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再讀新書…이정랑의 人物論[33]

통치자 되려면 賢者를 스승 삼고 아첨꾼 배척하라

글/이정랑(중국고전 평론가) | 기사입력 2020/12/24 [15:22]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再讀新書…이정랑의 人物論[33]

통치자 되려면 賢者를 스승 삼고 아첨꾼 배척하라

글/이정랑(중국고전 평론가) | 입력 : 2020/12/24 [15:22]

진나라 군주 ‘목공’, 농사꾼 ‘백리해’ 포섭하는 등 평생 인재 활용
연나라 ‘소왕’, 곽외의 말 따라 가난한 이 돕고 백성과 고락 나눠


진나라 무제 사마염은 아첨을 배척하고 청렴한 위엄 과시한 인물
아첨에 속지 않고 귀에 거슬리는 진언 받아들인 도량은 정말 귀중

 

▲ 조정이 부패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후한 말기 대규모 농민봉기 스토리를 그린 영화 ‘삼국지-황건적의 난’ 한 장면. 

 

1. 황제의 스승 백리해와 곽외


춘추전국시대에는 인재를 얻으면 나라가 흥하고 인재를 잃으면 나라가 망하는 현상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진(秦)나라다. 진나라는 사방 수백 리가 채 안 되는 작은 나라였지만 천하를 손에 넣었다. 모두 서로 다른 시기마다 여러 문신과 무신들이 훌륭한 정책을 내고 실천한 덕분이다.


특히 진나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들이 모두 다른 나라에서 온 인재였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법률을 개혁한 상앙, “먼 나라는 사귀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해야 한다(遠交近攻)”라고 주장한 범수, 군현제(郡縣制)의 기초를 다진 이사(李斯) 등은 모두 진나라 출신이 아니다.


미친 듯이 인재들을 끌어모은 이들도 많았다. 춘추전국시대의 진나라 목공(穆公)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진나라는 서주(西周) 시대에는 본래 협소한 지역이었다. 제후의 명칭도 얻지 못하다가 서주 말엽에 와서야 주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을 인정받아 제후로 책봉되었으며, 이후 몇 대에 걸친 군주들의 노력으로 점차 발전하기 시작했다. 목공은 현명하고 유망한 군주였다. 그는 평생 인재를 포섭하고 활용하는 데 힘썼다.

 

목공과 백발노인 백리해 만남


백리해(百里奚)는 본디 가난한 농민이었다. 집안이 너무 가난해 여러 해 떠돌아다니며 다른 길을 찾으려 했지만, 관리가 될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 사이 아내와 자식들마저 뿔뿔이 흩어져 행방을 알지 못했다. 간신히 친구의 추천으로 우(虞)나라의 대부가 되었지만 조금 지나지 않아 우나라는 진(晋)나라 군대에 길을 빌려주었다가 멸망했다. 이때 백리해는 우공과 함께 진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목공은 백리해의 능력을 알아보고 벼슬을 주려 했지만,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던 중 공자(公子) 집을 진(晋)나라에 보내 혼인을 요청하게 되자, 백리해가 신부 수행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진나라에 가고 싶지 않았던 그는 도중에 몰래 빠져나와 초(楚)나라로 들어갔다. 초나라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가 첩자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나이가 많은 것을 보고 소 키우는 일을 맡겼다. 그런데 그가 키우는 소들은 하나같이 튼실하게 무럭무럭 자라는 게 아닌가. 결국, 초나라 성왕(成王)에게까지 그의 명성이 알려졌다.


공자 집은 늙은 종 하나쯤 달아난 것 따위에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진(晋)나라의 밭에서 특이한 용모의 장사를 보았다. 그 장사는 커다란 괭이 한 자루로 빠르게 땅을 파고 있었다. 집은 그가 기인이라고 판단하여 진(秦)나라로 데려왔는데, 이 장사가 바로 후일의 명장 공손지(公孫枝)였다.


