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권 장편소설 '형제복지원-회색 구슬 속의 산 18번지 왕국' 제14회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옆엔 늘 죽음의 그림자가 떠돌았다

글/김영권(소설가) | 기사입력 2020/10/08 [14:30]

김영권 장편소설 '형제복지원-회색 구슬 속의 산 18번지 왕국' 제14회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옆엔 늘 죽음의 그림자가 떠돌았다

글/김영권(소설가) | 입력 : 2020/10/08 [14:30]

허연 바위산 기슭에서 한 사람이 망치질하며 조각을 하고 있었다
혹시 그 사내는 형제복지원 원생들의 고난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살인마적 죄인이 승승장구하는 꼴을 보노라면 화병 도질 수밖에…
피해생존자 원한 풀어줘야 할 텐데 국회 선량들은 당쟁만 일삼고…

 

▲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가 2019년 12월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 9호선 국회의사당역 지붕에 올라가 농성을 하고 있다. 

 

제3부 <8>바위 사람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이 단식 중인 허름한 비닐 천막을 나온 우리는 여의도 광장을 지나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모든 짐승과 인간은 자기에게 필요하지 않은 한 느림보짓을 하거나 방해한다. 사리사욕을 이겨낸 자들만이 자기 이익과 상관없이 공동체의 큰 일을 위해 노력한다.


저 거창스런 의사당 안에 그런 인간은 많지 않다. 이놈 저놈, 이년 저년, 선거 유세 땐 감언이설을 해놓곤 일단 당선되면 제 뱃속 채우기에 바쁘다. 한사코 당리당략에 목을 매는 수구 꼴통파든 올바른 진로(進路, 眞路)를 앞에 놓고도 눈치 보며 미적거리는 자칭 진보 여당이든 공수병 걸린 개같긴 거의 마찬가지다.


이럴 땐 국민이 직접 나서서 그 잘난 입에 재갈을 물려 끌고 몽둥이 채찍질을 해 몰아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주권자가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잠시 위탁받았을 뿐이므로(그토록 무소불위 견고하던 검찰의 성도 마침내 밝은 국민들의 촛불로 무너졌다. 저 겉만 하얀 국회의사당 또한 평범한 양심을 지닌 일반 국민들의 힘으로 환히 빛나게 되리라).
겨우 전철역에 닿아 막차를 탔다. 쇠마차는 철교 위에 말발굽 소리를 내며 강을 건너갔다.


세느 강이나 러시아의 네바 강보다 내가 더 좋아하는 한강…. 다른 강들도 그렇겠지만 유유히 흐르는 듯 마는 듯한 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한민족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공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인조 가로등 빛에 희번득거릴 뿐 속내는 보이지 않는다. 전철 속의 인간들 또한 그러해 보인다. 저 강물은 무심한 듯싶어도 좀더 나은 삶을, 좀더 푸른 물을 추구하며 절망과 고통을 넘어 흐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도 내가 쫌 도움이 됐죠?”


솜희가 손가방에서 사탕을 꺼내 자기 입속에 넣었다가 내 입에 물려 준 후 말했다.


“뭐?”


“아이 참, 자기처럼 무뚝뚝하고 말주변도 별로 없는 남자 혼자 갔다면… 스산한 비닐 천막 속에서 그런 화기애애한 얘기가 꽃필 수 있었겠어요, 응?”


“은근슬쩍 자화자찬을 하는군. 하지만 얘기꽃이 핀 건 아니지. 그들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한 마디는 고통의 반추였으니까.”


“그렇긴 해요. 아무튼 꺼내기 힘든 얘길 애써 길어 올려 서로 나눴잖아요.”


“흠, 혹시 만일 나 혼자 갔다면 또 다른 얘기가 나왔을지도 모르지.”


“흥, 욕심쟁이!”


그녀는 손톱으로 내 볼을 세게 꼬집었다.


난 아픔을 참았다. 이런 경우 고통은 일순 쾌감으로 변화되기도 하지만, 황량한 여의도 벌판에서 단식하는 그들은 시시각각 갈퀴 세워 심신을 파먹는 절망 속에 어찌 견뎌낼지 걱정스러웠다.

