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신명나게 일할 수 있으려면

이정엽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 기사입력 2018/06/15 [09:42]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신명나게 일할 수 있으려면

이정엽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 입력 : 2018/06/15 [09:42]

 

 

 

▲ 그라인더와 같이 진동이 발생하는 공구를 쥐고 장기간 사용할 경우에는 손에 있는 말초혈관과 말초신경 등에 손상이 생기는 수완진동 증후군이 발생할 수 있다. <사진 출처 = 무료이미지 사이트 픽사베이>     ©

 

전공의 3년차가 되어 처음으로 출장 검진을 시작한 지 불과 며칠 되지 않았을 때였다그 날 방문한 곳은 경북 고령에 위치한 사업장으로 불과 8명의 노동자들이 공업용 줄을 만드는 영세한 곳이었다그 곳에서 줄의 표면을 가공하기 위해 탁상 그라인더를 3년 째 다루고 있는 한 50대 노동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라인더와 같이 진동이 발생하는 공구를 쥐고 장기간 사용할 경우에는 손에 있는 말초혈관과 말초신경 등에 손상이 생기는 수완진동 증후군이 발생할 수 있다그래서 근로자 특수건강진단에서는 착암기연마기굴착기 등 진동공구를 취급하는 작업자들이 진동과 관련된 문진 및 진찰을 받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근로자 특수건강진단에서는 착암기연마기굴착기 등 진동공구를 취급하는 작업자들이 진동과 관련된 문진 및 진찰을 받도록 되어 있다. 

 

 

손가락이 저리거나 감각이 떨어지는 증상은 없으세요?

 

"얼마 전부터 양쪽 손이 다 좀 저리고요특히 두 번째 손가락은 좀 얼얼한 것 같습니다." 

 

 

아 그러세요혹시 겨울철이나 추울 때 손가락 색깔이 하얗게 변하지는 않으세요?

 

"맞아요어떻게 아셨습니까추울 때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하는 걸 본 적 있습니다." 

 

 

진동공구를 다루는 직업력저리거나 감각이 떨어지는 신경 증상그리고 혈액순환 저하로 인해 추운 환경에서 악화되는 손가락 창백 현상까지수완진동 증후군의 전형적인 소견이었다손톱 압박 검사에서도 혈색이 금방 돌아오지는 않는 듯 보였다이러한 증상이 그라인더 사용에 의한 직업병일 수도 있다는 설명과다른 원인의 배제 및 정확한 진단을 위해 추후 병원 방문 및 추가 검사가 필요할 수 있다는 안내를 드렸다. 

 

 

이후 몇 명의 검진을 더 진행한 뒤 다른 어떤 직원이 씩씩거리며 내 앞에 앉았다자신은 이곳의 관리자인데 조금 전 그라인더 작업자와의 대화를 들었다며 갑자기 직업병이 대체 무슨 말이냐고 다짜고짜 따졌다. 

 

 

"그 사람보다 그라인더 작업을 오래한 사람들도 다 멀쩡한데 그게 무슨 직업병이요그리고 그런 걸 다 직업병이라고 하면 대체 그 작업을 할사람은 누가 있단 말이요?" 

 

 

예상치 못한 항의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나는 그 사람이 직업병이라는 게 아니라 직업병의 가능성이 있으니 설명만 드린 것이고 정확한 진단은 추가 검사를 해보아야 알 수 있다는 식으로 답을 했다. 

 

 

더 큰 사건은 출장검진을 마치고 병원에 돌아온 이후 발생하였다그 관리자로부터 병원에 직접 전화가 와서 아까 그 직업병 이야기는 말도 안되는 소리고 직업병 판정이 나면 그 사람은 바로 해고시켜 버릴 거라며 아까 그 의사 전화 바꿔보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나는 허락도 없이 개인 검진 내용을 엿들은 것도 모자라 이미 충분히 설명을 했는데도 그렇게 협박조로 나오는 그 관리자에게 언짢은 감정이 들었다나는 우선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2차 검사는 시행해 보려고 했다하지만 2차 검사 비용은 사업주가 부담을 해야 하는데 사업주가 그 비용을 낼 수 없다고 버텨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매년 검진을 해오던 사업장에서 강한 불만이 나오니 병원 직원들도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그리고 나에게는 무엇보다 직업병 판정이 나면 그 사람을 해고시켜 버릴 거라는 그 관리자의 엄포가 가장 무겁게 다가왔다

 

노동자 본인에 있어서 실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는 상황은 자신의 손가락 색깔이 창백하게 변해가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재해'일 수 있었다관리자의 협박은 무섭지 않았지만 나의 결정이 그 분의 삶에 도움은커녕 도리어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가능성때문에 나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결국 2차 검사는 시행되지 못하였고 '보호구 착용 철저추적관리'라는 다소 무책임한 조치명이 새겨진 결과지를 발송하는 것으로 이 사건은 끝이 나고 말았다. 

 

 

그날 저녁 퇴근을 하고 나서 나는 아내에게 그날 겪었던 일과 고민에 대해 털어놓았다직업병의 조기 발견을 위해 시행하는 검진이지만 직업병을 발굴해 내는 과정에서 때로는 회사병원심지어 노동자까지 그 어느 누구도 그 과정을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딜레마를 겪고 난 이후의 혼란스러움과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나는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직업환경의학과 의사의 본분에 충실할 수 있는 길인지에 대한 고민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 즈음부터 나는 의학 서적 내용만 읽어 내려가던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우리나라의 안전보건 및 산재보상 제도노동법에 명시된 노동자의 권리 등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가지며 그러한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배경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그러한 모순에 빠지지 않고 노동자들의 직업병을 정확하게 진단하며 그들이 합당한 보상을 받도록 적극적으로 돕기 위해서는 어떠한 전제 조건이 필요할까나의 생각에는 '실효성 있는 제도'와 '노동자들의 적극적 참여'의 두 바퀴가 동시에 굴러가야 하며 바퀴가 도중에 멈추지 않도록 윤활유 역할을 하는 '사회적 공감대'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산재 은폐를 조장하는 개별실적요율제검진기관이 사업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계약방식 등 현재의 제도에 대해서는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노사정이 함께 머리를 맞대어 노동자의 건강보호에 좀 더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선을 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또한 고용에 있어 건강상의 이유로 부당하게 가해지는 불이익은 절대 용납될 수 없다는 원칙 아래 많은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목소리를 낸다면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도 안심하고 자신의 본분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사업주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필요 시 행정절차를 밟는 것이 '불만이 많고 별난일부의 행동이 아니라 노동자라면 누구나 선택할 수 있고 주변으로부터 지지를 받는 '당연한대응 방식으로 사회적 인식이 바뀌게 된다면 노동자들도 비로소 주변의 시선을 불편해 하지 않고 자신의 건강권을 위해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그렇게 된다면 그 사업주도 더 이상 "직업병 받으면 해고시켜 버리겠다와 같이 법과 노동자의 권리는 안중에도 없는 발언을 그토록 당당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 공동체가 그러한 사회로 한 발짝 더 내딛는 만큼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갈고 닦은 능력을 노동자 건강을 위해 더 신명 나게 펼쳐 보일 수 있을 것이다한편으로는 그러한 사회적 변화를 수동적으로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노동자들의 권리 신장을 위한 많은 이들의 노력에 항상 관심을 가지고 함께하리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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