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기흥캠퍼스는 반도체 역사이자 미래···이재용 “이곳에서 새 도전 시작”
이천 R&D센터는 첨단 칩 산실···7세대 ‘HBM4E’ 등 사실상 차세대 HBM 고향
현대차 마북연구소는 수소차 심장···정몽구·정의선 부자도 그곳에서 수소 결실
1. 삼성전자 기흥캠퍼스
“차세대뿐 아니라 차차세대 제품에 대한 과감한 연구개발(R&D) 투자가 없었다면 오늘의 삼성 반도체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삼성전자가 반도체의 역사이자 미래인 기흥캠퍼스에서 반도체 사업 진출 반세기 만에 또 한 번 R&D 도약을 준비한다.
용인 기흥캠퍼스는 삼성전자가 1983년 2월 이병철 창업주의 ’도쿄 선언‘ 이후 반도체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상징적인 곳이다. 특히 1983년 이곳에서 64Kb D램 메모리를 처음 개발하며, 삼성전자는 ‘반도체 신화’의 초석을 다졌다.
이후에도 삼성전자의 기술을 향한 집념은 ▲1992년 집적도를 1000배 높인 64M D램 ▲2002년 1GB(기가바이트) 낸드플래시 대량 생산 ▲2013년 3차원 V낸드플래시 등 세계 최초 제품의 잇단 개발로 이어졌다. 삼성전자는 이 같은 기흥캠퍼스의 성과에 힘입어 현재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 비메모리 반도체 세계 2위를 달리고 있다.
▲ 삼성전자 기흥캠퍼스에 구축된 차세대 반도체 R&D 단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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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2022년 8월 삼성전자 기흥캠퍼스에서 열린 차세대 반도체 R&D 단지 기공식에 참석해 “40년 전 반도체 공장을 짓기 위해 첫 삽을 뜬 이곳에서 새 도전을 시작한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 태동지인 이 기흥캠퍼스에서 지난해부터 최첨단 R&D 단지인 NRD-K를 짓고 있다. 2014년 경기 화성사업장 내에 연구동인 DSR 타워 건립 이후 10년 만에 짓는 삼성전자의 대규모 연구시설이다. 이곳은 최신 반도체 공정 개발과 양산에 최적화된 첨단 R&D 팹으로 지어진다.
지난 10년간 반도체 산업의 중심은 모바일에서 데이터센터로 급격하게 이동 중이다. 특히 생성형 인공지능(AI)이 불러온 반도체 산업의 대전환기를 맞아 삼성전자는 새로운 혁신을 이끌 차세대 기술 확보가 절실한 상황이다.
기흥캠퍼스의 이 NRD-K는 10만9000㎡(3만3000여 평) 규모로, 반도체 R&D 전용 라인을 포함한다. 삼성전자는 이 R&D 단지 조성에만 2030년까지 총 20조원을 투자할 방침이다.
지금까지 세계 최초로 불리는 삼성전자 반도체의 혁신 기술은 모두 반도체연구소에서 탄생했다.
NRD-K 단지도 각종 최첨단 설비를 갖춘 R&D 시설이 될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특히 ‘마의 벽’으로 통하는 10나노 미만 한 자릿수 노드 공정을 적용한 D램과 500단 이상 고단 적층 낸드플래시를 위한 기술 확보에 집중할 방침이다.
또 메모리를 넘어 고성능 컴퓨팅(HPC) 분야 반도체 설계와 2나노 미만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의 기술 개발에도 주력할 예정이다.
기흥캠퍼스 R&D 전진기지는 국내 반도체 생태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삼성전자는 이곳에서 근원적 기술 연구부터 제품 개발까지 모두 한 곳에서 추진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고도화한다. 국내외 소재·장비·부품 분야 협력사들과 R&D 생태계 협력도 더 강화한다.
삼성전자가 NRD-K에 거는 기대도 남다르다. 기흥캠퍼스는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을 처음 시작한 상징적인 곳이다. 삼성전자는 현재 경쟁사들과 압도적인 차이를 벌려 추격이 어려울 정도의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이른바 ‘초격차’ 전략이 대전환점을 맞고 있다. 단적으로 AI용 메모리 시장에선 기술 리더십을 잃었고, AI 반도체 제조를 위한 파운드리 시장 경쟁력에도 물음표가 생기고 있다. 반도체 사업뿐 아니라 스마트폰, TV, 생활가전 등도 거센 추격을 받고 있다. 현 상황 돌파를 위해서는 과감한 기술 혁신이 필요하다는 안팎의 지적이 잇따른다.