 

그날 밤은 육체적 유희 없이 잠들었다.


어슴푸레한 황야였다. 허연 바위산 기슭에서 한 사람이 망치 소리를 내며 무슨 조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체가 알몸인 그 사내는 정과 망치로 바위를 애써 파 자신의 하반신을 만드는 모습이었다. 아니, 바위 속에 파묻힌 하체를 쪼아 뽑아낸다고나 할까. 아주 필사적이었다. 그의 입술과 손에선 피가 흘러내려 허리를 벌겋게 물들였다. 마치 무슨 괴악마가 바위 속에서 끌어당기기라도 하듯 피땀을 뻘뻘 흘리며 벗어나려 발버둥쳤다.


난 그 사내가 빨리 빠져나오길 바랐다. 헌데 불현듯 그의 상반신이 쑥 바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핏방울만 불수처럼 튀어올라 내 얼굴을 적셨다.


잠에서 깬 나는 허전한 기분에 젖은 채 과연 그 꿈이 뭘 의미하는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혹시 그 사내는 형제복지원 원생들의 고난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인간으로서 자기 존재 찾기. 현실 지옥에 갇혀 폭력에 의해 괴물화되어 가는 자신의 인간성을 되찾아 보고픈 소망… 비닐 천막에서 기어나와 한 인간으로서 살고픈 희망….

 

하지만 박 원장은 그들의 꿈을 짓밟아 버렸다.


철장 안에서도 그랬지만, 원생들은 수용소 철문을 벗어나 해방된 후에도 극심한 트라우마와 각종 심신의 고통에 시달렸다. 사회 현실에 적응하려 발버둥치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많았다.


가해자인 박 원장은 어땠는가?


경천동지할 만한 죄악 행위가 발각돼 법정에 선 그 자는 겨우 2년형을 선고받고 잠시 수감됐다가 곧 출소한 후 요양차 외국으로 건너갔다. 왕국의 황제 자리에선 물러났지만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전 세계의 명승지를 두루 유람했는지 모른다. 호의호식하며….


그 자의 마음속에 아마 형제복지원과 원생들은 전혀 들지 않았으리라. 왜냐하면 이젠 돈이 화수분처럼 나오는 구멍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밑구멍이 켕기는 상황이었을 테니까. <그것이 알고 싶다>의 카메라에 찍힌 장면을 보면, 박 원장은 어려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자신이 베푼 선행은 잔뜩 부풀리고 악업은 치매 증상 때문에 기억하지 못한다고 강변했다.

 

아버지가 번 돈 덕택에 미국 유학까지 한 그의 아들은 한술 더 떠 입에 거품을 물며 “이제 와서 없는 사실을 파헤치려 발광하지 말고, 그 당시의 진실에 주목하라! 그러면 우리 아버지가 희대의 영웅 애국자로 보일 것이다!”라고 지랄쳤다.


얼마 후, 여론이 사그라들자 그들 두 부자는 스리슬쩍 화투 패를 바꿔 노인요양복지원을 개설했다. 뿐만 아니라 뒤이어 거창한 레포츠 단지도 조성했다.


만일 가해자가 적절히 벌을 받는다면 피해자들의 원한도 조금쯤 풀릴 수 있다. 하지만 살인마적인 죄인이 희희낙락 승승장구하는 꼴을 보노라면 화병이 도질 수밖에 없으리라.


옛날부터 권력자들에게 삶과 생명을 애꿎이 침탈당해 온 한국 사람들은 ‘세월이 약’이라느니 ‘인생만사 새옹지마’라느니 너스레를 떨지만…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경우엔 출소 후에도 고통의 연속이었고 옆엔 늘 죽음의 그림자가 떠돌았다.


가슴속에 깃든 원한과 억울한 심정을 풀어 줘야만 할 텐데, 여의도 국회의 선량님네들은 그들의 호소를 무시한 채 당쟁만 일삼고 있었다. 마치 그들은 인간 쓰레기라는 듯이….


