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종합반도체 기업인 인텔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부를 연내 분사하기로 결정했다. 삼성전자를 제치고 2030년 2위를 달성하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밝힌 지 고작 3년 만이다. 이 같은 분사 결정 배경에는 팻 겔싱어를 필두로 한 최고경영자(CEO)들의 연이은 실패와 잘못된 경영 판단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인텔이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인텔은 PC 시대를 호령한 반도체 역사의 산 증인이지만, 2000년대 모바일 시대 주도권 확보에 실패하며 추락을 자초했다. 이후에도 챗GPT 개발사 오픈AI의 투자 기회를 놓치고, 그래픽처리장치(GPU)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등 주요 고비 때마다 실책을 남발했다.
철수했던 파운드리 재도전···3년 만에 적자 누적···CEO 줄줄이 실패 위기 가중
18A 공정으로 아마존 AI 칩 개발···분사 후 투자재원 확보 등 사업전략 주목
▲ 인텔 비전 2024에서 팻 겔싱어 인텔 CEO가 인텔 가우디 3 가속기를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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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 시대를 호령하던 인텔이 모바일 시대 주도권을 뺏기면서 추락하고 있다. 주력 사업인 컴퓨터 CPU(중앙처리장치) 시장에서도 경쟁력이 뒷걸음질 쳤고, 미래를 보고 시작한 파운드리 사업은 ‘돈 먹는 하마’로 전락했다. 고객사들은 협력을 주저하고, 커지는 재무 부담에 인재들은 떠나고 있다.
이런 인텔이 과연 미국의 첨단 반도체 경쟁력 회복이라는 특명을 완수할 수 있을지 시장의 의구심은 커진다.
1.8나노에 쏠리는 눈···
9월 21일 업계에 따르면 인텔이 수주한 아마존의 클라우드 서비스 자회사 아마존웹서비스(AWS)의 AI 맞춤형 칩은 인텔 재건 가능성을 체크할 바로미터가 될 전망이다.
인텔은 내년부터 18A 공정에서 AWS가 주문한 AI 맞춤형 칩을 생산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양측은 이를 위해 수년간 수십억달러를 공동 투자하기로 했다. 인텔 18A(1.8나노미터) 공정은 일종의 ‘최후 보루‘다. 데이비드 진스너 인텔 최고재무책임자(CFO)가 최근 “더 진보된 18A 제조 공정에 집중하기 위해 20A 제조 공정을 마케팅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힐 정도다.
인텔 18A 공정에는 인텔의 차세대 기술이 총집결해 있다. 차세대 트랜지스터 구조인 GAA(게이트올어라운드) ‘리본펫’(RibbonFET), 반도체 후면 전력 전달 기술(BSPDN) ‘파워비아’(PowerVia) 등이 투입된다. 이 중 반도체 전력 공급 효율을 향상하는 BSPDN 기술은 인텔이 TSMC(2026년·1.6나노)나 삼성전자(2027년·2나노)보다 앞서 선제적으로 도입하려는 기술이다.
인텔은 이와 함께 제조 원가 절감과 초미세 공정 양산에 필요한 차세대 극자외선(EUV)인 ‘하이-NA EUV’ 노광 장비도 업계 최초로 2대를 확보했다.
미국 반도체 부흥을 위해 인텔에 돈도 실리고 있다. 미국 정부는 직접 보조금과 대출 지원을 합쳐 인텔에 총 195억 달러를 몰아줬다. 이 가운데 보조금은 85억 달러로, TSMC(66억 달러), 삼성전자(64억 달러)보다 많은 수준이다.
미국 국방부에 공급할 군사용 반도체 제조를 위해 35억 달러(4조6620억 원)의 연방정부 보조금도 추가 편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파운드리 사업부 적자는 올해 최대치를 기록한 후 2027년에는 손익분기점을 넘을 것”이라며, “최근 인텔에 닥친 시련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분사는 ‘양날의 검’
그러나 인텔 파운드리가 충분한 자생력을 확보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인텔은 파운드리 사업부를 별도 법인으로 분사하기로 했는데, 파운드리 사업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파운드리가 자회사로 분할되면 사업 독립성이 높아져 고객 확보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
인텔이 ‘분사’라는 극약 처방을 내린 것은 파운드리 사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에서 비롯된 심각한 재무 위기 탓이다. 하지만 분사 이후에는 투자 재원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파운드리 사업은 천문학적 투자비가 필요한 대규모 장치 사업인데, 인텔 파운드리는 아직 ‘적자’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팻 겔싱어 CEO는 “사업부 간 분리를 확대하면 각 사업부에서 독립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외신에 따르면 뱅크오브아메리카(BofA)는 “인텔이 파운드리 부문을 독립 계열사로 설립한다는 계획과, 폴란드 및 독일 내 일부 투자를 중단한다는 계획은 현실성이 결여돼 있다”고 지적했다. 인텔 파운드리 분사가 능사는 아니라는 지적이다.