목공은 신부 수행단의 명단을 보다가 백리해가 빠진 것을 보고 공손지에게 물었다. 공손지는 백리해가 본래 능력이 출중한데도 기회를 얻지 못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목공은 즉각 사방으로 사람을 풀어 그의 소식을 탐문, 드디어 초나라에서 그를 찾아냈다. 목공은 의장을 갖춘 마차로 그를 데려오려 했지만, 공손지가 만류하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종을 맞아들이면 틀림없이 초나라의 의심을 사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백리해를 놓아줄 리 없습니다.”


목공은 공손지의 의견에 따라 다섯 장의 양가죽을 주고 백리해를 바꿔왔다.


백리해를 만난 목공은 그가 일흔 살이 넘은 백발노인인 것을 알고 안 좋은 기색을 보였다. 이에 백리해가 말했다.


“대왕께서 저를 보고 호랑이를 때려잡으라고 한다면 그러기에 저는 너무 늙었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대사를 논하라고 한다면 저는 강태공보다 열 살이나 젊습니다.”


목공은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기고 그와 국가의 일을 상의했다. 뜻밖에도 두 사람은 말을 하면 할수록 의기가 투합하여 사흘을 꼬박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공은 그에게 상국(相國)의 벼슬을 내리려 했지만, 백리해는 자신은 그럴 사람이 못 된다며 대신 건숙(蹇叔)을 천거했다.

 

곧 공자 집이 건숙을 데려왔고, 그의 두 아들인 서걸술(西乞術)과 백을병(白乙丙)도 함께 진나라로 왔다. 목공은 건숙과도 당시의 세태를 논했는데 이번에도 식사를 잊을 정도로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며칠 뒤, 목공은 건숙을 우상(右相)으로, 백리해를 좌상(左相)으로, 그리고 서걸술과 백을병을 대부로 임명했다. 이로써 목공은 한꺼번에 다섯 명의 현명한 선비를 얻은 것이다. 이후 이 다섯 사람은 진나라를 강국으로 만드는 데 온갖 힘을 다 쏟았다. 그 결과 진나라는 천하의 패자가 되기 위한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연나라 소왕과 곽외 만남


연(燕)나라 소왕(昭王)은 황금대(黃金臺, 중국 북경 부근에 있던 높은 대, 전국시대에 연나라의 소왕이 구축하여 그 건물 안에 千金을 두고 천하의 현자를 불러들였다)를 높이 쌓고 천하의 현명한 선비들을 불러들여 연나라가 부흥의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했다.


소왕은 전란으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연나라를 되찾고 왕위를 이었다. 그는 우선 후한 예물로 재능 있는 이들을 초청하여 복수를 준비하고자 했다. 그래서 곽외를 찾아가 물었다.


“제나라는 우리 연나라의 내란을 틈타 습격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세력이 미약하여 보복할 힘이 없습니다. 현명한 인재들을 얻어 국사를 의논하고 장차 선왕의 치욕을 씻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바람입니다. 그러자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곽외가 대답했다.


“황제의 업을 이루는 군주는 현자를 스승으로 삼고 왕의 업을 이루는 군주는 현자를 친구로 삼으며, 패자의 업을 이루는 군주는 현자를 신하로 삼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망치는 군주는 비천한 소인배를 신하로 삼습니다.”


곽외의 이 말이야말로 고대 중국사회의 ‘지식인 정책’을 대변한다. 그가 다시 소왕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몸을 낮추고 현자를 모신다면 자신보다 백 배 나은 인재를 얻을 겁니다. 그리고 다른 이보다 먼저 일하고 늦게 쉬며, 다른 이에게 가르침을 청한 뒤, 깊이 생각한다면 자신보다 열 배 나은 인재를 얻을 겁니다. 또 다른 사람처럼 열심히 일하고 평등하게 사람들을 대한다면 자신과 똑같은 재능의 인재를 얻을 겁니다. 그런데 책상에 기댄 채로 지팡이를 휘둘러 거만하게 사람들을 부린다면 겨우 시종 같은 사람만 얻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거칠게 사람들을 대하고 멋대로 성질이나 낸다면 고작 노예 같은 자만 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옛날부터, 덕 있는 이를 모시고 재능 있는 이를 청할 때 유의해온 점입니다. 대왕께서 정말로 천하의 현자들을 두루 뽑아 쓰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예의를 갖춰 그들을 방문하십시오. 천하 사람들이 그일을 널리 알게 된다면 천하의 지혜로운 선비들이 속속 연나라로 몰려올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방문해야 합니까?”


