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김무성 ‘10년 애증의 역사’ 심층조명

‘무대·공주’ 불편한 동거…‘머슴이 아닌 동지로?’

이동림 기자 | 기사입력 2014/07/21 [09:19]

박근혜·김무성 ‘10년 애증의 역사’ 심층조명

‘무대·공주’ 불편한 동거…‘머슴이 아닌 동지로?’

이동림 기자 | 입력 : 2014/07/21 [09:19]
 
김무성 신임 대표의 등장이 ‘박근혜 정권’의 명운을 가를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김 대표가 이끄는 새누리당이 대통령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에 따라 박근혜 정부 임기 중반의 정치 지형도가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미묘한 관계는 새삼 정치권의 관심을 받고 있다. 그간 박 대통령이 두 번의 대선 가도를 완주하는 동안 김 대표는 늘 지근거리에서 보좌해 왔다. 그러나 이후에는 친박 좌장에서 탈박·비박 등을 오가며 소위 롤러코스터를 탄 듯 오르락내리락하며 늘 미묘하게 관계가 틀어졌다. 10년에 걸쳐 ‘애증의 역사’를 써온 두 사람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조명해봤다. <편집자주>



‘원조 친박’에서 ‘비박 대표’로…롤러코스터 만남 10년
2004년 사무총장 발탁 인연…대선협력에도 묘한 관계
 
2009년 세종시 이전대립·원내대표 추대 거절 후 결별
2012년 대선캠프 팀 합류했지만 여전히 ‘불편한 사이’



▲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7월15일 청와대에서 열린 새누리당 신임 지도부 오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김 대표,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 홈페이지 제공>     © 주간현대

[주간현대=이동림 기자] 현재의 권력인 박근혜 대통령과 ‘미래의 권력’인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애증사’는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 10년 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사무총장으로 발탁하면서 김 대표는 조명을 받았다. 이후 특유의 보스 기질로 ‘무대’(김무성 대장)라는 별칭을 얻으면서 당내에서 세력을 확장했지만 박 대통령과의 관계는 여러 갈래로 얽힌 인연을 맺어왔다.

애증의 역사

김 대표가 지난 7월14일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전당대회 현장을 방문한 박 대통령의 연설 내내 박수 한번 치지 않으면서도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은 모습은 ‘애증’으로 써내려온 두 사람의 10년 관계를 대변한다. 당장 ‘친박’ 주류인 서청원 의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방문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미묘함이 두 사람의 관계에는 터 잡고 있다. 박 대통령이 두 번의 대선 가도를 완주하는 동안 김 대표는 늘 지근거리에서 보좌해 왔다. 그러나 이후에는 늘 미묘하게 관계가 틀어졌다.

박 대통령이 야당 대표 시절인 2005년 당시 국회 재정경제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 의원을 사무총장으로 발탁한 게 본격적인 인연의 시작이었다. 당내 소장파가 김 대표를 겨냥해 ‘인의 장막’을 쳤다는 비판을 쏟아낼 정도로 두 사람의 사이는 가까웠다. YS계로 정치에 입문한 김 대표는 당시 3선 의원으로 친화력과 추진력을 두루 갖춘 것으로 평가돼 당 장악력이 부족한 박 대통령의 빈 곳을 채워줄 인물로 꼽혔다.

이후 화답이라도 하듯 김 대표는 위기 국면에서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박 대통령의 원조 문고리 3인방으로 불리며 승승장구했다. 김 대표는 같은 해 11월 당직에서 물러났다. 경질성이라기보다는 차기 대선 준비를 위한 일보후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정치 스타일은 달랐다. 이후 2006년 대선후보 경선 캠프 구성 시기를 놓고 서두르자는 김 대표의 건의에 박 대통령이 부정적 입장을 내비치며 둘 관계는 냉각국면으로 흘렀다.

그러나 김 대표는 박 대통령이 이명박 당시 대통령 후보에게 밀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대선 캠프 조직총괄본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신뢰를 회복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에 당선되면서 친박계였던 김 대표는 이듬해인 2008년 18대 총선에서 소위 ‘보복공천’의 희생양이 됐다. 김 대표는 이에 부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자신이 주도했던 ‘친박 무소속 연대’ 후보들도 11명이나 당선됐다. 이들은 그해 7월 모두 복당해 당내 친박 세력 확장에 힘을 보태면서 김 대표는 명실상부한 친박 좌장의 위치에 올랐다.