삼성전자가 처음 반도체 시장에 진출했을 때도 삼성의 성공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일본 미쓰비시연구소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 진출이 3년 안에 실패할 것으로 봤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1983년 모두의 예상을 깨고 64Kb 개발 착수 6개월 만에 성공했다. 총 309개에 달하는 생산, 조립, 검사까지 모든 공정을 완전히 내재화했다. 삼성전자는 이후 1993년 세계 1위에 등극한 이래 30년간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있다. R&D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과 투자의 결과다.
2. SK하이닉스 이천 R&D센터
영동고속도로 이천나들목을 나와 경충대로를 타고 자동차로 2분 정도 달리다 보면 나비 모양의 철골구조로 만든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 정문이 나온다. 이 정문을 지나서 주 도로 왼쪽으로 아파트 37층 높이의 거대한 반도체 공장이 위용을 드러낸다. 이 공장을 끼고 다시 왼쪽으로 400m를 더 가면 공장 못지않게 높게 솟은 통유리 건물이 보인다.
업무 시간에 이 건물 1층에선 연구원들과 협력업체 직원들이 캐노피 아래에서 자료를 들여다보며 진지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지상 15층, 지하 5층 규모로 연면적 9만㎡에 달하는 이 건물은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의 R&D 센터다.
SK하이닉스는 2019년 2000억 원을 투입해 이천캠퍼스 생산공장인 M14 옆에 이 R&D 센터를 완공했다. 이곳은 D램과 낸드플래시, 고대역폭메모리(HBM)까지 차세대 반도체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세상에 처음 선보이는 곳이다.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연구개발이 이뤄지는 총본산이 바로 이 R&D센터다.
SK하이닉스는 현재 미국, 대만, 폴란드, 일본 등 전 세계에 5개 연구개발 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이 법인은 대부분 낸드 솔루션을 연구 개발하고 있다. 이천캠퍼스 내에서도 미래기술연구원과 기반기술센터는 차세대 공정 제품과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을 집중 연구개발하고 있다. 이천 R&D 센터는 각 조직에서 연구개발을 맡던 인력 4000여 명을 한 공간에 모아놓고, D램과 낸드, HBM 등 핵심 제품 전반을 체계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SK하이닉스의 전 세계 연구센터 중 핵심 제품 전반에 대해 심도있게 연구·개발 하는 곳은 이천 R&D 센터가 유일하다. 일종의 R&D 허브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SK하이닉스의 미래 로드맵이 이곳에서 구상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천캠퍼스 R&D 센터는 첨단 장비와 시설들도 제대로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다. 향후 반도체 시장을 주도할 6세대 ‘HBM4‘와 7세대 ‘HBM4E’ 등 차세대 HBM들도 이곳이 사실상의 고향이다.
이천 R&D 센터에는 컨퍼런스홀인 ‘인피티니홀’도 인상적이다. 이곳에는 수백명이 참관할 수 있는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대형 스크린까지 설치돼 있다. 이천캠퍼스 내 여러 핵심구역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선 와이파이나 무선인터넷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인피니티홀은 지난 5월 이천캠퍼스 내 공식 기자간담회가 최초로 열린 곳이기도 하다. 당시 간담회에 등장한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은 (2016~2024년) HBM의 누적 매출액을 130억~170억 달러라고 공개한 바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올 초 새해 첫 현장경영으로 이천 R&D 센터를 방문했다. 최 회장은 곽 사장 등 주요 경영진들을 만나 HBM 등 AI 메모리 분야 성장 동력 및 올해 경영 방침을 점검했다. 이천 R&D 센터가 차세대 반도체 개발에 선두를 서는 곳인 만큼 최 회장 역시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그 동안 R&D 투자에 공을 들여왔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상반기 공개한 ‘세계 R&D 투자 상위 기업 현황’에 따르면 매출액 대비 R&D 투자 규모를 뜻하는 R&D 집적도는 SK하이닉스가 10.1%로 10대 기업 중 유일하게 10%를 넘겼다. SK하이닉스의 3분기 R&D 투자금은 3조5584억 원으로 전년 동기(3조1356억 원)보다 4000억 원 이상 증가했다.
3. 현대차 마북연구소
현대차그룹의 수소 개발 ‘심장’인 마북 환경기술연구소(이하 마북연구소)는 글로벌 1위 수소전기차의 기술력을 총망라한 공간이다. 그만큼 현대차그룹에서 보안이 철저하다. 경기도 용인 구성역에서 차로 10분 거리이지만, 연구소 내부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3개 연구동에서 각각 어떤 연구개발을 진행하는지 서로 모를 정도다.
