕의 세력이 급속도로 쇠락했고 각 제후국 간의 전쟁이 그치질 않아 진나라는 이미 강대해질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이제 국력도 막강해졌고 대왕께서 현덕 하시니 6국을 멸하시는 것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터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제업(帝業)을 세우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니 대왕께선 부디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주장은 진나라와 제후국들이 처했던 실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진왕의 야심과도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이사는 진왕의 인정을 받아 장사(長史)의 자리에 발탁되었다. 이사는 이어서 진왕에게 대정(大政) 방침의 지략을 제공하는 한편, 구체적인 사안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특히 6국의 군신들에게 뇌물을 주어 이들을 서로 이간하고 도의적으로 부패시켜 이들이 연합하여 진에 대항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모략은 큰 효과를 거두었다. 덕분에 이사는 객경(客卿)에 봉해졌고 이때부터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외국인의 등용을 배척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급기야 진왕이 ‘축객령(逐客令)’을 발표하는 일이 일어났다. 한나라에서 온 정국(鄭國)이라는 수리 전문가가 진왕을 찾아와 수로 건설을 종용하고 진왕의 동의를 얻어 공사를 시작했는데, 얼마 후 정국의 정체가 첩자라는 게 탄로 나고 말았다.

 

정국이 수로를 건설하는 진짜 목적은 진나라의 인력과 재력을 소모 시키고 국력을 약화케 하여 동진(東進)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진나라에는 동쪽의 여러 제후국에서 온 첩자들이 갖가지 방식으로 활동을 벌였고, 특히 빈객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韓)나라는 진나라의 인접국으로 진이 6국을 통일할 경우 가장 먼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부 첩자들의 신분이 노출되자 진나라 출신 신하들은 이를 반격의 기회로 삼고 국가의 장래와 관직에서 경쟁해야 하는 자신들의 입지를 내세워 외국인의 축출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진왕은 마침내 ‘축객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초나라 출신인 이사도 객경의 자리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마지막 상소, ‘간축객서’


커다란 실망과 슬픔을 안고 진나라를 떠나던 이사는 국경 가까이 이르러 마지막 방법을 써야 할 생각을 했다. 일단 진나라를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이고, 일생의 공명이 물거품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진왕에게 마지막으로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간축객서(諫逐客書)’다.


“과거 진 목공은 현사들을 폭넓게 받아들이면서 서쪽의 융(戎) 지역에서 유여(由余)를 초빙했고 동쪽의 초 지역에서 백리해(百里奚)를 맞아들였으며 송나라에서 건숙을, 진나라에서 비표(丕豹)와 공손우(公孫友)를 중용했습니다. 이 다섯 사람을 중용했기 때문에, 진 목공은 24국을 합병하여 서쪽 지역의 패자로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또 진 효공은 상앙을 임용하여 변법을 시행하고 풍속을 변화시켰으며 국가를 더욱 부강하게 발전시켜 초와 위를 점령하고 국토를 천 리나 확장했습니다.

 

이로써 진의 국력은 더욱 강대해졌으며, 진 혜문왕(惠文王)은 장의(張儀)의 계략을 받아들여 6국의 맹약을 깸으로써 각국을 진에 복종하게 했고, 진 소왕은 범저의 지모 덕분에 권문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하고 왕권을 강화해 제후들을 압박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진나라는 마침내 제업을 완수할 수 있었지요. 이 4대 군왕들은 객경들을 중용해 나라의 발전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 네 명의 군주가 축객령을 내렸다면 국가의 위신과 실리를 동시에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간축객서’의 논지는 확실한 근거에 입각하고 있어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고 당시 진나라의 실질적인 요구에 크게 부합되었다. 게다가 언사가 매우 간결하고 진지하여 이를 읽은 진왕은 크게 감동하여 즉시 축객령을 철회하고 이사를 다시 불러 정위로 봉했다.


옥에 갇혀 있던 한나라 첩자 정국도 이를 기회로 주상을 올려 자신이 수로를 건설하도록 부추긴 목적은 진나라의 인력과 재력을 소모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진나라에 수로 건설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진왕도 시공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공사가 반쯤 진척된 상황인 만큼 공사를 계속하여 완공하면 만대에까지 혜택을 누릴 수 있음을 강조했다. 진왕은 정국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즉시 그를 석방하고 계속 수로 공사를 주관하게 했다. 이렇게 건설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전국시대 최초의 수리공사인 ‘정국거(鄭國渠)’이다.


이로써 이사는 진나라에서 자신의 입지를 든든히 굳힐 수 있었고 진왕으로부터 확실한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 후로 그는 더욱 승승장구했다. 바로 이때 이사의 동료인 한비가 진나라로 왔는데, 이는 이사에게 엄청난 도전이었다.

 

한비자 죽이기 모략


한비(韓非, 한비자)는 한나라 출신으로 한왕과 동족이었다. 그는 전국시대 말기의 대사상가로 학문이 깊고 생각이 민첩했다. 그는 순자의 사상 가운데 법가 적인 요소를 발전시켜 신도(愼到)의 ‘세(勢)’와 상앙의 ‘법(法)’, 신불해의 ‘술(術)’을 하나로 결합함으로써 완전한 군주전제 이론을 확립했다.


또 그는 <세난(說難)>과 <고분(孤憤)>, <오두> 등 다수의 저작을 남기기도 했다. 특이한 것은, 그의 저작들이 원래는 한나라가 너무 허약한 것을 보고 상소를 올려 책략을 제시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실망과 울분을 품고 쓴 것들로, 한나라 군주에게는 전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는데 진나라로 전해지면서 진왕을 매우 놀라게 했다는 사실이다. 진왕은 한비의 저작들을 읽고 경탄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이 사람이야말로 내가 찾던 인물이다. 이런 인물과 교류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으리!”


인재를 경시하는 한나라와 인재를 중시하는 진나라의 기풍은 이 대목에서 커다란 대조를 이룬다. 나중에 진이 한을 침공하여 형세가 다급해지자 한왕은 한비를 기용하여 진에 사신으로 보냈다.


이사는 학문이나 정치적 외교 능력에서 모두 자신이 한비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진왕이 한비를 눌러 앉혀 중용한다면 자신의 기회는 영영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개인의 공명을 위해 먼저 한비를 제거해야 했던 그가 진왕에게 말했다.


“한비는 한왕의 친족이라 대왕께서 한을 공격하시는데,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을 사랑하면 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지요.”


진왕이 대답했다.


“중용할 수 없다면 다른 곳으로 가도록 보내줘야 할 것이오!”


한비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던 이사가 말을 받았다.


“그를 한나라로 돌려보낸다면 한나라를 위해 모략을 낼 것이고 이는 우리 진나라에 불리한 일이 될 것입니다. 차라리 그가 능력을 발휘하기 전에 죽여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진왕은 이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이사는 옥에 갇혀 있는 한비에게 사약을 보내 자결을 강요했다. 한비는 뜻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무고한 죽임을 당하는 것을 한탄하며 사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이때부터 적수가 없어진 이사는 훨씬 대담하게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다음호에도 ‘이사의 인물론’이 이어집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포토뉴스
11월 넷째주 주간현대 1164호 헤드라인 뉴스
1/3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