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만화 혹은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이름을 모를 리 없다. 오시야마 키요타카. 그가 하는 일은 한마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오시야마는 만화·애니메이션을 가리지 않고 그린다. 200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그가 참여한 작품은 수십 편인데, 그중 누구나 알 만한 것을 꼽자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2023), <더 퍼스트 슬램덩크>(2022), <모브사이코 100 OVA>(2019), <바람이 분다>(2013), <마루 밑 아리에티(2010)> 등이 있다.
그리지 못하는 게 없다는 게 그를 향한 평가.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했다는 것만 봐도 그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오시야마는 작화가·애니메이터이면서 애니메이션 연출가이기도 하다. 2016년 <플립 플랩퍼즈>로 독창적인 연출력을 인정 받았고, 올해는 이 작품으로 가장 촉망 받는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각광 받고 있다. <룩 백>이다.
작화가이자 애니메이터···‘룩 백’으로 가장 촉망받는 애니메이션 감독 등극
“‘룩 백’은 실로 빼어난 작품···그 재능 질투 날 정도···이 만화가의 힘 실감”
▲ 오시야마 키요타카는 작화가·애니메이터이면서 애니메이션 연출가이기도 하다. 올해는 ‘룩 백’으로 가장 촉망 받는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각광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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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 백>은 지난 6월 말 일본에서 공개돼 매출액 20억 엔을 넘기며 흥행에 성공했다. 지난 9월엔 국내에서 개봉해 관객수 26만 명을 넘겼다. 57분짜리 중편 영화, 적은 스크린 수,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마니아가 아니라면 알기 힘든 작품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례적인 관심이다.
한국 팬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오시야마 감독이 한국에 왔다. 10월 11일 오후 서울 성동구에서 만난 그는 “남들이 추어올리면 금방 우쭐해지는 성격을 갖고 있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그냥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며 일희일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룩 백> 원작은 후지모토 타츠키 작가가 2021년 내놓은 143쪽짜리 단편 만화다. 후지모토 작가는 2019년 발표한 <체인소 맨>을 통해 스타가 된 만화가. 이 작품은 올해 7월까지 전 세계에서 2700만 부 이상 판매됐고, 인기에 힘입어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로도 만들어져 2022년 10월부터 방송 중이다.
오시야마 감독은 후지모토 작가에게 <체인소 맨>의 악마 캐릭터 디자인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합류해 인연을 맺었고, <체인소 맨> 연재 중에 나온 <룩 백>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다.
“실로 빼어난 작품이었다. 그 재능이 질투가 날 정도였다. 이 만화가 가진 힘을 실감했다.”
후지모토 작가와 만화 <룩 백>에 대한 오시야마 감독의 평가였다. 하지만 처음 그 작품을 읽었을 땐 영상화에 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에이백스픽쳐스에서 첫 제안을 받았을 때도 오케이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워낙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어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게 초고난도 작업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오시야마 감독은 생각을 바꿔 먹었다. 원작을 반복해서 읽다 보니 오히려 영상화하기에 적합한 작품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한 사람으로서,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주인공들의 감정에 깊이 공감했다. 일단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는데, 아무리 읽어 봐도 나와 궁합이 맞는 것 같더라. 그림을 그리는 인생이라는 것 말이다. 그래서 다시 몇 가지 조건을 걸고 의뢰를 받아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기획이 완전히 확정된 게 아니었다. 내심 끝에 가서 오케이가 안 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웃음) 그만큼 부담이 있었다. 물론 이미 결정된 이후엔 전력을 다하기로 했지만.”
<룩 백>은 만화에 미친 두 초등학생 소녀 후지노와 쿄모토의 이야기를 그린다. 각기 다른 재능을 가진 두 사람이 우연히 얽혀 서로에게 영감이 돼주고 동력을 만들어주며 콤비 만화가로 성장하는 과정이 담겼다.
애니메이션 영화 <룩 백>은 원작이 그랬던 것처럼 성장물이자 청춘물, 창작에 관한 얘기를 파격적인 전개 안에 담아 관객에게 충격을 준다. 공감을 얘기했던 오시야마 감독은 두 가지 지점에서 이 작품에 끌렸던 이유를 설명했다. 한 가지는 좌절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협업이었다.