곽외는 소왕에게 옛적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옛날에 천금을 주고 천리마를 사려는 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3년이 지나도록 사지 못했지요. 어느 날 궁궐의 시종 한 명이 그에게 아뢰었습니다. 자신에게 천 냥을 주면 꼭 천리마를 사 오겠노라고 말이지요. 왕은 쾌히 승낙하고 그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3개월 만에 돌아온 시종은 살아있는 천리마가 아닌 죽은 천리마를 가져왔습니다. 금 5백 냥을 주고 말뼈를 사 온 겁니다. 크게 노한 왕이 시종에게 ‘내가 사 오라고 한 건, 산 말인데, 어찌 5백 냥이나 주고 죽은 말을 사 왔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이에 시종이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죽은 말도 기꺼이 5백 냥을 주고 사는데 하물며 산 말은 어떻겠습니까? 천하 사람들은 분명히 대왕이 정말로 좋은 말을 구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니 천리마는 저절로 굴러들어오지 않겠습니까?’라고요 과연 1년이 채 되지 않아 천리마 3천 필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곽외가 다시 소왕에게 물었다.


“지금 대왕께서 정말로 인재를 구하고 싶다면 저를 먼저 등용하십시오. 제가 등용된다면 저보다 훨씬 능력 있는 인재들은 어떻겠습니까? 수천 리 길도 멀다 않고 달려올 겁니다.”


소왕은 곽외의 말을 따랐다. 황금으로 높은 누각을 짓고 곽외를 스승으로 삼았다. 과연 악의(樂毅)가 위나라에서 왔고, 추연(鄒衍)이 제나라에서 왔으며, 극신(劇辛)이 조나라에서 왔다. 소왕은 힘써 그들을 모시면서 죽은 자를 애도하고 가난한 이들을 도왔으며, 백성들과 고락을 나누었다.


28년 뒤, 연나라는 건실하고 부유한 나라가 되었으며 병사들도 생활이 안정되어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소왕은 드디어 악의를 상장군(上將軍)으로 파견하여 진나라, 조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제나라 군대는 무참히 패배했고 제나라 민왕(閔王)도 다른 나라로 몸을 피했다. 연나라 군대는 독자적으로 패잔병들을 뒤쫓아가 제나라의 도읍인 임치까지 격파했으며, 그곳의 보물들을 전부 손에 넣는 한편, 제나라의 궁궐과 종묘를 불태웠다.


연나라 소왕이 황금대를 지어 현자들을 맞아들인 고사는 미담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그가 복수의 뜻을 이루고 제나라를 거의 멸망시킨 것도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곽외의 한 차례 유세에서 기인했다. “황제는 스승과 함께하고, 패자는 신하와 함께하며, 망국은 노예와 함께한다”는 그의 지식인 정책도 중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곽외는 바로 연나라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근거하여 의견을 제시했고, 그렇게 하여 연나라의 황금시대를 연 것이다.

 

2. 쓴소리 받아들인 사마염


누구나 칭찬 듣기를 좋아한다. 심지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까 말이다. 사탕 발림 같은 말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이는 때와 장소가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첨과 눈가림은 봉건시대 관료사회의 영원한 법보(法寶)다.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이 두 가지 법보는 신기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능력이 부족하거나 이 법보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면 남을 원망할 자격이 없다. 이와 관련된 의미심장한 얘기가 있다.


한번은 옥황상제가 어전회의를 열고 있을 때 관공(關公)이 칼을 차고 문을 지키고 있었다. 관공은 긴 수염을 휘날리면서 대단히 위엄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의 경외심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누군가 그에게 다가가 절을 올리자 관 공이 물었다.

 

▲ 염원하던 삼국통일을 이룬 진나라 무제 사마염 인물화. 