(문무일 검찰총장은 한국판 아우슈비츠로 불리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대법원에 비상상고를 신청했다. 비상상고란 형사사건 확정판결에서 법령 위반이 발견됐을 때 검찰총장이 대법원에 잘못을 바로잡아 달라며 직접 상고하는 구제절차다. 앞서 대검찰청 검찰개혁위원회와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는 문 총장에게 비상상고 신청을 권고했다. 한편 피해 생존자들은, 뒤늦게나마 이뤄진 검찰의 사과는 환영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질적인 피해 회복을 위해서는 국회에 계류 중인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 형제복지원에서는 1975년부터 시설이 폐쇄된 1987년까지 3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강제노역을 당했고, 513명의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목숨을 잃었다. 사진은 SBS 시사교양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형제복지원에 대해 다룬 장면. 

 

제3부 <9>허공을 떠도는 지옥


허연 눈발이 펄펄 흩날리는 날이었다.
백설이라곤 해도 오염물질이 잔뜩 섞인 듯싶어 별로 정겹진 않았으나… 그래도 더 소복이 내려 세상의 추악을 덮어 주길 바랐다. 설령 오염된 눈송이일지언정 내 마음보다는 더 깨끗한 모습이었다.


‘아, 나 자신의 좌와 악은 어쩔꼬! 내 죄악의 씨앗은 꽁꽁 숨겨두고 남의 과오만 캐내 탓하려는 건 도둑놈 사기꾼과 같은 짓이겠지.’


난 무분별한 과거 행각을 되짚어 보았다. 이제까지 해온 노릇이 과연 나 자신의 본심과 정신으로부터 나왔는지 의심스러웠다.


‘솜희와 육체관계를 맺고 연인인 양 행세하고 있지만 정말로 사랑하는 걸까? 애초의 증오감이 많이 사그라지긴 했으나, 에로틱한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면 과연 어땠을까? 그리고 솜희가 마치 나르시스의 연인 에코처럼 순종하지 않았다면 혹시… 목 졸라 죽이지 않았을까?’


그 당시 내 심정은 충분히 그랬다.


지금 당장이라도 솜희가 경찰에 신고한다면 난 범죄자 신세로 전락하는 셈이다. 경찰서나 검찰청에 불려 가서 탈탈 털린다면 난 악의 개망나니로 낙인 찍힐 수도 있다. 더구나 그녀의 부모가 행방이 묘연하므로 수사 개시 후엔 살인자로 지목돼 인권이 말살당한 채 온갖 유언비어와 악플에 시달리게 되리라.


사실상 시멘트 건물 속에선 그런 소문이 떠돌았다. 말없는 속삭임으로… 만일 언젠가 그들 부부가 어디 먼 여행을 갔다 돌아온다 할지라도, 일단 한번 씌워진 쇠 굴레는 쉽게 벗겨지지 않으리라.


얼마 전부터 솜희는 입맛을 잃은 채 유튜브 먹방만 보고 있었다. 아마 욕망 대리충족 방법이 아닌가 싶었다. 나도 호기심에 몇 번 본 적이 있다. 배가 좀 고플 때 내가 좋아하는 국수나 된장찌개를 맛있게 먹는 모습은 구경할 만했으나, 포만감을 넘어 억지로 우겨 넣는 짓은 징그럽고 추악스러워 보였다.


그걸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욕망의 자유 방만한 표현… 이 세상엔 아직 못 먹어 굶어 죽는 사람들도 많은데… 세상이 워낙 괴상망측하다 보니 그들도 기괴스런 생존 방법을 모색해냈는지도 몰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요긴한 돈과 명예욕을 챙기기만 한다면… 한 세상 그럭저럭 살아갈 만할 테니까. 설령 위장병이 생기더라도, 그것마저 활용해 병원에서 동영상을 찍어 편집해 만들지 모르는 작자들이니 뭐.


정신과 영혼의 허기를 그런 먹방으로 위로받는다는 얘기도 있더라만… 찰나적인 욕망 해소일 뿐, 인간의 마음은 점차 더 갈증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게 아닌지….


솜희가 먹방 보는 걸 말리진 않았다. 대리만족의 효과도 생각했으나, 그녀 스스로 잠시 잠깐 보곤 침대로 가 누웠으니까. 그 정돈 이해할 만했다.