오시야마 감독은 후지노가 쿄모토의 재능을 발견한 뒤 좌절하는 대목에서 자신을 겹쳐 봤다고 했다. 학창 시절 그림 못지않게 스포츠를 좋아했던 그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쪽 분야에선 자신이 특별해질 수 없다는 걸 절감했다고 한다. “사실 그림이나 만화 쪽으로는 내가 학교에서 가장 뛰어났기 때문에 후지노 정도의 좌절감을 맛본 적은 없다.(웃음)”
하지만 그도 프로의 세계에 들어와서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너무나 많은 재능들을 보게 됐다. 좌절까진 아니더라도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업계 최고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뒤에 그런 충격을 받은 게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남의 재능을 보는 요령이 생겼으니까. ‘이 사람은 이건 잘하지만 다른 건 내가 더 잘해’라고 스스로 변명을 한달까.(웃음) 만약 후지노 나이에 그런 좌절감을 맛봤다면 다시 일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시야마 감독은 후지노와 쿄모토가 함께 만화를 완성해 가는 모습에서 자신의 청춘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는 원작과 애니메이션의 차이 중 하나로 바로 이 협업 장면을 꼽았다. 원작에서 후지노는 자신이 그린 그림에 대한 쿄모토의 리액션이 창작 동기가 되는 장면을 자주 보여준다면, 애니메이션에서는 이 장면보다는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 자체가 만화를 완성하는 동기가 된다는 걸 보여준다. 이를 위해 관련 장면을 추가로 집어넣었다. 오시야마 감독이 실제로 많은 창작자들과 협업하며 현재에 이르렀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시퀀스였다. “나의 커리어가 그렇게 쌓였으니까. 내 청춘을 떠올리게 됐다.”
<룩 백>엔 명장면이 많은데 그중에서 손꼽히는 게 후지노가 빗속을 걷는 순간이다. 쿄모토의 재능에 좌절해 만화 그리기를 관뒀던 후지노는 이후 쿄모토의 지지에 힘입어 다시 펜을 잡게 된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선생님 부탁을 받아 쿄모토에게 졸업장을 전달하러 갔다가 그를 처음 만나게 되고, 쿄모토에게서 자기 만화의 열렬한 팬이자 자신을 존경한다는 말을 듣고 감격에 겨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빗속을 춤추듯 걷는 바로 그 장면이다.
오시야마 감독 역시 “원작을 볼 때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었다”며 “이 신(scene)에서 이 영화의 승부가 난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원작에서 이 장면은 단 세 컷으로 표현된다. 애니메이션에선 18초 분량으로 늘었다. 오시야마 감독이 그만큼 이 장면에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작품 내에서 가장 고난도 작업이었기에 그 시퀀스만큼은 오시야마 감독이 모든 그림을 직접 그렸다.
애니메이션 감독이 돼서도 여전히 직접 그림을 그리는 장인정신을 고집하는 그에게 이 일을 하려는 지망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자세에 관한 것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재능에 관한 것을 말하는 건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과거 엑스(옛 트위터)에서 팔로워의 그림을 수정·첨삭해줘 화제를 모은 적이 있고, 그때 했던 말들을 기반으로 2019년엔 <작화 첨삭 교실>, 2021년엔 <오시야마식 작화술>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다. “자세에 관한 얘기를 해달라“고 하자 그는 “재미 없고 뻔한 대답이지만 중간에 관두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이 직업은 장시간 다량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 긴 작업 시간 내내 모티베이션을 유지하면서 그려나가야 한다. 인생엔 많은 즐거움이 있는데 하필이면 그토록 많은 그림을 그리는, 고행과 같은 일을 해내려면 내 안의 이상함이 있어야 한다.(웃음)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중간에 관두면 아무것도 안 된다다. 일단 완성을 하는 게 중요하다. 완성 지점까지 도달하려면 계속 그러야 하고. 이 일에 관해선 정말 여러 가지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일단 이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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