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러시아 석유 산업에 대한 제재 여파로 국제유가가 다섯 달 만에 최고치를 갈아치운 가운데 상승세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주목된다. 1월 15일(현지 시각) 뉴욕상업거래소에서 2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선물 종가는 배럴당 80.04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8월 이후 5개월 만에 최고치다. WTI 가격은 연말 대비 12%가량 올랐다. 치솟는 국제유가에 국내유가도 덩달아 오르며 1700원대를 돌파했다.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 시스템 오피넷에 따르면 전국 주유소 휘발유 평균 판매 가격은 1월 셋째 주(12~16일) 기준 직전 주 대비 ℓ당 18.0원 상승한 1706.1원을 기록했다. 경유 평균 판매가격은 ℓ당 21.8원 상승한 1556.9원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10월 1500원대 후반까지 하락한 뒤 줄곧 상승세를 보이면서 3개월 만에 120원 이상 올랐다.
미국의 러시아 제재 여파로 WTI 배럴당 80달러 돌파, 국제유가 단기 강세
유가 뛰자 원유 ETN·ETF 수익률 급등···4Q 정유사 실적 턴어라운드 추세
인플레이션 급등에 연준 금리 인하 지연?···고환율까지 한은 금리 인하 제약
▲ 국내 주유소 휘발유와 경유 평균 판매가격이 14주 연속 상승한 1월 19일 오전 서울 시내의 한 주유소에 유가정보가 표시되어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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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가 강세는 미국이 러시아 원유에 대한 광범위한 추가 제재를 발표한 영향을 받았다. 앞서 1월 10일 미국 재무부는 러시아 석유회사인 가즈프롬 네프트와 수르구트네프테 가스를 제재한다고 발표했다. 유조선 등 183척의 선박도 제재한다고 밝혔는데, 이들은 대부분이 제재 회피, 밀수, 불법 해상활동에 관련된 이른바 ‘그림자 선단’에 해당한다.
또 겨울 난방연료 수요 증가, 원유재고 감소, 석유수출국기구(OPEC·오펙)와 러시아 등 주요 산유국 그룹이 모인 OPEC+(오펙 플러스) 감산 연장 등이 타이트한 수급을 야기하며 국제유가를 끌어올렸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미국의 평균 난방 일수는 2023년 12월보다 높았다. 이에 따라 지난해 글로벌 원유 수요 증가 전망치를 일평균 84만 배럴에서 94만 배럴로 상향 조정했다.
수요와 달리 공급 불확실성은 커지고 있다. 오펙 플러스가 감산 규모 축소 시기를 올해 1월에서 4월로 연기하고 기존에 발표된 내용보다 더 느리게 증산 속도를 가져갈 것으로 발표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 행정부의 러시아 석유 제재 발표는 원유 시장 내 공급 부족 우려를 키우고 있다.
심수빈 키움증권 연구원은 “러시아 원유 수입이 어려워지는 경우 이를 대체하기 위해 다른 지역의 원유 수입이 늘어날 것”이라며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생 이후 러시아산 원유를 적극 수입했던 국가는 중국·인도이며 이들은 현재 원유 소비가 상대적으로 빠르게 늘어나는 국가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북반구의 추운 날씨로 인해 북미지역의 원유 생산 차질도 언급되는 상황이다”라고 설명했다.
염가의 러시아 원유 유입이 어려워진다면 이들의 중질유 수요는 중동·아프리카 또는 캐나다산으로 이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영훈 삼성증권 연구원은 “미국과 유럽에서 발생한 한파로 난방유 수요가 증가하며 유가를 견인했다. 공급 측 영향은 상대적으로 감소한 가운데 한파의 지속 여부가 단기 유가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한파가 잦아든 이후에는 재고 증가 흐름에 맞춰 백워데이션(선물 가격이 현물 가격보다 낮은 현상) 축소와 유가 안정화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국제유가가 배럴당 80달러 선 안팎에서 등락을 이어갈 것으로 예상했다. 단기 상승을 보인 뒤 중장기적인 공급 과잉이 지속되며 점진적인 조정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원유선물·정유株까지 들썩
국제유가가 치솟으면서 원유선물 상장지수펀드(ETF)와 상장지수증권(ETN), 정유주들의 수익률이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1월 19일 코스콤 ETF CHECK(체크)에 따르면 최근 한 달 동안 원유선물 관련 상품들은 두 자릿수 상승률을 기록했다. 2024년 12월 17일부터 1월 17일까지 ▲N2 블룸버그 2X WTI 원유선물 ETN(29.11%) ▲한투 블룸버그 레버리지 WTI원유 선물 ETN(28.68%) ▲삼성 레버리지 WTI원유 선물 ETN(28.45%) 등 원유 선물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레버리지 ETN 상품들은 일제히 강세를 나타냈다.