마북연구소 개발 계획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수소연료전지 연구개발 전담 조직을 신설한 현대차그룹은 2005년 마북연구소를 건립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현대차는 2004년 독자 개발한 수소연료전지 스택(수소를 전기로 변환하는 부품)에 만족하지 않고 수소전기차 개발에 뛰어들었다.
김덕환 현대차그룹 수소연료전지설계1실 실장은 “이 노력의 결실로 2013년 세계 최초의 수소전기차 양산 모델인 ‘투싼 ix Fuel Cell‘을 출시하며 수소전기차 시대를 열었다”고 말했다.
이어 현대차는 2018년 수소전기차 전용 모델 ‘넥쏘(NEXO)’를 출시하며 대중화를 이끌었다. 김 실장은 “현재까지 수소전기차 분야 누적 판매량 1위를 기록하고 있다”며 “2025년 차세대 수소전기차 출시를 목표로 끊임없는 혁신을 이어가고 있으며,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
총 8700평 규모의 3개 연구동으로 꾸려진 마북연구소에선 수소연료전지의 핵심 기술 개발을 위한 전 과정을 연구한다. 수소연료전지의 핵심 소재인 막전극접합체(MEA) 뿐 아니라 스택 설계 및 조립, 완성한 스택의 성능 평가까지 진행한다. 수소연료전지 개발의 모든 단계를 아우르는 첨단 연구 설비를 완비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차그룹에는 수소연료전지 연구 인력만 900여 명에 달한다.
마북연구소에서 주목하는 기술 중 하나는 수소연료전지 시스템 제어 기술이다. 현대차그룹은 수소연료전지 시스템 운전을 위한 제어 기술을 자체 개발했다. 이를 통해 시스템 구동을 통한 목표 성능 구현,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에 최적화된 운전, 목표 내구성 달성 등이 가능하다.
이 모든 제어 기술을 마북연구소에서 개발하고 있다. 김 실장은 “하드웨어 설계와 제어 기술 개발이 마북연구소에서 동시에 이뤄져 개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마북연구소는 극한 환경에서 부품들을 평가할 설비도 보유하고 있다. 영하 40도 이하의 극한 환경과 875바(bar)의 고압 환경에서 고압 부품의 기밀성 및 여러 부품의 성능과 내구성을 검증하는 설비가 즐비하다. 이 때문에 단순 연구소를 넘어 현대차그룹의 수소 모빌리티 기술 혁신을 이끄는 핵심 엔진이라는 평이다.
설계 및 성능 개발 조직뿐 아니라 품질, 구매, 생산 조직이 한 곳에 모여 있다는 것도 강점이다. 통합적인 조직 구조를 구축해 개발 초기 단계부터 양산 단계까지 모든 과정을 긴밀하게 연계한 것이다. 이를 통해 수소연료전지 개발 초기 단계에서 최종 양산 시점의 모든 과정을 꼼꼼히 점검할 수 있다.
김 실장은 “단순히 이론적인 연구에 그치지 않고 실제 양산까지 고려하는 실용적인 연구 개발을 지향하는 것이 환경기술연구소의 강점”이라고 했다.
마북연구소에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의 도전정신도 녹아 있다. 일찌감치 수소전기차의 성장성을 내다본 정 명예회장은 수소전기차 개발을 위해 마북연구소를 구축했다.
정 명예회장은 2005년 마북연구소 방문해 “한번 만들어서는 절대 잘 만들 수 없다”며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젊은 기술자들이 만들고 싶은 차는 다 만들어 보라”고 했다. 또 “돈 아낀다고 똑같은 차 100대 만들 필요 없다”며 “100대가 다 다른 차가 되어도 좋다”고 격려했다. 정 명예회장의 이 같은 수소전기차 미래에 향한 투자와 연구개발 독려가 글로벌 수소전기차 1위의 초석이 됐다.
정 명예회장의 수소전기차 선도를 향한 혁신은 그의 아들인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이어받았다. 정의선 회장은 지난해 초 세계 최대 가전·IT(정보기술) 전시회인 CES에서 수소 밸류체인 사업 브랜드인 ‘HTWO’를 발표했다.
또 수소의 생산, 저장, 운송 및 활용 전반에 걸쳐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하는 ‘HTWO Grid’ 비전을 공개했다. 당시 정의선 회장은 “수소 에너지로의 전환은 미래 세대를 위한 것”이라며 그룹사 역량을 결집해 수소 관련 사업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