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의 PICK 도서] 홍성수 作 <말이 칼이 될 때>

‘김치녀’·‘틀딱’·‘똥남아’·‘맘충’…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주간현대 | 기사입력 2018/08/03 [16:42]

[이 주의 PICK 도서] 홍성수 作 <말이 칼이 될 때>

‘김치녀’·‘틀딱’·‘똥남아’·‘맘충’…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주간현대 | 입력 : 2018/08/03 [16:42]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의 저서<말이 칼이 될 때>는 혐오의 시대를 조망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법과 인권, 표현의 자유에 관한 쟁점들을 연구하고 한국 사회의 첨예한 이슈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해온 법학자 홍 교수는 스스로 혐오표현이 난무하는 현장에 뛰어들었다. 홍 교수는 책에서 혐오라는 감정의 정체부터 혐오표현과 증오범죄까지 우리 모두에게 위협이 되고 공존을 파괴할 수 있다며 ‘말이 칼이될 수 있음’을 경계한다.


특정 집단 및 개인에 모욕적 표현·배제하는 것 ‘혐오’

피해 당사자의 정신적 고통 물론 사회적 공존 파괴해

맘충·노키즈존여험·남혐…대한민국은 지금 혐오 중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인 ‘차별금지법’ 입법화 필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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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화, 혐오로 쉽게 가는 길

성혜미 사회부 기자


박원순 서울시장이 한 달간 에어컨 없는 옥탑방에서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겠다고 밝혔다직접 서민의 삶을 체험해 실속 있는 정책을 내놓겠다는 의지다취지는 좋으나 한편으로 위선이라는 생각이 들어 불편하다누군가에게 일상인 삶을 체험하겠다는 자체가 이미 다른 생을 살고 있다는 의미 아닌가.

 

1936, 33살 조지 오웰도 탄광 지대 내 실업 문제에 대한 르포를 쓰기 위해 박 시장처럼 노동자들의 밑바닥 생활을 경험한다논픽션 <위건 부두로 가는 길>는 조지 오웰의 2개월 간 체험삶의 현장인 셈이다.

 

그러나 나는 조지 오웰이 노동자 삶에 동화됐다고 보지 않는다오웰은 자신과 하층민들을 계속 구분하기 때문이다책에서 오웰은 노동자즉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그들이라고 표현한다심지어 아무리 그들처럼 남루한 옷을 입어도 교양 있는말투 때문에 자신이 중산층임을 들킬까봐 두려워한다이러한 괴리를 오웰 본인도 알고 속물근성’, ‘계급차이의 저주라고 표현한다.

 

대상을 타자화하면 평가하기 쉬워진다일례로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불안에서 맥락을 모르고 결과만 볼 경우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는 쇼핑 중독의 간통녀이고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는 사랑에 눈이 먼 이민자가 원로원 의원의 딸을 죽인 이야기가 된다고 말했다.

 

최근 32살의 네팔 노동자가 투신자살한 것도 맥락을 모르고 결과만 본다면 이 사건은 단순히 불법체류노동자가 자살한 것뿐이다이런 종류 기사에 달릴 댓글은 아마 똥남아들네 나라에서 살지 왜 남의 나라 일자리 뺏어서 벌 받느냐같은 조롱이 아닐까.

 

그러나 고인은 두 아이와 아내를 위해 4년 동안 최소한의 생계비를 제외한 모든 월급을 고향집에 부쳤고 회사가 정당한 사유 없이 그를 해고했으며 최초 체류신청 당시 제조업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다른 업종에 취업조차 불가능했으며 이에 체류연장 신청기간을 놓쳐 졸지에 불법체류자로 전락했다는 구구절절한 스토리를 안다면 어느 누가 그의 죽음을 조롱할 수 있을까.

 

혐오표현의 해악 중 하나는 어떤 집단의 부정적인 측면을 고정관념화한 후 혐오하고 차별해서 사회에서 배제시키는 것이다. <말이 칼이 될 때>의 저자 홍성수는 “‘저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가 저들을 박멸하자가 되는 건 순간이다나치가 반인륜적 선동에 나섰을 때만 해도 그들이 끼칠 해악을 예상한 이들은 없었다하지만 그들은 결국 그렇게 유대인을성소수자를장애인을소수민족을 탄압하고 학살했다고 경고한다.

