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문재인의 별명은 ‘고구마’였다. 다소 조롱기가 있는 이 별명에 대해 그는 ‘말은 느리지만 그만큼 많은 요소를 고려하고 숙고한다. 고구마는 먹으면 든든하지 않나’라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변호사 시절부터 듣는 일에 익숙했다고 했던 그는 리더에 자리에 올라서도 그 태도를 잃지 않았다. 당내의 크고 작았던 협상부터 미국, 북한과의 협상과 같은 세계의 평화를 위한 협상까지. 그는 그렇게 ‘고구마’에서 ‘세계의 협상가’로 자리매김했다.
▲ 지난해 5월 발매된 타임지 표지. <사진제공=청와대> ©주간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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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1주년을 맞았다. <주간현대>는 무려 83%라는 높은 지지율로 고공행진하고 있는 그의 생애를 정리해보았다.
지지자들 사이에선 한국의 ‘포레스트 검프’라고 불릴 만큼 대한민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궤를 같이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의 학창시절 모습.ⓒ더불어민주당 제공 ©주간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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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 중에 태어난 인권변호사
한국전쟁의 휴전을 6개월여 앞둔 1953년 1월 24일 문재인은 피난 중에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 월사금을 못 낼 정도로 집이 가난했던 문재인의 10대는 잠깐의 방황이 있었지만, 적어도 책은 많이 읽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여러 판본을 읽으며 애독했던 삼국지는 그에게 역사와 대의명분의 중요성을 가르쳐줬다.
재수 끝에 경희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 그는 학교 축제에서 훗날 아내가 되는 김정숙을 만나지만, 4학년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집회를 주도했다가 구속돼 징역 8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는다. 이 때문에 대학에서 제적까지 당한다.
이후 군에 입대해 특전사로 차출된 그는 특전사 제1공수특전여단 제3특전대대 대대본부 작전과에서 복무한다. 그의 특전사 ‘커리어’는 그가 ‘안보’면에서도 든든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1978년 전역한 그는 사법시험에 몰두하기로 결정한다. 1980년 그는 사법시험 1차를 합격하지만 4월 부마항쟁이 시작되고 학내시위에 가담하게 되면서 운동과 2차 시험 준비를 병행해야만 했다. 1980년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운동 전력이 있는 대학생‧반정부 인사들이 마구잡이로 구속된다. 문재인도 마찬가지였다. 구속된 지 1달여 지났을 무렵 그는 당시 여자친구였던 김정숙을 통해 2차 합격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이후 경희대 측의 노력으로 석방된 그는 3차 시험에도 합격한다.
▲ 운명’처럼 만난 둘은 ‘변호사 노무현 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열고 부산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 활동한다. © 주간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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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같은 만남
사법연수원 12기 출신인 문재인은 운동 전력이 있었던 탓에, 성적은 수석이지만 차석 졸업해야했고 판사로 임용되지도 못했다. 이후 부산으로 돌아간 그는 연수원 동기인 박정규의 소개로 당시 노무현 변호사를 만난다. ‘운명’처럼 만난 둘은 ‘변호사 노무현 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열고 부산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 활동한다.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가 설립되고, 부산 내에서 민주화 운동의 구심이 마련되자, 당시 노무현 변호사와 문재인 변호사는 부민협에서 상임위원으로 활동한다. 이후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부산 지부에서 각각 집행위원장과 상임집행위원을 맡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다. 하지만, 6월 항쟁으로 일궈낸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13대 대선에서는 노태우가 당선된다.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문재인은 노무현과 함께 국회의원 공천 제안을 받는다. 그들을 공천한 사람이 바로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였다. 노무현은 제안을 받아들여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 13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반면, 문재인은 거절하고 변호사 활동을 이어나간다.
2002년 4월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로 결정된다. 이에 노무현은 문재인에게 꾸준히 정계입문을 요청한다. 그 요청은 그해 10월 문재인이 노무현의 대선 캠프 ‘국민참여운동본부’ 부산 지역 본부 선대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받아들여진다. 유명한 ‘문재인을 친구로 두고 있는 나는 대통령감이 된다’는 노무현의 발언이 이때 나온다.
결국 노무현은 대통령이 됐다. 대선이 끝나고 본업인 변호사로 복귀하려했던 문재인은 노무현 대통령의 제안으로 2003년 2월부터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비서관에 임하게 된다. 민정수석으로서 검찰 개혁에 공을 들이던 그는 건강악화와 총선 출마 압박 등의 이유로 2004년 2월 청와대를 떠난다.