 

제후 장상은 아첨 배척해야


“그대는 누군가?”


낯선 사람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대답했다.


“소인은 아첨의 화신입니다.”


“무슨 일로 왔는가?”


“특별히 천상계의 신선들에게 아첨이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 알아보러 왔지요.”


관공이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천상계의 신선들은 인간들과 다르다. 네놈의 아첨이 통할 리 없을 테니 썩 물러가거라. 네놈이 나를 화나게 하지 않는다면 이 칼을 상으로 주마!”


아첨의 화신이 말했다.


“관공은 의로운 성인이시라 선계(仙界)에서나 범계(梵界)에서나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아첨이 통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모든 이들이 관공과 같아서 아첨이 통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관공께서는 범계에 계실 때 조조의 목숨을 놓아주신 적도 있는데 하물며 잠시 들여보내 주시는 것쯤이야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관공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들여 보내주었다. 잠시 후 아첨의 화신이 나오자 관공이 물었다.


“그래 누가 너의 아첨을 받아주더냐?”


“제 아첨을 받아주는 인물은 단 한 사람밖에 없더군요!”


관공은 기이하게 여기며 그게 누구인지 되물었다. 아첨의 화신이 빙긋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바로 관공이십니다!”


관공은 화들짝 놀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 성인도 아첨에는 약한 법이다. 공자는 일찍이 ‘군자도 속임수에 당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이를 ‘군자도 아첨에 당할 수 있다’는 말로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렇다면 인류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실제로 모든 제후 장상들이 아첨에 속는 것은 아니다. 일부 제후나 장상들은 아첨을 배척할 뿐 아니라, 이를 철저히 제거함으로써 청렴한 위엄을 과시하기도 했다. 진(晉)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이 바로 그런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사마염은 서진 왕조의 초대 황제로, 그의 조부와 부친 대까지는 조조의 위(魏) 정권을 탈취하지 못하다가 그에 이르러서야 위를 대신하여 자립함으로써 70년간 지속했던 3국 분열의 시대를 마감하고 통일의 대업을 완수할 수 있었다. 사마염이 통치한 26년 동안 진 왕조의 가장 위대한 황제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정직한 성격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진 무제 태시(泰始) 8년(272), 사마염은 우장군 황보요(皇甫陶)와 정사를 논하고 있었다. 사마염은 평소 대신들과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일부 성격이 강직한 대신들이 너무 솔직한 말을 해서 무제를 노엽게 하는 일도 있었다. 특히 황보요는 성질이 급하고 솔직한 것으로 유명한 대신이었다. 그는 무제와 의견 차이를 보이자 무제의 말을 가로막고 자신의 주장을 역설했고, 무제도 이에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산기시랑 정휘(鄭徽)는 황보요가 마침내 황제의 미움을 샀다고 생각하고는 재빨리 표를 올려 황보요를 법대로 처단할 것을 요청하면서 황제의 비위를 맞추려 했다. 그러나 예상 밖에 무제 사마염은 정휘의 상소를 읽고 크게 화를 내며 대신들에게 말했다.


“솔직하게 진실을 말하는 것은 짐이 신하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바요. 그래야만 여러 사람의 장점을 두루 살필 수 있기 때문이오. 짐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듣기 좋은 거짓말만 일삼는 사람들이오. 사탕발림으로 군주를 속이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을 것이오.

 

군주에게는 항상 아첨하고 칭송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환이 생기기 마련이지 정직한 쟁론을 펴는 대신들 때문에, 나라가 어지러워졌던 예는 없었소. 자신의 권한을 벗어난 정휘의 주장은 근거 없는 잘못된 지적으로 짐의 본의를 흐리려는 것이오!”


그리하여 정휘는 관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민주적인 감독과 검증의 장치가 없었던 봉건시대에 사마염이 보여준 자아 검증 정신과 아첨에 속지 않고 귀에 거슬리는 진언을 받아들일 줄 알았던 도량은 정말 귀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마염의 아름다운 아량


한 번은 무제가 남교에서 제천의식을 거행했다. 무제는 기분이 매우 좋아 대신 유의(劉毅)에게 말했다.