으스산한 비 내리는 날 비닐 천막 속에서 단식하는 자들을 떠올리면 솜희뿐 아니라 누구든 며칠쯤 굶는 건 그닥 대수로워 보이지 않았다. 과식한 자들이 지방 비계를 빼느라 단식하는 꼴과는 많이 다르잖겠는가. 신이 보든 인간의 눈으로 보든….


문제는 솜희가 구역질을 하는 꼴이 혹시 임신 증상이 아닌가 싶어 걱정이었다. 그 무렵부터 왠지 침대에서 육체적 향락을 거부하고 자꾸 정신적 교류 쪽으로 흘러가려 했다. 키자주 하던 성적인 농담만 꺼내도 헛구역질을 할 지경이었다.


솜희는 아기를 낳으면 아빠인 나처럼 삐딱한 생각에 빠지지 않은 바른 아이로 키우겠다며 은근히 기대에 차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삐딱해지고 싶어 삐닥해졌겠는가. 나도 나름 인고의 노력을 했다. 허나 세상 자체가 추악한데 어찌 한 개인이 독야청정할 수 있으리오.


사상가는 이상을 추구한답시며 진흙탕에서 슬쩍 발을 빼 날아갈지언정, 소설가는 현실의 뻘밭을 기어 진실인지 뭔지 추출해 내야 하는 셈이다. 아, 시대착오적 장르인 소설… 나도 내버리고 빠져나가 아름다운 자본주의 시대의 고속도로를 활보하고 싶다.


하지만 희망도 걱정도 더 이상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솜희가 상상임신의 꿈에 현혹돼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던 것이다. 그녀는 살짝 우울증에 걸린 모습으로 툭 물음을 던지곤 했다.


“덧없고 어이없어… 자긴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어떤 어이없는 일을 겪었나요? 그중 가장 어처구니없고 허망한 경험 하나만 얘기해 줘, 응?”


“흠, 그야 물론 형제복지원이겠지. 그리고 삼청교육대, 소록도 나환자 수용소, 서산 개척단 등… 무수히 많지.”


“그건 직접 겪은 게 아니잖아요.”


“그럼… 세월호 생명 매장 사건은…?”


“그건 물론 가장 어이없는 비극이고 슬픈 사건이었죠. 다신 그런 일이 없길 바라지만… 모습만 바꿔 늘 일상적으로 생겨나고 있잖아요. 자기의 진짜 체험으로 날 좀 위로해 줘요.”


“그럼 좀 재밌는 얘길 해 볼까.”


“그래 줘, 응.”


“초딩 때 난 호기심이 많은 편이었지. 어느 날, 수업이 끝난 후 노을이 지고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운동장 한 구석에 앉아 과연 인생이 무엇인지 생각하던 난 어슬렁 어슬렁 숙직실 쪽으로 걸어갔어. 어떤 선생님이 있을지 모르지만, 한번 여쭤 보고 가능하면 토론도 해보고 싶었지.

 

그런데 컴컴한 창문 안쪽에서 묘한 신음 소리가 들려오더군. 고통스러운가 싶으면 그렇지도 않고 쾌락인가 싶으면 꼭 그렇지도 않은 기묘한 소리였어. 난 깨끔발로 선 채 유리창 안쪽을 보려고 애썼지. 헌데 흐릿한 낡은 전등 빛 아래서 본 건 놀랍게도 담임인 유은희 선생님의 모습이었어. 평소에 요조숙녀로 알려져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대체 웬일일까? 난 최대한 발돋움을 했지만 유 선생을 농락하는 자는 뒷모습밖에 볼 수 없어서 정말 안타까웠어.

 

난 발자국 소릴 죽인 채 그곳을 떠났지…다음날에도 유 선생님은 여전히 요조숙녀다운 모습으로 교탁 앞에서 우리들을 가르쳤지. 하지만 난 서글픈 소년 시절을 보냈어.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을 뿐이지만 그땐 나름 심각했던 것 같아….”


“에구, 그래서 여자를 본모습대로 못 보고 일그러진 거울 속의 얼굴을 속 깊이 증오했는지도 몰라. 이젠 그러지 말아요.”


솜희는 부드러워진 손길로 내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었다.


“….”