 

난민’, ‘외국인 노동자’, ‘틀딱’, ‘맘충’, ‘빨갱이’ 라고 분류하고 이들의 긴 사연과 이야기를 생략함으로써 나와 다르다고 선을 긋는 순간 공감과 이해 대신 그 자리에 조롱과 경멸만 자리하는 건 시간문제다.

 

 

정치권, 혐오 문화 잠재울 장치도 정비해야

문혜현 정치부 기자

최근 난민과 관련한 법이 속속 발의되고 있다. 난민 브로커를 처벌하는 법 혹은 난민의 체류지역을 제한하는 법, 난민법을 폐지하자는 법까지 그 방향이 다양하다.

 

난민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하며 난민법을 폐지하자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70만 명을 넘어섰다. 이에 따라 정치권은 이같은 제도 개선과 기준 강화 등의 대응에 나서고 있지만 왜인지 여론은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다.

 

난민에 대한 두려움부터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편견와 오해로 점철된 기사들이 줄을 잇고 있다. 삽시간에 퍼지는 가짜뉴스도 주목할 만 하다. 제주 예멘 난민들의 인권 실태를 취재한 알 자지라가 게재한 유튜브 영상에는 제주의 식당에서 근무하는 한 예멘 난민의 모습이 담겼다.

 

한글로 된 자막에는 이런 섬에 갇혀 있느니 예멘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불평한 것처럼 나왔다. 이를 두고 누리꾼들은 배부른 불평을 했다며 비난했다. 하지만 이는 예멘이 평화로워지면 가족들이 있는 고향에 가고 싶다고 말한 내용을 누군가 왜곡해 유포한 것으로 드러났다.

 

난민 수용의 제도적 절차를 개선하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한 소수자에 대한 혐오, 타 문화에 대한 경계와 이기심이라는 문화 요소를 고려한 정책적인 방향이 동시에 논의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차별금지법이 최소한의 장치가 될 수 있다. ‘말이 칼이 될 때의 저자 홍성수 교수는 우리 사회의 혐오 맥락을 진단했다. 혐오는 단순히 배척배제의 언어가 아닌 위협의 말이 될 수 있다고 봤다. 그리고 그 혐오가 폭력이 되고 영혼을 죽이는 일이 된다고 경고했다.

 

차별금지법은 혐오 개선논의의 시작점에 있다. 인종·문화·성 정체성·성별·종교 등을 이유로 타인을 차별하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것만으로도 혐오가 폭력을 낳는 불씨를 꺼뜨릴 수 있다.

 

또 차별 금지의 법제화는 차별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고, 모든 인간이 동등한 선상에서 대우받아야 한다는 문화가 뿌리내릴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소수자를 혐오하는 것은 쉽다.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속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권리를 반대하고 차별하며 그들을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이제는 배제돼야 한다.

 

 

혐오, 정의라는 가면을 벗어야 할 때

정규민 경제부 기자 

최근 혐오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여성 혐오를 외치는 시위대는 혜화역에서 시위를 진행했으며 지난 714일엔 서울 광장에서 동성애 혐오를 없애야 한다는 퀴어 축제가 열렸다. 또한 제주도에 터를 잡은 난민들의 거취에 대해 혐오 감정을 기준으로 판별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도 이어지고 있다.

 

혐오는 어떠한 것을 증오, 불결함 등의 이유로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감정이다. 혐오를 심리학적 관점으로 바라 봤을 때 증오, 불결함 등 여러 이유를 만들어 내는 불쾌, 기피, 싫어함 등은 학습을 통해 이뤄진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교육들을 통해 만들어진 틀이 혐오라는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 SNS를 통해 드디어 소통할 창구가 생겼기 때문에 지금까지 받던 설움이 터져 나온 것이라고 표현한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과거에는 혐오가 없었으며 뿌리 깊은 혐오가 사라진 예는 없을까. 답은 아니다’.

 

16세기, 아주 큰 종교적 행사가 존재했다. ‘마녀사냥’. 종교개혁과 함께 유럽에서 벌어진 학살은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을 달고 무고한 시민들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마녀로 지목당한 많은 사람들은 질투 등 인간의 개인 욕심에 의해 희생 됐다. 당시 마녀를 고발한 자가 마녀의 재산 중 일부를 차지한다는 법률은 욕심을 부추겼고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어 냈다.

