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게이트’ 만악의 근원, 최태민 - 1

박근혜 가문과 수상한 인연…“박정희는 사기꾼 이용했다!?”

김범준 기자 | 기사입력 2017/01/17 [17:39]

‘박근혜 게이트’ 만악의 근원, 최태민 - 1

박근혜 가문과 수상한 인연…“박정희는 사기꾼 이용했다!?”

김범준 기자 | 입력 : 2017/01/17 [17:39]
▲ 최태민과 박근혜     © 주간현대

 

최태민은 사실상 생몰년도조차 미상인 그 만큼 사기꾼의 전형을 보이는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공식적으로는 1912년 5월5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주민등록상의 생년월일이며, 언론에서 취재한 최태민의 묘비엔 1918년 음력 11월5일 출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12월8일이다. 또한 지난 1994년 5월1일에 죽었다는 사망도 타살설이 나돌만큼 확실지 않다. 이 최태민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기꾼은 ‘박근혜 게이트’로 촉발된 대한민국의 혼란을 불러온 인물이나 다름없다. 단순히 최태민 일가는 국정농단만 한 게 아니라 대한민국의 세대 간 분열과 갈등이 깊어지도록 부채질한 원흉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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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현대=김범준 기자] 최태민의 직업을 딱 하나로 규정할 수도 없지만, 대략적으로는 사이비 종교 교주이자 기관단체인으로 불린다. 하지만 이면에는 조희팔과 더불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사기꾼이며, 역사상 유일무이한 ‘스님 겸 목사 겸 사이비 종교 교주’를 모두 거친 속을 알 수 없는 음흉한 인물이다. 실제로 오래 전 외신에서도 그를 한국의 ‘라스푸틴’으로 언급하기도 했었다.


특히 지난 1949년 이전에는 주로 치안당국인 일본 경찰이나 치안대에서 근무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국내 독립운동가들을 잡으러 다니는 일제의 순사로 활동하며 당시 일제에 많은 공로를 세웠다.


해방과 전쟁 이후엔 1970년대 들어 서울과 대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등 사이비 종교 행각을 벌이다가 1975년부터 박근혜와의 인연으로 막후에서 권력을 휘둘렀다. 박근혜의 이름을 팔아서 많은 대기업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갈취한 후 흥청망청 돈을 쓰고 다녔다.


그의 사기행각은 그의 딸 최순득 및 최순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부녀가 40년에 걸쳐 박근혜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며 수천억에 달하는 재산을 축적할 수 있게 했다.

 

▲ 최태민이 지난 1973년 5월13일 대전일보에 실었던 영세교 광고. <사진=대전일보>     © 주간현대

 

희대의 사기꾼


서두에서도 강조했지만 최태민은 여러 가지로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행적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의혹이 불거지고 있을 만큼 모든 삶의 궤적에 대한 확실한 점이 적다. 그만큼 인생 자체가 불투명하고 거짓된 구석이 많았다는 소리다.


최태민은 1912년 혹은 1918년에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 서동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확실하지 않으며 어린 시절도 일절 알려지지 않았다. 묘비에는 본관이 수성(수원) 최씨이며 1918년생이라 새겨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수성 최씨 종친회에서 최태민은 우리 혈족이 아니라며 정면 반박에 나섰다.


그도 그럴것이 최태민의 아버지로 알려진 사람은 ‘독립유공자’인 최윤성이기 때문이다. 최윤성은 1919년 3·1 운동 때 독립선언서 1천여장을 인쇄해 배부한 뒤 피신했고, 1920년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 8월을 선고받고 1년여 정도 감옥에서 지낼을 만큼 열성적인 독립운동가 였다. 최윤성은 공훈을 인정받아 지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즉 최태민 일가는 독립유공자 집안인 것이다. 그런데 정작 최태민은 일제강점기 순사 출신이다. 아버지가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었음을 생각하면 당연히 납득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최윤성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해달라고 신청한 사람이 바로 최태민이다. 이 때문에 상식적으로 독립운동하던 사람의 아들을 일본 경찰이 순사로 채용했다는 것도 이상하기 때문에 최윤성이 이후 변절했을 가능성도 있다면서 재심사를 요청하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최태민이 최윤성 집안 호적에 올라있지 않으며 나이도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인가 아닌가를 따지기 전에 최윤성의 아들인가부터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나이는 그당시 사람들은 안맞는 경우가 제법 많으니 그렇다 쳐도, 호적에 없다는 것은 수상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족보 위조’ 여부도 제기되고 있다.