두 사람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2009년부터다. 당시 ‘친박’ 계파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박 대통령은 ‘로키’ 행보를 이어가겠다고 했지만, 김 대표는 “할 말은 하겠다”며 계파색을 드러내겠다며 치고 나갔다. 박 대통령이 이에 대해 “개인 입장”이라고 선을 긋자 정치권에서는 김 대표가 상당히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고 박 대통령과의 사이는 점점 소원해졌다. 게다가 ‘김무성 원내대표설’이 비슷한 시기에 회자됐으나, 박 대통령의 반대로 김 대표는 결국 뜻을 접어야 했다.

무엇보다 세종시 이전 규모를 놓고 원안을 고수한 박 대통령과 달리 김 대표가 ‘7개 독립기관 이전’을 골자로 한 수정안을 내놓고, 박 대통령이 이에 대해 “친박에는 좌장이 없다”고 일갈하며 애증의 골은 더 깊어졌다. 같은 해 김 대표는 원내대표에 도전했다. 박 대통령은 “친박계 좌장은 없다”고 선을 그으며 경고했으나 김 대표는 아랑곳 않고 친이계 지지를 받아 원내대표에 당선됐다. 이때부터 김 대표는 친박계 좌장 꼬리표를 잃고 ‘탈박’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2012년 사실상 친박계가 주도한 제19대 총선 공천에서는 또다시 낙천했다. 김 대표는 이를 수용, 백의종군하는 모습을 보였다. 18대 총선처럼 김 대표가 탈당, 무소속 출마를 감행했다면 당이 쪼개질 위기에 내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는 평이 나온다. 이어진 제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 대통령이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접전을 벌이면서, 김 대표가 당시 선대위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아 백의종군하면서 양측은 다시 ‘공존공생’ 모드로 돌아섰다.

김 대표는 이후 사실상 박 대통령의 암묵적 동의하에 지난해 부산 영도 재선거에 출마해 5선 고지를 달성했고, 최근 세월호 참사 이후 정홍원 국무총리의 후임을 찾는 과정에서 후임 총리 물망에 오르며 ‘박근혜 리스트’에서 아주 벗어난 인물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지만 이번 전당대회 과정에서는 경쟁자였던 서청원 최고위원에게 사실상 ‘박심’이 실리는 듯한 모양새가 되면서 두 사람은 다시 불편한 사이로 이동한 셈이 됐다.

朴과의 대립

김 대표와 박 대통령의 이런 관계를 두고 언론은 10년의 애증이라고 표현한다. 대부분 ‘증오’의 시작은 박 대통령이었다. 일각에서는 ‘2인자’를 인정하지 않는 박 대통령의 스타일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한 새누리당 중진 의원은 “김 대표가 세종시뿐 아니라 각각의 사안에서 한마디씩 박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말을 했다”며 “김 대표 입장에서는 할 말을 했다고 할 수 있지만 박 대통령 입장에서 보면 ‘정말 도와주는 게 맞는지’ 김 대표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전당대회에 참석해 인사를 하고 있다.     © 주간현대

당내 한 재선 의원은 “결정적인 시기일 때 정치를 같이 해 왔던 분들이고 김 대표가 ‘할 말은 하겠다’고 한 만큼 청와대에 비판적인 국민 여론을 충실하게 전달하지 않겠느냐”며 “김 대표에게 기회가 주어진 만큼 당과 국가에 대한 일관된 애정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김무성 대표’ 체제의 임기는 2년으로 2016년 총선의 공천을 포함하게 된다. 7·30 재보선이 끝나고 나면 2016년 총선까지는 한동안 큰 선거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이끄는 새누리당이 대통령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에 따라 박근혜 정부 임기 중반의 정치 지형도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대’라 불리는 성격을 가진 김 대표는 확실히 대통령과 청와대의 결정에도 이의를 제기하는 모습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4월 재보선에서 어렵게 5선 의원이 된 그는 당선 직후 “야당의 체면을 살려주고 야당에 져주는 것이 국회를 원만하게 운영하고, 그것이 또 정권에 도움이 되는 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원내대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흔히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다”(취임 초 정부조직개편안 당시 박근혜 대통령 발언)고 말하곤 하는 박 대통령과는 스타일이 다르다. 그는 새누리당의 다른 정치인들에 비해 대통령에게 직언하는 모습도 종종 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김 대표의 취임 자체가 박근혜 정부의 ‘레임덕’을 가져올 것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정부 입장에선 이제야 겨우 여당 내에 대통령과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구심점이 생긴 것에 불과하다. 다만 김 대표 체제가 출범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가 야당의 의견을 전혀 수용하지 않는 강공 행보를 보인다면 ‘레임덕’은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다. 김 대표로서는 청와대와 야당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우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무대(무성대장)’로 불리는 김 대표는 박 대통령에게 절대 충성하던 그간의 새누리당 지도부와는 다른 ’체질‘을 보여줄 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나 김 대표는 일단은 박 대통령에게 협력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2년의 임기 동안 대통령과 야당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처지로 초장부터 ‘강공’을 퍼붓기는 어렵다. 그렇더라도 ‘무대’의 첫 모습은 비판보다는 협력에 치중한 것이 사실이다. 7월16일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정성근 문화체육부 장관 후보자의 임명 강행 움직임과 관련해 청와대에 쓴 소리를 낸 것도 ‘무대’가 아니라 이재오·정병국·김태호 등 친이계로 분류되는 이들이었다.