“상처 입은 소년에서 멋진 청년으로 자라주면 좋겠어요.”


그녀는 잠시 후 눈물이 글썽거리는 채로 덧붙였다.


“형제원 피해자분들도… 과거의 어두운 철망 속에서 벗어나, 상처에 제 나름의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면….”


난 솜희를 껴안았다. 그 순간만큼은 육욕과 야비한 정복욕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과 영혼의 교류 속에서 고양된 기쁨을 느끼며,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던 과거가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었다.


내 가슴팍에 볼을 댄 채 부비던 솜희는 눈을 들어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혀로 눈물 자국을 지워 주었다.


“자기야…… 어떤 책을 보니, 사랑에 빠진 남자 녀석이 여자에게 ‘오,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매혹적인, 인간의 모습을 한 일종의 낙원…’이라고 아부하는 장면이 있거든. 이제야 그 말이 진실이란 걸 알겠어.”


“피, 거짓말.”


“그런데 여자는 남자를 어찌 느끼는지 궁금해.”


“글쎄… 사랑이란 고통의 띠를 두른 즐거움…이란 얘기도 있던걸요.”


“음, 그거야 남녀 모두의 인지상정일 텐데 뭐.”


“그래도 느끼는 빛깔이야 각양각색이겠죠. 그 띠 속에 증오와 애린과 절망의 꿈이 섞였을 수도 있을 거예요.”


“혹시, 나를 증오해?”


“글쎄, 몰라요. 애증의 감정이 식지 않고 활화산인 양 타오르고 있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만약 자기가 지옥에 떨어진다면 나도 함께 갈게요.”


“그런 소리 하지 마. 처음엔 육체적으로 이용하려 했지만, 이제 정신적으로 사랑해. 영혼 속의 공주여, 울분이 가슴속을 채우던 그 당시엔 자길 여노예로 삼아 능욕하고 싶었으나… 지금은 내가 오히려 그대의 노예가 돼 목숨마저 바치고 싶어.”


“호호, 한번 속아 볼까나….”


솜희는 인생 무대의 여배우처럼 독백하며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도 따라가 섰다. 창밖엔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오염된 백설은 차츰 도시의 누추한 풍경을 덮으며 모종의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아, 아빠 엄마는 어디에 있을까?”


솜희가 중얼거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 세계일주 여행을 하고 계시는지도 모르잖아.”


난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암시는 주지 않았다. 한국 땅에서 해마다 1만 건이 넘는 실종 사건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수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여자와 아이들이 미스터리 속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단순 가출(잠적) 후 자진 귀가하는 경우를 빼더라도 수천 명이 각종 사고에 휩쓸려 생존 여부가 불투명해지는 셈이다. 교통사고, 자살, 납치, 성폭행, 장기적출, 살해 등등 미스터리는 이 지상에서 끝이 없다.


아마 솜희는 알고 있을까?


“응, 그랬으면 좋겠어. 우리도 언제 함께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나 봤으면….”


그녀가 유리창에 입김을 띄우며 말했다.


“그러지 뭐.”


난 억양을 낮춰 대꾸하곤 뒤에서 그녀의 야윈 몸을 꼭 껴안았다.

 

눈발은 점점 거세어져 시공간을 하얗게 덮어 갔다.
문득, 저 하얀 눈이 세상을 덮긴 덮되 선과 악을 좀더 선명히 드러내 비춰 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진실이 요구한다면 난 나의 죄악, 특히 솜희에게 저지른 죄업을 모두 고백하고 참회하고 싶었다. 하지만 솜희는 마치 성모 마리아처럼 아무런 요구도 비난도 하지 않았다.


현실에 내리는 눈은 마음속에 내리는 백설과 달리 오염의 비수를 숨긴 듯싶었으며, 죄악을 숨겨주고 진실과 선업과 아름다움을 차츰 매장해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 눈발 속으로 저 멀리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비닐 천막을 쳐놓고 단식하는 형제(자매)복지원 피해자들의 여윈 얼굴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천지를 허옇게 가리며 회오리치는 저 눈발은 아마 초라한 비닐 막 속 그들의 영혼마저 냉랭히 덮고 있을지 몰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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