이후 최태민은 불교 승려가 된 적도 있었고, 1969년에는 천주교 세례를 받기도 했다. ‘태민’이란 이름도 각종 가명을 포함해 7번째 이름이다. 처음 이름은 ‘최도원’이었다고 하며, 1927년에 황해도의 재령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고 한다.


지난 1977년 중앙정보부의 ‘최태민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처음 이름을 바꾼 건 광복 직후였다고 한다. 광복 전에 순사였기 때문에 과거를 숨기려고 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광복 직후 이름을 ‘최상훈’으로 바꾸고 강원도에서 경찰 생활을 했다. 이후, 대전과 인천 등으로 옮기기도 하다가 1949년부터 군대에 육군 헌병대 비공식 문관으로 들어갔다고 조사되었다. 이후 해병대 비공식 문관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년 3월 갑자기 군인을 그만두고 이름을 최봉수로 바꾸며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1951년 3월이면 1.4후퇴 이후 국군이 다시 반격하여 서울 재탈환을 하던 무렵으로 전쟁이 한참이던 시기인데, 어떻게 군대를 그만둘 수 있었는지 여러모로 알 수가 없는 인물이다.


이후에도 부인과 다툼이 심해 도망치듯 경상도 절로 들어가 승려 생활을 하기도 하고, 이름도 최퇴운, 공해남, 최방민, 최태민 등 알려진 것만 7개로 다양하게 바꾸며 살았다. 이 정도로 이름을 자주 바꿈은 굉장히 드문 케이스로 한 범죄전문가는 “개명이 잦은 사람들은 신분을 계속 세탁해야 하는 간첩이거나, 사기꾼, 연쇄살인마, 테러리스트 등 죄질이 무거운 중범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의견을 밝혔다. 단 합법적으로 바꾸기는 박근혜를 만난 뒤의 최태민으로 바꾼 개명 한 번뿐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다 가명이었다고 한다.


또한 중정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정치계 입문 시도도 있었다. 지난 1958년 2월 당시 여당이던 자유당에 비당원 공천을 신청한 것을 계기로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5년 후인 1963년 5월 당시 여당이던 민주공화당 서대문구 중앙위원장이었던 적도 있다고 한다.

 

박근혜와 인연


지난 1970년대 초반부터 서울 등 경기도 일대나 대전 등 충청남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등 사이비 종교 행각을 시작했다. 불교, 기독교, 천도교를 종합했다는 교리를 내세웠다. 그는 이를 ‘영혼합일법’이라 칭하며, 영세계의 교리라고 주장했다. 방민이란 가명을 쓰면서 ‘원자경’, ‘칙사’ 또는 ‘태자마마’라는 호칭을 자처했고 스스로를 '단군', '미륵'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일각에서는 이를 ‘영세교’로 칭하기도 한다.


얼핏 보면 대단한 사이비 교주쯤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막상 후세에 그에 대해 조사했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1975년 이전까지 큰 사이비 종교 조직이었던 적은 전혀 없던 것으로 보인다. 보통 구성원 10명에서 30명 사이로 유지되는 소형 집단이었다고 알려진다.