 

2세기가 넘게 지속된 마녀사냥은 더 이상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정부의 대규모 사법개혁과 규제를 통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재산 몰수 등 이득을 취하던 정부가 더는 안 되겠다 싶을 때, 그때 악 폐습이 사라진 것이다.

 

이후 약 2세기가 더 지나서야 교황청은 마녀사냥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했다. 마녀에 대한 혐오는 기득권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사라졌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잘못을 인정했지만 당시 불타며 사라져간 수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

 

대규모 학살이 벌어져야만 혐오가 부정당하는 것일까, 멀리 찾아 볼 필요도 없다. 과거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문화 탄압 정책이 있었다. 만화 시장을 정체시킨 만화 검열제1961년부터 1997년까지 긴 시간 자유로운 창작을 막아 만화의 질을 떨어트렸다. 당시 만화는 대표적인 혐오 매체로 알려졌다. 혐오 매체가 아닌 만화는 어린이 교육용만화 뿐이었으며 이 또한 수많은 검열을 거쳐야 세상에 등장할 수 있었다.

 

군사독재정권 공권력의 검열, 규제에 항의할 힘이 없던 만화가들은 어린이날마다 불량만화 추방운동에 동참하는 등 자신들의 앞길을 자신의 손으로 막는 행위를 반복해야만 했다.

 

이 또한 규제가 사라진 20년 뒤인 지난해에 와서야 잘못을 인정받았다. 한국만화박물관은 만화 검열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빼앗긴 창작의 자유라는 이름을 통해 만화 검열사 전시회를 열었다.

 

하지만 이미 한국 만화 매출의 80% 이상이 어린이 및 청소년용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60년 전 정부가 만들고 싶었던 만화는 아이들만 보는 것이라는 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우리를 옥죄고 있다.

 

우리가 마주친 여성, 난민, 동성애, 기타 많은 것에 대한 혐오가, 그것에 대한 반대가 과거 마녀사냥이나 만화 검열제에서 보여준 기득권이 만들어낸 틀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공언할 수 있을까.

 

여성 혐오를 없애자고 뛰어나온 시위대, 난민을 혐오하지 말자고 외치는 사람들, 동성애를 혐오하지 말라던 동성애자들, 그들을 바라보며 쓴 책은 정의의 탈을 쓴 기득권의 비웃음이 아닐까.

  

 

역지사지로 가는 길

문병곤 문화부 기자 

양아치 남자 고등학생과 모범생 여자 고등학생이 어느 날 학교 운동장에서 벼락을 맞는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둘은 서로 몸이 바뀌어 버린다. 극과 극이었던 이 둘은 몸이 바뀌고 나자 서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997년도 개봉한 한국 영화 <체인지>의 내용이다. 어렸을 적 주말의 영화에서 방영해 봤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남녀가 몸이 바뀌고, 노인과 젊은이가 몸이 바뀌고 하는 식의 영화는 요즘에는 꽤나 많이 만들어졌지만, 당시만 해도 놀라운 소재였다. 그러니 20여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생각나는 것일 테다.

 

문득 이 영화가 생각 난 이유는 ‘이런 영화 같은 일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차별과 혐오는 없었을 텐데’라는 생각 때문이다.

 

‘역지사지’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뜻이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간단하고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사회에서 과연 이만큼 행동으로, 그리고 생각으로 옮기기 어려운 사자성어가 있을까. 자기인생 하나만 살아내기에도 버거운 곳이 ‘여기’ 아닌가.

 

조지오웰은 이 ‘역지사지’를 직접 실현해 보고자 광산으로 뛰어들었다. 직접 영국 맨체스터의 광산도시에 눌러앉은 그는 그 고행을 겪으며 체험수필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썼는데, 현실감 있고 구체적인 묘사 덕분에 마치 소설을 읽고 있는 착각을 주기도 한다.

 

또한 조지 오웰의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은 마치 ‘사회주의’라는 종교에 경도된 열성 신자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아마 조지 오웰의 역지사지는 이 같은 열성이 없었다면 이뤄낼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완전한 역지사지’는 불가능하다. 특히 요즘처럼 사회적 집단들의 주장이 맞부딪히는 경우, 그들을 다 같이 운동장에 세워놓고 벼락을 떨어뜨려 몸을 바꾸지 않는 이상 말이다.