인텔이 워낙 자주, 수 차례 구조조정을 하다 보니 첨단 반도체 경쟁력의 핵심인 ‘인재’가 많이 떠난 것도 우려할 대목이다. 한때 세계 최고 기술 인재를 보유한 인텔의 반도체 리더십은 ‘외계인 납치설’ 같은 우스갯소리로 그 우수성이 회자되기도 했다.
하지만 인텔은 최근에는 보수적인 기업 문화로 논란에 직면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의 베테랑인 립부 탄(Lip-Bu Tan) 전 인텔 이사는 지난 2022년 9월 인텔에 합류한 지 2년 만인 지난달 이사직을 내려놨다.
외신에 따르면 탄 이사는 비대해진 인력, 위험 회피 문화, 경쟁사들에 비해 뒤처진 인공지능(AI) 전략에 우려를 표명했지만, 팻 겔싱어 CEO와 이사진의 의견차로 물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JP모건은 “최근 인텔의 파운드리 분사 발표는 목표주가를 상향 조정하기에는 역부족”이라며 “점진적인 변화라기보다는 기존에 공개했던 조치를 더 명확히 하는 데 그쳤다”고 밝혔다.
업계에 따르면 인텔은 최근 파운드리 사업부 분사와 유럽·아시아 공장 건설 중단을 주 내용으로 하는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했다. 지난 2018년 파운드리 사업에서 철수했다가 2021년 재진출한 인텔은 삼성전자를 제치고 ‘2030년 파운드리 2위 달성’을 선언했지만 살상은 지지부진한 실적으로 고전해 왔다.
인텔은 파운드리 사업에서 2021년 51억 달러, 2022년 52억 달러, 2023년 70억 달러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적자폭을 키웠다. 올 상반기 누적 적자만 53억 달러에 달한다. 파운드리 매출은 95%가 내부 물량으로 외부 비중은 5% 수준으로 알려졌다.
인텔 주가는 올 2분기 실적 발표 이후 하루 만에 26% 폭락하며 창사 이래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연초 대비 주가는 60% 가까이 빠졌다. 현재 인텔의 시가총액은 902억 달러(약 120조 원)로 삼성전자(380조 원)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처럼 인텔이 파운드리를 분사할 정도로 위기를 맞은 상황은 그동안 CEO들의 연이은 실패와 잘못된 판단에서 초래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인텔 공동창립자 고든 무어는 ‘2년에 한 번씩 반도체의 성능이 두 배씩 향상된다’는 무어의 법칙으로 유명하지만 2010년이후 인텔은 기술 혁신에서 무어의 법칙이 무색할 정도로 뒤처졌다.
2013년 인텔 수장 자리에 앉은 브라이언 크르자니크 CEO는 원가 절감을 통한 단기 성과에 집착하면서, 2016년 인텔 전체 인력의 10%에 해당하는 1만2000여명을 해고했다. 이 구조조정안에는 연구·개발(R&D) 인력이 다수 포함돼 있었는데, 이들이 경쟁사인 AMD 등으로 이직하면서 인텔 경쟁력은 급격히 추락했다.
결국 크르자니크 CEO는 불명예 퇴진했고, 후임으로 온 밥 스완 CEO 역시 재무통으로 보수적인 경영으로 일관하며 인텔 위기를 가중시켰다는 평이다.
인텔은 2018년께 오픈AI에 투자할 기회가 있었지만 당시 스완 CEO는 생성형 AI가 시장 출시 시점이 늦고, 투자 비용 회수도 어렵다고 판단, 오픈AI와의 거래를 중단했다. 인텔은 결과적으로 큰 수익을 얻을 기회를 날려버렸다.
이후 인텔은 2021년 기술 엔지니어 출신인 겔싱어 CEO를 다시 불러들였지만, 이번에도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목표로 결국 ‘악수‘를 날렸다는 평가다.
인텔은 경쟁력 회복을 위해 미세공정 기술 개발에 속도를 내고, 파운드리 사업에 다시 집중하려 했지만 이미 벌어진 TSMC와 삼성전자와의 기술 격차를 따라잡긴 역부족이라는 시각이 높다.
겔싱어 CEO는 최근 2년간 파운드리에 250억 달러, 33조 원이라는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인텔의 수익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업계에서는 기술 경쟁력 회복을 위한 제대로 된 투자가 아니라 경쟁사를 지나치게 의식해 무리한 목표를 세웠고, 이는 인텔 파운드리 사업의 뼈아픈 실패를 초래했다고 분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