박근혜를 만나기 몇 개월 전까지도 제기동이나 북아현동 등 당시 별로 서울 중심지가 아닌 곳을 이리저리 떠돌아 전세를 살며 계속 저런 걸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제대로 신자들 뜯어먹고 한탕한 부자 교주이기는커녕 잘 사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당시 큰무당 원자경으로 무당들 사이에 유명했었다고 한다. 사 그 당시 최태민은 1973년 7월에서 대전시 선화 1동 동사무소 앞으로 숙소를 옮기고 ‘영세교 칙사관’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병을 고치기 위해 찾아드는 사람들에게 색색의 둥근 원을 벽에 붙여 놓고 ‘나무자비조화불’이란 주문을 외우며 그 원을 집중적으로 응시하도록 했다. 일종의 최면술에 가까웠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방금 전까지 ‘아파 죽겠다’고 소리치던 환자들이 이 의례를 거치고 나면 다 나은 듯이 웃음을 짓는다는 사실이다. 무당들도 ‘원자경’ 교주 앞에서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벌벌 기었다. 뿐만 아니라 원자경 교주를 만나고 난 후 무당들이 신기가 떨어져 그 업을 작파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다른 무당들도 그 앞에 엎드려 절부터 했다. 이로써 그는 신통력 있는 도사로 확고한 위상을 굳히게 된다.
1974년 육영수가 문세광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뒤 마음의 상처를 입은 박근혜에게 1975년 2월경 위로하는 편지를 3차례 보내 박근혜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중정부장이었던 김형욱에 의하면 편지는 죽은 육영수가 최태민의 꿈에 나타나 ‘딸은 한국의 지도자, 더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가 될 것이며 자신은 그러기 위해 자리를 비켜준 것’, ‘내 딸 근혜가 우매해 아무것도 모르니 가서 그녀를 도우라’ ‘내(육영수)가 보고싶거든 언제든지 최태민을 통해 만날 수 있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이후 편지를 본 박근혜가 최태민을 직접 만나기로 결정하게 되고, 실제로 1975년 3월에 직접 만나게 된다.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이 당시 박근혜는 어머니 육영수의 죽음으로 엄청난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상태였는데, 육영수의 영혼에 빙의되었다며 육영수의 표정과 음성을 그대로 재연하는 최태민에게 심리적으로 상당히 의존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다만 박근혜의 동생 박근령 측은 세간에 널리 알려진 위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말하고 있다. 박근령의 남편 신동욱은 각종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태민은 육영수 여사 사망 이전부터 이미 박근혜에게 여러 번 접근했고 육영수는 그에 관하여 우려를 표시했다고 강조했다. 이 말에 따르면 문제의 핵심인 최태민과 박근혜, 두 사람의 만남의 과정과 두 사람의 관계부터가 불확실하다는 이야기다.


이에대해 <SBS> 그것이 알고싶다 팀의 취재결과, 최태민이 육영수 피격 이전에 청와대에 들락거렸으며 그 이유는 육영수가 최태민의 최면술에 흥미를 갖고 불러들였기 때문이라는 증거를 방송에서 밝혔다. 이 방송에서는 새로운 가설을 내세우기도 했는데 최태민은 육영수와 박근혜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알고 있었으며 박근혜가 최태민의 현몽설을 믿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무도 몰라야 할 비밀을 최태민이 알고 있었기 때문 아닌가 하는 것이다.

 

▲ 지난 1976년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대한구국선교단 야간진료센터를 방문해 최태민 총재(오른쪽)와 이야기하고 있다. 가운데는 박근혜 당시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 <사진=연합뉴스>     © 주간현대

 

최태민 이용한 박정희?


이처럼 박근혜와 연결고리를 만든 최태민은 ‘목사’라는 이력을 이용해 지난 1975년 4월 ‘대한구국선교단’을 발족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했다. 1975년 5월 임진강에서 연 ‘구국기도회’에는 20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박근혜도 참석했다.


최태민의 즉석 제안으로 박근혜는 명예총재로 추대됐다. 이후 박근혜는 구국선교단 행사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1976년 구국선교단은 ‘구국봉사단’으로, 2년 뒤인 1978년엔 다시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바로 박근혜의 퍼스트레이디 경력의 핵심인 새마음운동의 본산이다. 여기서 최태민은 목사들에게 군사훈련 시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후 최태민은 새마음운동본부의 비공식 고문으로서 박근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새마음운동본부의 모든 업무를 관장했다. 새마음운동본부를 기반으로 행정부, 정계, 경제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중정의 조사자료에 따르면 한 봉사단 관계자는 새마음운동본부를 “한마디로 미니 청와대였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최태민 주위에선 각종 이권개입과 횡령, 사기 및 융자알선 등 권력형 비리, 그리고 온갖 여성과의 스캔들 의혹이 들끓었다. 심지어 박근혜의 이름을 앞세워 구국십자군 이름으로 국민 1인당 1000원 씩을 걷어들이기도 했다고 한다.