같은 기간 ‘KODEX 원유선물(H) ETF’와 ‘TIGER 원유선물 Enhanced(H) ETF’도 각각 12.83%, 12.43%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원유선물 상품들의 수익률 급등은 중국의 경기 부양책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된 가운데, 미국이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에 대해 광범위한 제재를 가한 것이 주요인으로 작용했다. 미국 정부는 1월 10일(현지 시각) 러시아 석유회사와 러시아산 석유를 수송하는 유조선 등에 대한 제재를 발표했으며, 이후 국제유가는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미국의 한파와 원유 재고 감소 이슈가 더해지면서 국제유가는 지속적인 상승 흐름을 이어갔다.
국제유가 상승세가 지속되면서 국내 정유주들은 실적 개선에 대한 기대감으로 주가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 한 달 동안 SK이노베이션과 S-Oil의 주가는 10~20%대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지난해 정유주들은 고금리 장기화에 따른 석유 수요 부진과 유가의 박스권 장세로 실적 부진에 시달렸다. 지난해 3분기 국내 주요 정유 4사의 합산 영업손실은 1조5000억 원에 달했다. SK이노베이션(-4233억 원) S-OIL(-4149억 원), GS칼텍스(-3529억 원), HD현대오일뱅크(-2681억 원)는 큰 폭의 적자를 기록했다.
실적 부진의 영향으로 S-Oil 주가는 지난해 12월 9일 장중 5만3400원까지 하락하며, 같은 해 4월 8일 기록한 고점(8만4500원) 대비 36.8%나 떨어졌다.
그러나 최근 유가가 급등하고 정제 마진이 개선되면서 지난해 4분기 정유주들이 흑자 전환에 성공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유안타증권에 따르면 싱가포르 복합 정제 마진은 지난해 3분기와 4분기 초에 배럴당 3.6달러로 정유사들의 손익분기점(4~5달러)을 밑돌았으나, 12월에는 5.3달러로 상승하며 실적 개선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유가, 금리 인하 발목 잡나
국제유가가 배럴당 90달러로 치솟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인플레이션 자극 우려가 높아지며 글로벌 중앙은행들의 금리 인하 발목을 잡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1월 15일 기준 2월 인도분 WTI는 전장 대비 3.28% 오른 배럴당 80.04달러로 80달러를 넘어섰다. 같은날 ICE 선물거래소에서 글로벌 벤치마크인 브렌트유 3월 인도분 가격은 전장보다 2.64% 오른 82.03달러에 마무리했다. 2024년 8월 12일 이후 최고 수준이다.
이스라엘군과 하마스가 가자지구 전쟁 발발 15개월 만에 휴전에 전격 합의해 유가 압력이 줄었다. 그럼에도 유가가 뛴 것은 미국의 러시아 석유산업 제재 여파다. 골드만삭스는 트럼프 행정부도 러시아 제재를 이어갈 것으로 관측하며 여기에 이란 제재까지 더해질 경우 3월엔 브렌트유가 배럴당 90달러까지 오를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문제는 예상치 못한 유가 반등이 글로벌 각국의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의 경기 호조와 트럼프 신정부의 보호 무역 및 불법 이민 강경책 등으로 물가 압력 우려가 커진 상황이다. 이는 그대로 연방준비제도의 금리 인하 지연 가능성을 더 크게 할 수 있다. 5월까지 인하 기대가 밀린 상황에서 최근엔 되레 금리 인상 주장까지 나오는 분위기다.
미국의 금리 인하 지연은 경기 하강 우려에 금리 인하가 시급한 우리나라에도 악재다. 미국이 금리를 낮추지 않은 상황에서는 한은의 통화 완화는 한미 금리 역전차 확대에 따른 자본 유출 우려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은의 연준과의 통화정책에 엇박자를 내며 선제적으로 금리 인하에 나서기는 버거운 상황이란 얘기다.
국내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진다는 점도 골칫거리다. 물가 안정은 한은이 통화정책 운용에 있어 가장 무게를 두는 목표다. 경기 부양이 시급한 상황이더라도 최근 강달러와 국내 정국 불안과 함께 유가 상승이 물가 압력을 높이면 한은으로서도 섣불리 금리 인하에 나서기 어려워진다.
최근 유가 수준은 한은의 전망치를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한은은 지난해 11월 경제 전망을 통해 올해 성장률과 물가 전망치를 각각 1.9%로 내다봤다. 당시 전망 근거로 삼은 유가 수준은 브렌트유 기준 올해 상반기 배럴당 73달러, 하반기 72달러로 현 수준인 80달러에 크게 못 미친다. 고유가·고환율 지속에 물가가 다시 2%대를 넘게 되면 한은의 통화 완화에도 제약이 생긴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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