정작 ‘무대’는 이날 라디오에 잇달아 출연해 “그래서 그러한 모든 걸 감안해서 최종 결정된 만큼 협조해 달라”며 야당의 협조를 부탁했다. 이후 2시간 만에 정 후보자가 사퇴했지만 박 대통령의 정 후보자 임명 강행 방침에 힘을 보탠 것이다. 직언은커녕 여론을 거스르는 행보였다. 새누리당 대표에 선출된 이후 대통령과 가진 14일 오찬 역시 분위기는 다르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무대’는 “제가 수락연설에서 말씀드렸지만 우리 모두는 ‘풍우동주’다. 어떤 비바람 속에서도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라며 “대통령을 잘 모시고 잘 하겠다”고 선언했다. 김 대표는 “어떻게 만든 정권인데 대통령을 잘못되게 할 수 있느냐. 대통령이 잘되게 모실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이 발언은 “2기 내각이 시작이 되고 당도 새 지도부가 출범을 하고 해서 같은 시기에 같이 출범을 하게 되면 처음부터 호흡을 맞추기가 좋을 수도 있다, 호흡을 맞춰서 국가적으로 큰 과제인 경제회복과 국가혁신을 잘 해주시기를 부탁한다”는 박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화답이었다. ‘풍우동주’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로 중국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원수 대하듯이 했지만 결국 위기에서 하나가 됐다는 얘기에서 나온 말이다. 오월동주와도 같은 뜻이다.

결국 오월이 적대국이었지만 위기상황에 처해서는 생존을 위해 묵시적으로 한 배를 탔듯이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 새누리당도 친박과 비박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상황에 빗대 서로 힘을 모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풀이된다. 김 대표는 박 대통령과 정치적 진로를 함께했지만 MB정부 들어서부터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해 때로는 동지로 때로는 갈등관계로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런 가운데 이날 청와대에서 상견례를 겸한 회동은 두 사람 관계에서 하나의 ‘변곡점’이라고 할 정도로 여러 가지 점에서 의미가 컸고 두 사람의 대화 속에는 각자의 처지도 함축돼 있었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 집권 초 세월호 참사라는 의외의 복병을 만나고 잇따른 인사실패로 집권 후 최대 위기상황에 빠져 있고 여전히 위기상황을 돌파할 것인가가 최대 난제로 떠올라 있는 상황이다. 현 난국을 신속히 풀어내야 대통령은 선거 당시 제시했던 공약의 이행은 물론이고 세월호 후속조치와 국가경영을 풀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갈 길이 급한 상황에서 김 대표의 등장과 친박계 퇴조가능성은 박 대통령으로서는 곤혹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김 대표는 비록 정권의 서슬이 퍼런 집권 초반이긴 하지만 박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처음으로 동업자 위치에 올라 외형적으로는 충성맹세를 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도 ‘풍우동주’란 단어 속에 여러 가지 함축된 의미를 담아 던진 것으로 분석된다.

정치 역학관계

정치적 역학관계로 보자면 박 대통령은 여당의 뒷받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고 김 대표는 여당을 도울 수 있는 수단을 가지게 돼 주종관계가 역전된 느낌도 없지 않다. 당청관계가 원만히 조율되지 않을 경우 정권운용에 지장이 초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박 정체성이 확고해진 김 대표가 풍우동주란 화두를 잇달아 꺼내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태가 장기화된다면 어떻게 될까. ‘무대와 공주’, 아니 이제는 ‘무대와 임금’이 써낼 새로운 드라마가 궁금하다.

baghi81@hyunda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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