각계에서 불만과 제보가 속출하자 대통령비서실에서 나섰다. 1977년 봄 박승규 민정수석비서관이 산하기관을 동원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최태민의 비리 보고서가 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라갔는데, 정말 이상한 것은 박정희의 반응이 미적지근하기 그지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런 후속조치가 없자, 이번에는 실세 중의 실세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직접 나서 최태민을 조사하기에 이른다. 박정희 저격이후 김재규 항소이유보충서에 따르면, 박승규 민정수석이 김재규 한테 와서 제발 최태민을 정리해달라고 하소연해서 조사에 착수했으며, 최태민의 비리행적을 조사해서 박정희에게 보고하자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중정이 그런 것도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같은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지난 1977년 9월12일 직접 최태민을 불러서 심문을 했다. 청와대에서 극비리에 진행한 친국엔 중정의 김재규 부장과 조사 실무를 담당했던 백광현 국장이 동석했다. 박근혜도 참석해 “그런 일 없다. 김재규가 최태민을 모함하는 것이다”며 최태민을 옹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모든 보고를 받고도 최태민을 벌하고 박근혜를 구국봉사단에서 손 떼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스스로 박근혜를 총재, 최태민을 명예총재에 임명했다. 그리고 이 것을 가지고 이후 박근혜는 최태민에 대한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최태민은 무고하며, 나 역시 결백하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다녔다.


지금껏 대통령 박정희를 포함해 청와대 안에서 발언권이 강한 영부인 육영수, 감찰권한을 가지고 있는 민정수석실을 포함한 비서동, 실세로 알려진 김재규를 위시한 중정인사들을 비롯해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모든 이들이 최태민을 싫어했다고 알려진 상황에서 최태민이 어떻게 잘 넘어갔는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박정희의 소위 친국을 통해 최태민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박정희가 최태민을 이용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최태민은 민주공화당 당직자 출신이고, 박정희가 따로 최태민을 불러 식사를 하거나, 임무를 맡기기도 했다는 증언이 나왔기 때문이다.


기독교 내부에서 부패한 정치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박정희가 최태민을 통해 기독교 내 수구세력을 결집하려 했다는 증언도 있다. 또 다른 실세 차지철과 가까이 지냈다는 말도 있다.


한편 정권의 실세였던 김재규가 바로 1977년 최태민 친국 때부터 박정희한테 불만(혹은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실제 김재규 스스로도 박정희가 최태민을 제어하지 않고 놔둔 것을 10.26 박정희 저격의 원인으로 꼽기도 했을 정도다.

 

전두환과 최태민


최태민은 새마음봉사단의 명예총재(총재는 박근혜)를 맡는 등 1979년 10.26 사건 때도 박근혜의 옆을 계속 지켰다. 박정희의 죽음 이후에는 전두환이 지휘하는 합동수사본부의 수사를 받았다. 그 결과 최태민은 산골 지역에 있는 강원도 양구에 있는 21사단 군부대에서 6개월 간 가택연금을 당했다.


연금이 해제되자 다시 박근혜 곁으로 돌아온 최태민은 이 일을 박근혜에게 그대로 일러바쳤고 박근혜는 이 일로 전두환을 매우 싫어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전두환 정권은 당시 최태민의 각종 사기행각과 박근혜 영애의 연루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최태민을 곧 풀어줬는데, 암살 당한 전직 대통령의 딸을 범죄자로 잡아넣는 것은 쿠테타로 정권을 창출해 국민에게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한 군부에게는 큰 부담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적잖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옳은 일이더라도 정치보복으로 비춰질 모습을 보여준다면 국민들로부터 지탄받을 가능성이 컸던 상황이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전두환을 싫어했다는 정황은 많다. 대표적으로 박근혜 정부 초창기 큰 이슈 중 하나가 전두환 전 대통령 추징금 환수였다. 전두환 정권에서 ‘실세’로 꼽하는 허화평 전 의원은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 뒤에서 여러 가지를 했다면 최순실의 원수는 전두환”이라고 말했다. 최순실이 아버지 최태민에 대한 복수심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보복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설도 제기된다.


전두환 정권은 박근혜에게 최태민이 문제가 많으니 새마음봉사단을 해체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박근혜는 “국가를 위한 일인데 꼭 해체해야 하나요?”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그래도 새마음봉사단은 1980년 11월에 강제로 해산됐다.
 
penf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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