공직에서 내려와 네팔로 트레킹을 떠났던 그를 한국으로 다시 귀국시킨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 통과’ 소식이었다. 귀국한 그는 변호인단을 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인으로 참여한다.
탄핵이 기각된 후 문재인은 다시 청와대로 돌아온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를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한다. 그 후 그는 다시 민정수석을 거쳐 참여정부 말기에는 청와대 비서실장직까지 맡고 2008년 참여정부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유지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문재인을 정치계에 불러낸 원동력이었다. ©주간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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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이 정치인으로
참여정부를 마치고 칩거에 들어간 그를 다시 세상에 불러낸 것은 이번에도 노무현이었다. 비록 노무현 본인을 2009년 5월 23일 떠났지만 말이다. 이때 국민 앞에 문재인은 상주로 섰다. 국민장에서 많은 이들이 감정을 드러냈던 것에 비해 가깝게 지냈던 문재인은 의연한 모습으로 장례에 임했다.
정치에 대한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 요청에 자서전 <운명>을 내놓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운명’적인 대답에 열광했고, 1회성으로 시작한 <운명>의 북 콘서트는 전국으로 퍼져갔다. 이것이 그가 정치로 돌아오게 된 계기가 됐다.
2011년 12월 문재인은 국회의원 출마를 선언한다. 그리고는 2012년 19대 총선에서 부산광역시 사상구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다. 이후 같은 해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3주기에서 18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시사한다. 그리고 한달 후 서대문 역사공원에서 출마를 선언한다.
▲ 무소속으로 출마한 안철수와 함께 야권 후보 단일화를 놓고 벌였던 협상은 지난하게 진행됐다. ©주간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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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상황은 그리 좋게 돌아가지 않았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안철수와 함께 야권 후보 단일화를 놓고 벌였던 협상은 지난하게 진행됐고, 많은 이들은 1987년을 떠올렸다. 결국 2012년 11월 23일 안철수 후보가 물러남으로 문재인은 야권 단일 후보로 출마하게 됐지만, ‘영 찜찜한’ 단일화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김홍걸 국민통합위원장과 함께 진도 팽목항 분향소를 찾아 세월호 희생자들 영정사진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다. ©문재인 의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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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위복이 될 수 있을까
결국 문재인은 18대 대통령의 자리에는 오를 수 없었다. 그는 대선 패배에 책임을 지고 뒤로 물러나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의정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2014년 4월 발생했던 세월호 참사에 대해선 특별법 제정을 위해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유가족 유민아빠 김영오씨와 함께 단식 투쟁을 하기도 한다.
정치인 문재인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 시기는 약 반년이 지난 후인 2014년 11월 새정치민주연합의 제 2대 당대표 선거 출마 선언부터다. 이후 2015년 2월 전당대회에서 45.30%의 지지율로 새로운 당대표로 선출된 그는 크고 작은 당 내의 갈등을 정리하고 내실을 다지며, 2016년 4월 13일 열린 제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의 대승리를 이끌어 낸다.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27일 신장식 작가의‘금강산’ 그림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며 활짝 웃고 있는 모습<사진=한국 공동 사진기자단> ©주간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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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협상가
그리고 문재인에게 새로운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2016년 12월 8일 제 20대 국회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이에 이어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하면서 박근혜는 대통령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2017년 4월 문재인 당시 대통령 후보를 표지모델로 사용하며 ‘협상가’라는 단어로 정의했다. 이어 ‘그는 김정은을 다룰 수 있는 남한의 지도자가 되려한다’는 타이틀을 적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1주년인 2018년 5월 10일. 타임지의 이 타이틀은 예언처럼 이루어지고 있다.
한때 문재인의 별명은 ‘고구마’였다. 다소 조롱기가 있는 이 별명에 대해 그는 ‘말은 느리지만 그만큼 많은 요소를 고려하고 숙고한다. 고구마는 먹으면 든든하지 않나’라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변호사 시절부터 듣는 일에 익숙했다고 했던 그는 리더에 자리에 올라서도 그 태도를 잃지 않았다. 당내의 크고 작았던 협상부터 미국, 북한과의 협상과 같은 세계의 평화를 위한 협상까지. 그는 그렇게 고구마에서 세계의 협상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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