“그대는 짐을 한 대의 어느 왕에게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소?”


유의가 대답했다.


“소신의 견해로는 후한의 환제(桓帝)나 영제(靈帝)에 비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대경실색했다. 이 두 황제는 한 왕조에서 가장무도하고 무능했던 망국의 군주들로, 무제를 이들에게 비견하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부당한 비유일 뿐, 아니라 죽음을 자초하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제는 화를 참으며 참을성 있게 말을 받았다.


“짐의 덕행이 비록 명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스스로 욕망을 억제하면서 정사를 잘 살피고 동오를 평정하여 천하를 통일하지 않았소? 짐을 대표적인 혼군인 환제와 영제에 비견하는 것은, 좀 지나친 것 같소!”


놀랍게도 유의는 조롱 섞인 투로 말을 계속했다.


“환제와 영제는 관직을 팔아 관고(官庫)를 채운 일이 있습니다만 폐하께서는 관직을 팔아 사고(私庫)를 채우셨지요. 이로 미루어 보건대, 폐하께서는 환제나 영제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주위에 있던 대신들은 놀라다 못해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그러나 오히려 진 무제는 흐뭇한 얼굴로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환제나 영제는 이처럼 날카로운 지적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짐에게는 두려움 없이 솔직하게 짐의 과실을 말해주는 신하가 있으니 환제나 영제보다 못하진 않은 것 같소!”


이 대목에서 장손황후가 당 태종에게 올렸던 간언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번은 태종이 궁정에서 위징의 솔직한 지적에 기분이 몹시 상했다. 위징이 사사건건 자신의 결점을 들춰내는데 크게 격분한 태종이 장손황후에게 말했다.


“내가 위징, 그 늙은이를 진작에 죽여버렸어야 하는 건데!”


장손황후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곧장 안으로 들어가 조복으로 갈아입고 나와서는 웃는 낯으로 태종에게 말했다.


“군주가 현명하면 신하가 정직한 법이라고 했습니다. 위징 같은 신하가 있다는 것은, 폐하께서 명군이심을 증명하는 일이지요!”


이 말을 들은 태종은 금세 화를 풀었고 위징에게는 화가 복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이 두 가지 사례를 비교해볼 때, 일찍이 유례가 없는 성군으로 평가되고 있는 당 태종도 사마염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태종은 지혜롭고 사리에 맞는 신하들 덕분에 정직한 간언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사마염은 주위 신하들의 종용이나 설득 없이도 너무 솔직하여 무례하기까지 한 간언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으니 말이다. 이는 봉건시대의 제왕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고귀하고 아름다운 아량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인성이 아무리 선하고 한 줄기 맑은 물 같다 해도 그것을 담는 물건에 따라 형체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외부적인 제도의 구속이 없다면 맑고 깨끗한 물도, 다 새어나가거나 구정물이 되어 고이기에 십상이다. 도덕의 힘은 불변하지만, 법제가 도덕적인 사회를 근원 없는 물이나 뿌리 없는 나무로 만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도덕의 힘을 맹신하는 것도 위험한 처사다.


도덕은 내용이고, 민주주의와 법제는 형식이다. 이러한 내용과 형식이 조화롭게 결합 되어야만 선한 인성을 발휘하고 조장할 수 있다. 이른바 민주주의와 법제만 있고 도덕이 없다면 인간은 속이 빈 조개껍데기가 되고 말 것이다. 문제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도덕으로 민주주의와 법제를 대체한 시기가 너무 길었다는 데 있다.


이러한 범 도덕주의는 왕왕 군주의 권력 집중을 조장하여 부패와 부정을 유발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중국 역사에 그토록 많은 혼군과 폭군, 탐관오리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봉건 황제들은 ‘국가를 자신의 가정’으로 여기면서도 책임은 자신에게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쉽게 타락했다. 권력만 있고 책임이 없는 민주적 감독 장치마저 없게 되면 인성의 약점이 무한히 팽창해 ‘식(食)’과 ‘색(色)’이라는 두 가지 본성만 남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다.

 

j643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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