 

여기서 한 편의 영화를 소개하고 싶다. 지난 6월 일본 도쿄도(東京都)는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혐오 발언)’를 규제하는 조례안을 제정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조례안 제정에 큰 영향을 미친 일본 내 재일 한국인 ‘혐한 시위’를 다룬 영화다.

 

이일하 감독의 영화 <카운터스>는 일본의 야쿠자 다카하시가 재일 한국인 혐오 데모를 목격하고, 이에 맞서기 위해 혐오 데모를 저지하는 내용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 속 카운터스는 혐오‧차별주의자에 대해 거부한다.

 

다카하시는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혐오를 없앤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카운터스는 혐오시위대에 침묵으로 응하는 ‘사일런트 시위’ 도로에 무작정 앉아 시위를 방해하는 전력인 ‘시트인’등의 방식을 고안하며, 혐오에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나아가 폭력에 폭력으로 대처해야하는지에 대한 질문들을 던지기도 한다.

 

난민반대 국민청원 70만 돌파, 몰카 편파수사 시위 6만 명 결집 등 한국 사회 곳곳에서 혐오와 차별로 촉발된 사회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물론 앞에 소개한 영화들과 책들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정답을 제시해 주진 않는다. 하지만 어떠한 방향성은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한국 사회가 혐오가 아닌 화합으로 나아가는 데에 어떠한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민 ‘불안’ 잠재울 정부 ‘소통’ 필요해

정아임 사회부 기자 

최근 제주도 예멘 난민을 수용하는 문제를 놓고 국민들 사이에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지난 7월12일 기준으로 ‘제주도 불법난민 신청 문제에 따른 난민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70만 명을 돌파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역사상 최다수를 기록한 것이다. 반면 ‘난민 신청자에 대해 인도적 조치’를 요구하는 청원들도 있었으나 반대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난민수용’에 대해 반대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국민 안보를 위해서다. 예멘 난민 문화의 기둥은 이슬람 교리다. 뿐만 아니라 테러의 위험에 노출될 우려도 크다.  

 

그 대표적인 예로 최근 IS를 추종하는 30대 시리아인이 주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IS를 홍보하며 가입을 권유했다 구속됐다.

 

지난 7월5일 인천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테러방지법 위반 혐의로 시리아인 A(33)씨를 구속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함께 근무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IS가 만든 홍보 영상을 보여주며 IS가입을 권유한 혐의를 받았다. 그는 2007년 시리아 내전을 이유로 한국에 입국해 난민 신청을 했지만 거부당했다. 대신 당국에게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아 경기도 일대 폐차장 등에서 일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시리아인이 국내에서 테러방지법으로 처벌받은 사실이 알려지면 한국인이 IS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어 조심스럽다”고 전했다.  

 

‘난민수용’ 사안은 ‘혐오’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들을 수용하고 말지의 문제가 ‘편견’에서 비롯된 ‘차별’적 발언인지 고민해봐야 한다.

 

<말이 칼이 될 때> 저자 홍성수는 혐오표현이 차별과 연결돼 있으며 이는 소수자를 사회에서 배제하는 효과를 낳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소수자는 현재 사회에서도 불이익을 받고 있는 집단으로서 인종, 성별, 장애, 성적 지향 등 교유의 특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집단 또는 그 집단에 속한 개인을 뜻한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국민들 대다수가 소수자를 배척하는 비인도적인 모습인걸까. 과연 국민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발언이 되는 것일까. 

 

이들의 목소리는 ‘불안’에서 비롯된 ‘우려가 아닐까 싶다. ‘난민’을 수용하기 이전에 한국이 이와 관련해 준비가 됐는지 묻고 싶다.

 

2012년 난민법 제정 이후 이를 악용하는 사태, 다른 문화마찰로 인한 사회적 문제, 난민 기준의 적합성, 추상적 경제파급력 등과 같은 많은 부분들에 대해 국민들과의 충분한 논의와 대화가 이뤄졌다면 이처럼 반대의 목소리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국민들이 ‘불안’하게끔 신뢰를 주지 못한 정부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는 국민들을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대답해야 한다. 자국민의 안보가 보장받는 나라,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penf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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